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뎀뵤
  • 조회 수 3036
  • 댓글 수 4
  • 추천 수 0
2010년 9월 23일 14시 10분 등록

싸움 구경은 있을 때 해야 한다.

불구경, 싸움구경은 있을 때 해야 한다는 개똥 철학을 갖고 있다. 이런 말을 농반진반 얘기하면, 어른들은 “예잇!” 하면서 혼내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빙그레 웃고 만다. 그럼 나도 같이 따라 웃는다. 말이야 맞는 말이지, 나 구경하자고 일부러 불을 낼 수도 없고, 사람들 싸움 붙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니 있을 때 제대로 구경을 해야 한다.

나는 싸움 구경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자는 귀가 둔해서 한번 잠이 들고난 다음에는 천둥 번개가 치고 집이 떠나가도록 비가 와도 좀처럼 잠에서 깨지 않는다. 그런데 옆집 부부가 싸우는 소리가 나면, 언니는 내 방으로 조용히 와서 옆집 싸우는 것 같아. 라고 속삭인다. 그러면 나는 싸움에 쌍시옷자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잠옷 차림으로 현관으로 나가서 귀를 기울여 본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으면 다시 옆집과 사이에 있는 벽에 귀를 대고 싸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언니에게 싸움 상황을 생중계 한다. 어차피 그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모두 들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남자가 이래서 여자가 이랬나 봐. 와 같이 싸움의 원인과 현재 상황에 대해 내 추측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퍼즐 맞추듯이 그들의 사건을 맞춰 가는 것이 재미 있다.

한번은 5호선을 타고 여의도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하철 안에서 시비가 붙었다. 지하철이 급정거 하면서 서 있던 남자가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무릎 위에 포개져 앉았나 보다. 그냥 죄송합니다 한마디면 해결될 문제였는데, 서 있다 쓰러진 남자도 기분이 나빴는지 “에이씨” 하면서 일어 났다. 서 있던 남자는 스스로를 향한 분노였겠지만, 앉아 있던 남자는 더 불쾌해졌다. 지하철에 앉아서 출근하다가 아무 잘못 없이 욕먹은 꼴이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과하라, 못 하겠다는 싸움이 된 것이다. 와이셔츠를 곱게 차려 입고 넥타이까지 챙겨 맨 남자 둘이서 아침부터 지하철에서 각종 욕 세트를 뱉어내고 있었다. 더 가관은 그 중 한 남자가 여의나루 역에서 내렸을 때였다. 둘은 지하철 문이 열려 있는 10초 남짓의 시간 동안에도 계속 싸웠다. 내린 남자는 너 내려! 이씨! 하고, 전철 안에 있는 남자는 어디 도망가! 이씨! 하면서 서로 내리지도 타지도 않고 계속 소리만 질러댔다. 그러다가 전철문이 닫히고 싸움은 종료 되었다. 한 남자가 내리지도 않고 싸움이 종료되지 않았으면 나는 그 끝이 궁금해서 여의도에서도 내리지 못하고 전철을 계속 타고 갔을지도 모른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었고, 배울만큼 배운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감정에 휩싸여 분노 할 때 보면 유치하기가 열살 난 꼬마 못지 않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배운 것들을 까먹는지, 흥분할 때면 논리에 맞지 않는 말만 골라 하는지 관찰하는 것이 재미 있다.

살아가면서 흥분한 사람을 볼 기회는 그리 흔히 주어지는 게 아니다. 게다가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로 인해 노발대발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의 상황과 상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내 스스로가 싸움의 주체가 되어 싸움중 모드 이거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야 하는 경우, 나는 이미 둘 중 어느 한쪽 입장이 되기 때문에 대화를 객관적으로 들을 수 없다. 싸우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으면 우리가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얼마나 자기 입장에서 자기 생각대로만 풀어 내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싸우는 것을 보면서 흥분하는 법도 배우고, 분노하는 방식도 배우고, 대화의 기술도 배운다.

싸울 때는 내가 얻고자 하는 게 명확해야 이길 수 있다는 것, 그걸 알지 못하면 싸움에서 이기고도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싸움에는 항상 내용이 있어야지 서로의 태도만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 말싸움이 주먹다짐이나 피튀기는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목소리가 크면 오히려 언어 전달력이 떨어 진다는 것. 모두 싸움 구경에서 얻은 싸움의 지혜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잘 알면서도 상황이 닥치면 나도 모르게 감정에 말린다. 그러니 자꾸자꾸 싸움 구경을 통해 반복학습을 하고 반성하고 연습하면서 싸움의 기술을 익혀가야 하는 것이다.

길 가다가도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나 궁금해져 온몸의 세포가 귀로 집중된다. 이것이 병인지도 모르지만, 그 상황을 내 식대로 해석하고 제 3자 입장에서 보고 분석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이런 나를 보면서 친구는 남의 일에 신경 좀 끄라고 말을 하지만, 이건 남의 일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 속으로 들어가서 내 방식대로 즐기는 것일 뿐이다.

싸움은 사람들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이벤트와 같은 사건이기 때문에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서는 운이 좋아야 한다. 싸움판이 벌어지는 그 길을 그 시간에 지나가야 하고, 옆집 부부 싸움도 내가 집에 없으면 못 본다. 그런 사람들의 얘길 듣고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맞춰가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과 추리력과 논리력을 학습 할 수 있는 삶의 현장인 것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모든 사람들이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지만 오늘도 내가 살아가는 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의견충돌로 감정폭발로 싸움을 하고 있다. 옆집에서 고함소리가 들려 오는가? 하던 일 잠시 멈추고 귀 기울여 보자. 그에게 무슨 억울한 사연이 있는지 그의 고함소리들을 맞춰 보자. 어차피 정답은 없다. 그 사연의 정답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반복해서 소리지르는 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내 식대로 듣는 거고, 내 상상력에 기대어 스토리를 만드는 것이다. 생각보다 재미있다.

이제 싸움 말리는 기술만 배우면 나는 완벽해 진다. 킥킥

IP *.169.218.126

프로필 이미지
진철
2010.09.23 17:51:43 *.105.115.207
쌈말리는 나만의 필살기 하나.
내비려둔다. 그러면 대부분이 제 풀에 제가 죽는다. 이것보다 확실한 제초제가 없다.
그동안 흥미진진한 무료관전을 할 수 있다. 이런 거는 TV에도 안나온다.
쌈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특히 어설프게 누가 옆에 끼어서.. 쌈의 재미가 반감되는 경우들이나,
백산선배같은 권위있는 분의 개입으로 너무 싱겁게 끝나버려 실망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만 안 죽으면, 전쟁같이 재미있는 것이 없다고 누가 그랬드라???? &(&&^*&()*^%%$$&
프로필 이미지
뎀뵤
2010.09.28 12:17:02 *.157.196.216
아놔. ㅋㅋㅋ 전쟁같이 재밌는 쌈구경. ㅎ
원고 수정할때 저 표현 넣어야겠어요. 완전 웃겨요. ㅋㅋㅋ

그러니께. 나처럼 그저 멀찍이서 구경만 하고 있는게
쌈말리는데는 확실한 방법이라 이거죵? ㅋㅋㅋ
쌈구경에는 오빠가 나보다 일가견 있는듯. ㅎㅎㅎㅎㅎ
프로필 이미지
2010.09.27 12:12:18 *.230.26.16
ㅍㅎㅎ, 넘 재밌다.
읽는 내내 자기 생각에 쿡쿡 웃었어.
어떤 표정으로 문에 귀를 대고 쌈구경을 들었을까 상상도 되고 말이지.
역시 통통 튀는 칼럼!
마무리까지 쥑임~
프로필 이미지
뎀뵤
2010.09.28 12:39:22 *.157.196.216
ㅎㅎㅎㅎㅎ 담에 쌈 구경 하는거 찍어서 인증샷을 올려야 할까봐요.
그 어느때보다 진지하고 집중하는 뎀뵤를 만날 수 있을 꺼예요. ㅋㅋㅋ
마음이 바빠서 글이 잘 안 나오는데.
언니가 웃어줘서 조금 힘나요. ^^ Thanks!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212 [33] 시련(11) 자장면 한 그릇의 기억 secret [2] 2009.01.12 205
5211 [36] 시련12. 잘못 꿴 인연 secret [6] 지희 2009.01.20 209
5210 [38] 시련 14. 당신이 사랑을 고백하는 그 사람. secret 지희 2009.02.10 258
5209 [32] 시련 10. 용맹한 투사 같은 당신 secret [2] 2008.12.29 283
5208 [37] 시련. 13. 다시 만날 이름 아빠 secret [3] 2009.01.27 283
5207 [28] 시련(7)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secret [8] 지희 2008.11.17 330
5206 칼럼 #18 스프레이 락카 사건 (정승훈) [4] 정승훈 2017.09.09 1661
5205 마흔, 유혹할 수 없는 나이 [7] 모닝 2017.04.16 1663
5204 [칼럼3] 편지, 그 아련한 기억들(정승훈) [1] 오늘 후회없이 2017.04.29 1717
5203 9월 오프모임 후기_느리게 걷기 [1] 뚱냥이 2017.09.24 1746
5202 우리의 삶이 길을 걷는 여정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file 송의섭 2017.12.25 1749
5201 2. 가장 비우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 2018.03.05 1779
5200 결혼도 계약이다 (이정학) file [2] 모닝 2017.12.25 1780
5199 7. 사랑스런 나의 영웅 file [8] 해피맘CEO 2018.04.23 1789
5198 11월 오프수업 후기: 돌아온 뚱냥 외 [1] 보따리아 2017.11.19 1796
5197 (보따리아 칼럼)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생각은? [4] 보따리아 2017.07.02 1797
5196 12월 오프수업 후기 정승훈 2018.12.17 1799
5195 일상의 아름다움 [4] 불씨 2018.09.02 1805
5194 칼럼 #27) 좋아하는 일로 먹고 사는 법 (윤정욱) [1] 윤정욱 2017.12.04 1809
5193 [칼럼 #14] 연극과 화해하기 (정승훈) [2] 정승훈 2017.08.05 1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