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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3일 03시 39분 등록

수돗물 불소화 논쟁을 지켜보면서

2009년 5월 어느 토요일이었다. 강소영 차장의 병세가 궁금하기도 하고, 보고 싶기도 해서 운주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녀의 남동생인 태욱은 신학대학원 준비를 하는 신학생이었다. 전주로 나오는 길에 우리는 동행을 하였다. 태욱이 먼저 말을 건넸다.

“누나한테 자주 들었습니다. <전주의제21>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요.”
“그래요?”
“NGO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참 좋은 분들이신거 같아요.”
“그럴까요?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맞는데, 좋은 분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예? 왜요?”
“신학대학원을 준비한다고 했지요? 목회활동을 한다고 해서 다 좋은 분들만 계시던가요?”
“………”

태욱이 긴 침묵에 빠져들었다. 전주까지 동행을 하기로 하고부터, 뭔가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는데, 막상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쯤이야 이미 알고 있을 터였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쯤이야 도리어 내가 배워야 할 사람이 것이고, 그렇다고 ‘거버넌스’네 ‘나눔장터’ 같은 이야기들도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하긴 무슨 이야기를 한들 결국은 사람사는 이야기일 것이고, 따지고 보면 그냥 아무 얘기나 했어도 될 일이었다.

2003년인가, 2004년의 일이다. 뭐 시기가 특별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수돗물 불소화’에 대한 논쟁은 아직까지도 해결을 보고 있지 못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창환 교수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당시 교수님은 전주의제21의 정책위원장을 맡고 계셨고, 나는 시민행동21의 환경팀장이면서, 전주의제21의 추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용담댐 사업과 관련된 일로 인연을 맺고부터 친해진 덕분에 선생님은 종종 몇 가지 일들을 대해 의견을 구하시곤 했었다. 이번 주제는 ‘수돗물 불소화 논쟁’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었다. 전주의제21이 나서서 이 문제해결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 중이라고 하셨다.

바로 며칠 전에 <시민행동21>의 운영위원회에서도 뜨겁게 토론이 있었던 주제였다. 논쟁의 당사자인 <건치, 건강 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의 입장과 소위 <생태주의>적 입장을 가진 녹색평론 그룹과의 의견이 맞서 있었다.

건치의 입장은 생활수준이 점차 높아지면서, 흔히 선진국병으로 알려진 치아우식증(충치)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충치로 인한 고통과 막대한 치료비용에 따르는 국민적 부담 등을 고려하여 효과적인 예방책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흔히 먹는 수돗물에 불소를 일정량 투입하게 되면 충분히 예방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건치는 자신의 주장의 설득력을 얻기 위해 여러 선진국들의 자료들을 제시하였고, 1982년부터 불소화사업이 진행된 바 있는 청주시와 비불소화사업 지역인 성남시의 어린이를 대상으로 조사를 추진한 결과를 발표하였다. (송연희와 문혁수, 1998). 조사방법은 1991년에 6세인 아동을 청주와 성남시에서 각각 464명과 457명을 선정하여 조사한 후 1996년까지 추적검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예방율은 나이에 따라 68.6%-38.5%의 범위를 나타내었고, 나이가 어릴수록 높아서 6세 아동의 경우 68.6% 가장 예방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치의 입장대로라고 하면, ‘수돗물 불소화 추진’을 반대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수돗물 불소화 추진을 반대하는 그룹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이들은 최근 우리 사회가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회적 영향력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시민사회 및 환경단체들이었고, 주로는 생태주의에 매우 진보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녹색평론>을 통해, 김종철 교수의 주장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주로 <녹색평론>에 소개된 ‘수돗물 불소화 추진 반대’ 이유들은 대략 이러하다. 첫째로 충치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불소가 독약이라는 것이다. 불소는 불과 40년 전만해도 살충제나 쥐약 따위를 만드는데 쓰이는 ‘위장 장애 독극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소량이라고 하지만 장기적으로 인체에 누적이 되면 어떤 위험을 초래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둘째로 추진방식에서 실제 수혜자(또는 피해자)가 되는 일반 주민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추진한다는 것이 개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셋째로 통상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의-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얽혀 새로운 의약시장을 확대하려는 음모론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불소가 충치예방에 효과가 있다는 건치의 주장을 반박하는 또 다른 외국인 전문가들의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였고, 심지어는 수돗물 불소화를 추진한 지역에서 유아사망율이 증가했다는 보고서도 제출하였다.

실로 난감했다. 양측의 입장을 각각 들어보면 타당성이 적지 않았고, 서로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예산 그리고 노력을 들였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우리 사회의 진보를 위해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전문가들의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점과 함께 <국민보건>과 <개인의 자유 침해>라는 새로운 가치 또한 과거와는 다르게 중요한 문제였다.

99년 8월 양측의 동의를 얻어 서울대학교 김정욱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소위 <수돗물불소화논쟁검토위원회>가 각 분야 교수들로 구성되어 이를 검토하기도 했지만, 아무런 현실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갈등 해결을 위한 사회적 과제만을 제시하고 말았다.

이 문제는 아직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정치권의 입장은 보류상태이고, 전문가들 역시 서로의 입장이 나누어져 있다. 일부에서는 국민투표나 주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답답하기는 국민들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주장을 믿어야 할지, 전문가들도 합의를 도출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하여 일반인들에게 판단을 맡겨버리는 것이 또한 옳은 것인지에 대한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쌈구경만한 좋은 구경거리가 없다. 이 문제는 아직도 심심치않게 다루어지는 언론의 단골 메뉴 중의 하나다. 역시 결론은 없다. 매번 꼭 같이 양측의 주장이 소개되고, 성숙한 사회적 합의가 아쉽다는 식의 결론이다.

오교수님이 나의 의견을 물으셨다. 그냥 웃었다. 오히려 ‘선생님의 의견은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선생님도 따라 웃으셨다. 머리만 쥐어 뜯으시면서.

문제는 오히려 간단했다. 이 문제는 판단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이 옳고 그름을 가지고는 더 이상 판단할 수 없었다. 인류의 경험 속에서 가진 오류도 사실이었고, 과학자들의 연구조사 또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활동가의 미래에 초래할 위험에 대한 우려도 충분히 공감되는 부분이었다.

이 문제는 선택의 문제였다.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의 선택, 서로의 충분한 토론을 통해 주장들을 따져보고 어떤 가치가 더 급하고, 더 중요한 문제인지를 선택해야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나에게는 누구의 입장에 손을 들어주는 나의 의견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정작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심 있게 본 것은 그리고 <전주의제21> 입장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갈등’을 풀어가는 사회적 과정이다.

우선 갈등을 빚고 있는 양측의 상대방에 대한 태도의 문제이다. 그들의 주장은 논리적이었다. 나름의 방대한 자료와 전문가들의 조사연구결과들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를 신뢰하지 못했다. 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은 모두 소위 사회적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들이었고, 약자들의 편에 서고자 하는 정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그들의 경력이 그것들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일반적인 사회적 의제와 달리 ‘수돗물 불소화 논쟁’에 더욱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들 모두가 진보를 자임하는 사람들이고, 때문에 일반의 경우보다 한 차원 성숙된 토론문화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들의 모습은 ‘기대 이하’다. 자신의 경력과 도덕적 기준이 존중되기를 기대하면서도, 서로 상대방의 주장 뒤에는 거대한 음모가 있다고 의심하였다. 심지어는 관련된 개인의 사생활까지가 거론되기도 했다.

둘째로 이 논의를 지켜보는 사회적 태도이다.
정치인들은 판단을 보류했다. 현실적인 판단은 추진하느냐, 마느냐로 결론지어야 하는데, 누구의 편을 들어도 정치적으로는 손해가 되었다. 어느 쪽도 결과를 수긍하지 않을 것이고 이런 상황에서는 이런저런 이유를 핑계로 입장을 유보하거나 시간을 끄는 것이 이익일 것이다. 굳이 나서서 손해를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회적 여론 조성을 한다는 언론에게도 입장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구독율도 고려해야 하고, 치과의사들은 결코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사람들이고, 시민사회단체들과 불편해져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들 역시 ‘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불매운동이나 보수언론 소리를 들어가면서 이미지에 먹칠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냥 지금처럼 논란이 있을 때마다 각자의 입장정도를 소개해주면 서운하다는 소리 듣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어느 한 쪽의 주장의 편에 서게 된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운이 좋게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입장을 정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가 없다면, 굳이 전문분야 밖의 일까지 필요 이상의 오지랖을 넓혀갈 필요가 없다. 곤혹스러운 인간관계들도 꽤 괜찮은 변명의 사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될 일’이었다. 전주의제21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사실은 너무 뜨거운 의제였고,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이 주제를 핸들링 할 수 있는 정도의 사회적 권위와 신뢰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더구나 이 의제의 성격상 지역차원에서 조정할 여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답답하지만 별도리가 없다. 여전히 싸움은 계속되고 있지만 그저 좀 더 성숙된 미래의 일로 미뤄둘 수 밖에는.

사회가 변하면서 ‘사회적 가치’들도 변하게 마련이다. 같은 민주주의적 발전 가치도 시간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다르게 선택될 수 있다. 과거에는 참 명료하고 단순했다. ‘좋고, 나쁨’의 기준도 분명했고, 판단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다만 좋은 편에 설 용기가 필요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점점 더 갈등의 양상은 복잡해지고 있다. 여러 가지의 가치들이 복잡하게 얽히기도 하고, 각각의 가치들이 모두 옳지만 우선 순위를 따져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새로운 잣대가 필요한 세상이고, 헌 잣대를 버리고 새 잣대를 찾을 새로운 용기도 필요하다. 그런데 계속해서 ‘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이제 용기만으로도 안 되는 세상이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속에서도 인내심을 잃지 않고, 해결의 끈을 찾아낼 인내심과 지혜가 요구되는 때다. 묵묵하게 앞만 보고 밀고 는 우직함과 착한 것이 해답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말도 잘해야 하고, 똑똑하기도 해야 하고, 치고 빠질 줄도 아는 영악함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진보’란 무엇인가. 사회가 ‘한 발짝 발전하고, 성숙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과거 우리 사회 민주주의 과제는 ‘약자의 권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들이 다소 불합리한 억지 주장을 하더라도 힘없는 약자를 대변하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다. 여전히 그러한가. 또한 과거의 약자가 여전히 현재도 약자인가. 시청에 사무실을 두고 근무하다보면, 전혀 전주시장의 권한 밖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시청사에 대형 마이크를 대놓고 하루 종일 ‘투쟁가요’를 틀어놓는 사람들도 있다. 더러 낯익은 인연들도 있다. 그저 업보려니 생각하고 참기도 하지만 시장실로 몰려가 문짝을 발로 차는 경우나 옥상 난간에 스스로 매달리는 극단적인 상황을 볼 때는 정말로 답답해 미칠 것 같기도 하다.

갈등은 언제나 존재해왔었다. 어디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이상사회>가 아니라 더 이상 발전도 없는 <죽은 사회>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갈등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일과 갈등을 풀어가는 사람들에 의해 그것은 위기도 될 수 있고,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종종 유보적 입장을 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약자적인 기회주의적인 태도는 아닌지 늘 물어야 한다. 다른 그룹들은 모르지만 <전주의제21>은 그래야 한다. 그것이 과거의 마인드와 달리 미래지향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일이고, 우리의 자부심을 키워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려는 태욱을 쳐다본다. 우락부락한 덩치치고는 눈이 참 맑다. 아직은 때 묻지 않은 시골청년 같기도 하고, 짙은 눈썹 때문에 더 맑아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목회자로서 그가 그 눈을 통해 볼 사람들, 그 덩치로 힘써 만들어 갈 세상은 또 어떨지.

올해 초, 태욱이 간절히 바라던 신학대학원에 합격을 했다고 한다. 아주 어려운 시험이고, 들어가기 힘든 곳이라고 했다. 참 잘 된 일이었다. 어차피 나오는 길, 그저 잠시의 길벗이었던 인연이었지만, 그 별 것 아닌 수고로움에조차 연신 허리를 굽히며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하는 그 맑은 눈의 시골청년을 위해 기도를 한다. 험한 세상의 무너지지 않는 다리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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