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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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뿔났다.
엄마들은 왜 노동조합이 없고, 왜 파업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엄마들은 왜 자기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2008년 시청률 40%대를 육박하며, 안방극장을 휘몰아 쳤던 드라마가 있었다. 김수현 극본에 KBS 정을영 피디가 연출한 ‘엄마가 뿔났다’가 바로 그것이다. 김수현 작가 특유의 대중적 시장성과 현장감 넘치는 대사가 이번에도 역시 드라마의 별미였다. 그러나 최고 시청율 42.7%를 기록한 전 국민적 파장의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도대체 무엇이 안방마님들의 저녁식사 시간을 당기게 하고, 설거지를 서두르게 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 엄마(김한자, 62세, 김혜자분)가 바로 바로 자신이었기에 그랬다고 생각한다. TV속 드라마의 주인공 ‘김한자’가 바로 현실 속의 자신의 삶이고, 그녀의 이야기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로 여겨졌기 때문에, 한국의 엄마들은 배게를 끌어다 턱을 괴고 앉아 TV 속으로 빠져드는 마술에 걸려든 것이다.
평범하게만 보였고, 성실하게만 보였던 그녀가 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따로 원룸을 얻어 가출을 하고,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흔히 기업의 경영자들이 그러하듯, 남편과 자식들은 그 파업의 이유가 무엇인지 당황해 한다. 그들에게 그녀의 삶은 항상 당연한 것이었다. 시아버지(나충복, 82세 이순재분)와의 관계는 친정아버지 이상으로 좋았고, 한 평생을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살아 온 더 없이 좋은 남편(나일석, 62세 백일섭분)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녀는 화가 난다. 어느 날부터 그 당연한 삶이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왜냐’고 ‘나는 뭔가’라는 위험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매일 변하지 않고 반복되는 일상이 점차 짜증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여학생 시절부터의 소원은 책만 읽으면서 살고 싶다는 거였고 지금도 틈만 나면 화장실에 들어 앉아 책을 보는 타고난 버릇이 이 병의 원인이었다. 그렇지만 그녀 스스로도 그 짜증과 억울함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파업을 감행한 첫 날 아침, TV속 엄마는 아직도 자고 있다. 침대에 편하게 널부러져 있는 그녀의 손에는 읽다만 책이 들려 있었고, 옆 테이블에는 빈 와인 잔이 한 잔 놓여져 있다. 원룸 방 창문으로 이미 햇살이 가득 들어차 있고, 엄마는 아직도 자고 있는데도 아무 큰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면 안 될 줄 알았는데, 자기가 아니면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는데. 세상은 그런 그녀에게 보란듯이 조용할 뿐이다. 다만 철모르는 아들만 여전히 엄마를 찾아 투정일 뿐이고, 무지랭이 남편만이 양말을 찾다 짜증을 낼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억울했다. 그녀의 나이 벌써 예순둘이다. 이미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2008년 겨울 그녀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남편도 만 62세 46년 개띠였다. 그리고 그녀만 남겨졌다. 평생을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부부라는 관계로 맺어온 계약으로부터 해방이 된 것이다. 남편을 묻고 돌아온 그녀는 울었다. 며칠 동안을 밥도 안 먹고 술만 마시며 울었다. 40년이 다 된 낡은 결혼사진을 집어던지기도 하고, 깨진 유리에 손을 다치면서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슬퍼서 우는 것인지, 억울해서 우는 것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냥 울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일어나 가게를 나갔다. 며칠 동안 굳게 닫혀 있었던 셔터 문을 열고 들어가 볕도 잘 들지 않는 쪽방에 틀어 앉아 평상시처럼 TV를 켜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단골들에게 또는 외상값 때문에 여기저기 전화를 한다. 20년 넘게 남편과 함께 해오던 공구가게였다. 아들이 가게를 정리하자고 했다. 그녀가 고집을 피웠다. 한 달을 버티던 그녀가 안 되겠다 싶었던 모양이었다. 주변에 가게를 인수할 사람을 찾는다는 방을 내었다. 몇몇 사람이 다녀갔다. 그녀는 저녁에 집에 들어와서는 ‘날로 먹으려는 도둑놈들’이라고 세상을 향해 욕지꺼리를 해댔다. 두 달 쯤 후에 억울한 값이었지만 후련하게 물건들을 정리하고, 가게도 넘겼다. 가게는 바로 다음날 간판이 내려졌고, 이미 새벽에 물건들은 모두 실려 간 다음이었다. 더 이상 ‘남일공구’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고 또 한달 쯤 있다가 그녀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2학년까지 만을 다녔던 그녀는 구구단도 몰랐고, 덧셈 뺄셈도 서툴렀다.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말로는 변호사로 통했지만, 읽는 것 쓰는 것조차 띄엄띄엄했다. 그녀에게 평생소원은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것’이었다. 늦은 시간이 넘게 돌아오지 않던 남편을 기다리던 시절, 초등학교를 다니던 자식 삼남매를 둘러 앉혀 놓고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눈물 바람이었지만, ‘내가 책을 쓰면 몇 십 권이 될 것’이라던 그녀의 바람은 시작이 없었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벌써 2년이 되었다. 초급반을 다니던 그녀는 이제 중급반을 다녔고, 주3일 나가던 주부학교도 이제는 토요일까지 6일을 나간다. 초등학교 1학년인 손주 딸 하고 마주 앉아 ‘콩, 너는 죽었다’는 시를 외고, 까칠한 손주 놈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구구단’을 왼다. 가끔씩 영어도 한마디씩 한다. 소풍을 간다고 새 옷에 새 모자, 새 운동화를 장만하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는 육십 평생 처음으로 자기 책상을 가졌다.
그런 그녀가 뿔이 났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안방에 드러누워 ‘나갔다 오겠다’는 아들의 인사에도 심드렁 한다.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다. 며칠 전 이번 추석에 ‘제사를 지내지 말자’는 아들의 말에 단단히 뿔이 난 모양이다. ‘혼자라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이미 연휴기간 동안 며느리와 아이들은 일본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고, 같이 가시기를 권했어도 안 가시겠다고 했지만 며느리와 손주들의 여행을 허락했던 그녀였다. 성묘도 어제 미리 다녀왔다.
아들의 제안은 사실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살아있던 10년 전부터 제사는 점점 간소화 해왔고, 음식의 가지 수도 계속 줄었다. 시간도 당겨서 8시 정도에 시작해서 9시 이전에 끝냈고 늦은 저녁식사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12시까지는 고스톱을 치는 것이 새로운 전통이 되었다. 남편이 죽고, 아들은 시아버지의 제사마저도 넘기자고 했다. 결혼한 큰 손주가 있고, 멀쩡한 시동생도 있었기에 그 말이 틀렸다고 답하지는 못했지만,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손위 동서를 대신해서, 사실상 큰 며느리 노릇을 해오고 살아온 지가 벌써 30년째다. 친한 친구의 여동생에게 철없는 시동생을 늦장가 들여놓고선 원망을 듣기도 했고, 제 아버지, 제 어머니 제사에 조차 얼굴 내밀지 모르는 막내 시누이는 여전히 평생 원수다.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시아버지 똥, 오줌을 직접 받아 낸 대가로 받은 것은 남편 직장에서 준 ‘효부상’이 전부였다. 굳이 누구에게 자랑하려고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추석 명절에 감히 ‘일본을 가겠다’ 아니 ‘일본을 같이 다녀오시라’는 아들내외의 말에 혼란스럽기만 하다. 일찌감치 자리를 펴고 누웠다. 한 쪽 손에 책을 들었지만 들어오지 않고,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 지 아들은 안방 문을 빼곰히 열고 ‘나 갔다 오겠다’는 말을 건넨다.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이놈의 명절은 왜 있는 것인지...
이놈의 가족이 콩가루가 되려는 것인지... 뿔뿔이 흩어져 명절을 쇠다니...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