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뎀뵤
  • 조회 수 2608
  • 댓글 수 10
  • 추천 수 0
2010년 9월 20일 13시 44분 등록


보약을 먹듯이 택시를 탄다.


매일 아침 내 침대에서는 ‘강미영은 언제 일어날까’ 배 쟁탈전이 벌어진다. 어제 우승팀 ‘지금 일어나야 해’ 팀과 그에 맞서는 도전팀 ‘십 분만 더’ 팀이 치열하게 싸운다. 먼저 ‘지금 일어나야 해’ 팀 ‘벌써 삼 십 분째야’ 선수가 공을 몰고 갑니다. 그러나, ‘십 분만 더’ 팀에 ‘삼일 째 야근’ 선수에게 뺏기고 마네요. ‘삼일 째 야근’ 선수가 ‘발가락 움직일 힘도 없어’ 선수에게 패스! 다시 ‘나를 사랑하자‘ 선수에게 이어지고, 바로 슛을 시도 하네요! 아. 안타깝습니다. 골대 바로 앞에서 ‘아침형 인간이 진정한 자기계발’ 선수의 태클로 다시 ‘지금 일어나야 해’ 팀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머리는 감고 가야지’ 선수와 ‘아침부터 달리면 땀범벅’ 선수가 공격에 나서보지만 ‘택시 타고 가’ 선수에게 완전히 가로 막힙니다. 이어지는 ‘십 분만 더’ 팀의 공격. ‘다 잘 살아 보자고 하는 일인데’ 선수의 결정적 어시스트. ‘택시비 이 만원 까지껏’ 선수의 슛! 슛! 슛! ‘돈 벌러 다니니 쓰러 다니니’ 골키퍼 선수가 막아 보지만 이미 골은 골대 그물을 출렁이면서 골인! 십 분만 더 팀의 승리! 나는 더욱 이불 속으로 쑥 들어간다.

자체적으로 아침잠 한 시간을 득템한 나는, 꿀맛 같은 늦잠을 자고 느즈막히 택시를 타고 출근한다. 택시 출근길은 너무 편하다. 한 시간 더 잔데다가 버스 정거장에서 동동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버스가 눈 앞에서 사라진다고 아쉬워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타고 가는 내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누가 언제쯤 일어날까 신경이 곤두서 있지 않아도 된다. 버스의 급정거 같은 돌발 사태가 발생할 일도 없으니 택시의 뒷자리에서 잠시나마 눈을 붙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렇게 몸은 편한데 맘이 불편하다. 세상에서 절대 인정할 수 없는 것이 택시비라며 침 튀기며 열 올리는 사람도 있고, 술 마시고 집에 가는데 택시비가 아까워서 아예 새벽까지 마신다는 젊은이도 봤다. 그에 비하면 나는 택시를 많이 타는 편이고, 택시비에는 후한편인데도 아침 출근길 택시는 항상 후회와 자책을 동반한다. 어쨌든 사지 말짱한 월급쟁이 회사원이 거금 이 만원을 내고 출근길에 택시를 타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돈 쓰고 마음 불편하게 만드는 일을 한 달에 몇 번씩 반복하는 내가 한심하다.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이면 똑같은 고민을 하고 반복해서 바보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내가 밉기도 했다. 그러니 택시를 탈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택시를 타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침마다 머리는 더 복잡했고 오히려 더 피곤하게 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회사를 옮기면서 아침에 두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야 했다. 예전 회사의 출근 시간이 10시였는데, 9시로 빨라지기도 했거니와 예전 회사보다 출근 시간이 더 걸린다. 게다가 회사 분위기상 30분 정도는 일찍 출근해야 한다. 말이 두 시간이지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긴장감이 더해져 8시에 일어나던 사람이, 5시부터 일어나야 해 일어나야 해를 반복하면서 정신차리려고 애쓰는 상황이 됐다.

그러다 보니 택시 출근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졌고, 매번 고민하면서도 ‘십 분만 더’ 팀을 선택하는 횟수는 점점 늘어났다. 급기야 하루 걸러 하루씩 택시를 타고 출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매일 아침마다 택시비를 계산하는 시간은 점검 길어졌고, 머리는 복잡해서 더욱 피곤한 아침을 보냈다. 그럴수록 그에 대한 자책과 후회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그러면서도 매번 같은 선택을 하는 내 자신이 자기통제가 안 되는 사람 같아 보였고, 순간의 달콤함만을 쫓는 사람 같아 한심해 보였다. 진짜 속상하고 짜증나는 것은 택시비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커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그냥 보름에 한번씩은 택시를 타자고 정했다. 사실 이것은 한 달에 몇 번씩 타던 출근 택시를 2번으로 줄이자! 라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매번 죄책감에 시달리던 마음을 한 달에 두 번 정도는 좀 놓아주자!는 마음에서 시작됐다. 그러니 한 달에 몇 번을 타게 되든 두 번쯤은 당당하게 타자고 생각했다. 보약 먹는 셈치고 출근 택시를 타자고 한 것이다. 한 달에 4만원 내고 내 몸과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해 볼만한 일인 것 같았다.

한 달에 두 번씩 택시를 타기로 하고 나서는 거짓말처럼 출근 택시 타는 숫자는 오히려 줄었다. 한 달에 한번만 타거나 아예 안 타게 될 때도 있었다. 보약 택시는 몸만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을 달래주고 있었다. 스스로 피곤함을 가늠해 보면서 다음을 위해 택시 출근을 킵해 두기도 했다. 그래도 내 몸과 마음이 힘들 때, 편하게 비빌 곳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됐다. 택시를 타면 안 된다는 마음이 나를 더 피곤하고 힘들게 했었다.

몸 편하게 하는 일과 마음 편하게 하는 일은 서로 반대편에 있다고만 생각하다 보니 그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더욱 많은 에너지를 썼다. 몸 편하고 마음 편하게 하는 일이 따로 있는 일이 아닌데, 왜 그토록 엉뚱한 곳에서 방황을 했나 싶다.

생각해 보니 한 달이 가고 일년이 가도 내 마음을 위해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하기만 했다. 나를 기쁘게 하는 일에 너무 인색했다. 오히려 죄책감까지 느끼며 살았다. 어쩔 수 없음에 떠밀려 택시를 타다 보니 어쩌다 한번을 타도 무슨 죄라도 짓는 기분이었다. 참고 견디는 방법만 익혔지 음미하고 즐기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참아야 했고, 아픈 일들은 견뎌야 했다. 그것이 어른스러운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이제 한번쯤은 그런 것들을 놓아 버리고 싶다. 조금 더 부지런했어야 하는데, 조금만 더 힘들어 하면 되는데. 와 같은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부담은 이제 그만해야겠다. 정말 보약이 필요한 것은 우리 몸이 아니라 아무에게도 돌봄을 받지 못했던 우리 마음일 수도 있으니까.

보약을 먹듯이 택시를 탄다. 매 철마다 몸보신 한다며 첩첩 약을 지어 먹는 사람들처럼, 보름에 한번씩은 거금 이만원을 내고 택시를 타고 출근한다. 이젠 몸도 마음도 편하게,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보약 택시를 탄다. 내가 몇 년을 쓰러지지 않고 두 다리 꼿꼿이 달릴 수 있는 힘은 여기에 있다.

IP *.157.196.216

프로필 이미지
미옥
2010.09.20 14:02:35 *.10.44.47
추석대비 대 청소를 하느라 이리저리 종종거리다
비타민 먹는 심정으로 책상앞에 앉았는데..
뎀뵤의 보약이 기다리고 있다!!

멋진 추석이브다!!
그녀의 보약, 수혜자가 한명 더 생겼으니..
다가오는 가을엔 그녀의 보약이 한첩쯤은 더 늘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
프로필 이미지
뎀뵤
2010.09.20 20:00:12 *.169.218.126
추석이거나 말거나.
청소 할 일도 없고. 집에 안 가도 되고.
그렇다고 딱히 휴일인 것이 반가운 것도 아니고.
이게 서른살 넘은 / 아직 쏠로 / 백수의 추석 전야예요. ㅋㅋㅋ
언니보다 반쯤 행복하고 반쯤 씁쓸한. ㅎ

근데 보약 한첩 더 지어 먹을라믄
책을 몇 권을 팔아야 하는 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놔. ; ㅎ
열심히 써 볼께용! ^^ 즐건 추석~

프로필 이미지
우성
2010.09.20 16:12:28 *.30.254.21
반갑네요.
와인바에서 보고, 글에서 보고..
글이 참 좋네요.
절로 미소가 나옵니다.  emoticon
프로필 이미지
뎀뵤
2010.09.20 20:04:27 *.169.218.126
히히. 감사합니다. ^^
와인바에서 보면서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남자가 멋있구나... 또 생각 했습니다. ^^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술집에서. 또 글로. ^^
프로필 이미지
백산
2010.09.20 16:45:04 *.131.127.50

"참고 견디는 방법만 배익혔지, 즐기고 음미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미영! 그렇치?

과격해지거나 갈등을 하는 것은 대립하는 것들을 동시에 경험하기때문이야... ^^ㅎㅎ
그 균형을 한 달에 두 번으로 결정을 내렸으니
적대적인 감정이 호혜적인 관심으로 ...

프로필 이미지
뎀뵤
2010.09.20 20:06:28 *.169.218.126
과격해지거나 갈등을 하는 것은 대립하는 것들을 동시에 경험하기 때문이야.
이걸로 또 글 써야겠어요. ㅋㅋㅋ 아침잠 말고 또 다른 사례가 생각 났어요. ㅋㅋㅋ 아 놔. ;
밥도 사 주시고 글감도 쏟아내 주시고.
언넝 돈 벌어서 밥 사드려야 하는데. 맘만 바쁘네요. ㅎㅎㅎ ^^
항상 감사요~~~
프로필 이미지
뱅곤
2010.09.20 16:52:42 *.192.234.192
뎀뵤야, 역시 네 글을 읽으면 팔랑 미소가 지어진다.ㅁㅎㅎ
혼자놀기 II 버전 같은디...
근데 이거 사람마다 다른겨 아녀?
난 보약 과다 복용인데 죄책감도 별로 없고...ㅜ.ㅜ
내 처방전 좀 하나 지어봐라.ㅋㅋ
프로필 이미지
뎀뵤
2010.09.20 20:09:04 *.169.218.126
그러니께!!
에필로그에 가서는.
이건 내 처방전이고.
내꺼 보면서 네 처방전은 각자 알아서! 라고.
살짝 발빼기를 하자나요. ㅋㅋㅋㅋㅋ
오빤 특별히 댓글로 요청했응께 말인데요.
이도저도 안 들면...  매...로.. 다..스려..야...... ㅋㅋㅋㅋㅋ
프로필 이미지
범해
2010.09.21 00:04:44 *.67.223.154
뎀뵤가 나타나니 게시판이 다 화~안 해지네....
추석 자~알 보내고 송편과 산책으로 몸보신 잘하고....

보약 잡숫기에는 아직 너무 ........
.마흔 줄에 들어서실 때 가을이 오면  어찌어찌 맥을 짚히고....뱀을 고아 만든... 국물을 마셔야지....우하하하
담에 이만원어치 택시 태워줄게... 어디가 가고싶니? 뎀뵤야....
프로필 이미지
뎀뵤
2010.09.23 14:18:01 *.157.196.216
추석은 잘 보냈는데, 산책은 못 했네요. ^^; ㅎ
택시비 이만원이면 홍대든 종로든 어디든 갈 수 있고요,
할증 붙지 않으면 염창동도 가능할꺼 같아요. ㅋㅋㅋ
글고 택시비 없이도 어디든 부르면 튀어가겠습니다!
(라는 결심만 백번째 반복하는 뎀뵤.는 반성중. ㅋㅋㅋ)

국회 도서관 가고 싶어요! ^0^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212 [33] 시련(11) 자장면 한 그릇의 기억 secret [2] 2009.01.12 205
5211 [36] 시련12. 잘못 꿴 인연 secret [6] 지희 2009.01.20 209
5210 [38] 시련 14. 당신이 사랑을 고백하는 그 사람. secret 지희 2009.02.10 258
5209 [32] 시련 10. 용맹한 투사 같은 당신 secret [2] 2008.12.29 283
5208 [37] 시련. 13. 다시 만날 이름 아빠 secret [3] 2009.01.27 283
5207 [28] 시련(7)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secret [8] 지희 2008.11.17 330
5206 칼럼 #18 스프레이 락카 사건 (정승훈) [4] 정승훈 2017.09.09 1661
5205 마흔, 유혹할 수 없는 나이 [7] 모닝 2017.04.16 1663
5204 [칼럼3] 편지, 그 아련한 기억들(정승훈) [1] 오늘 후회없이 2017.04.29 1717
5203 9월 오프모임 후기_느리게 걷기 [1] 뚱냥이 2017.09.24 1746
5202 우리의 삶이 길을 걷는 여정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file 송의섭 2017.12.25 1750
5201 2. 가장 비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 2018.03.05 1779
5200 결혼도 계약이다 (이정학) file [2] 모닝 2017.12.25 1781
5199 7. 사랑스런 나의 영웅 file [8] 해피맘CEO 2018.04.23 1790
5198 11월 오프수업 후기: 돌아온 뚱냥 외 [1] 보따리아 2017.11.19 1796
5197 (보따리아 칼럼)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은? [4] 보따리아 2017.07.02 1797
5196 12월 오프수업 후기 정승훈 2018.12.17 1799
5195 일상의 아름다움 [4] 불씨 2018.09.02 1806
5194 칼럼 #27)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법 (윤정욱) [1] 윤정욱 2017.12.04 1809
5193 #10 엄마와 딸 2–출생의 비밀_이수정 [5] 알로하 2017.07.03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