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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뎀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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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8일 12시 06분 등록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 요구르트 한 병

버스를 타면 가끔 마음 좋은 아주머니를 만나게 된다. 짐이 많은 학생에게 ‘좀 들어줄까요?’ 말하는 앞자리 아주머니, 부자를 눌렀는데도 기사님이 미처 정거장에 세우지 못하고 지나칠 때 내려야 할 사람을 대신해서 ‘아저씨 문 좀 열어주세요.’ 라며 큰 소리로 말해주는 아주머니, 붐비는 버스에 아기를 안고 있는 손님이 탔을 때 ‘여기 앉아요.’라며 큰 목소리와 몸짓을 동원해서 그 아기 엄마를 불러 자기가 앉던 자리에 앉히는 아주머니. 모두가 난감한 상황의 어떤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기분 좋은 사람들이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이런 아주머니 중 한 분을 만났다. 곱게 차려 입고 출근하는 듯 보이는 아가씨가 버스에 올라 탔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카드 요금기에 카드를 대는 순간 기계음이 크게 울렸다. 버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은 아가씨에게 몰렸고, 당황한 아가씨는 주섬주섬 지갑을 열어 지폐를 꺼냈다. ‘아저씨, 만 원짜리 밖에 없는데, 어떡하죠.’ 기사아저씨도 아가씨도 난감한 상황이다. 이때 마음 좋은 아주머니가 등장했다. ‘제가 바꿔 드릴까요?’ 하며 움직이는 버스 안에서 뒤뚱뒤뚱 걸음으로 앞문까지 걸어가서 오 천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다섯 장으로 바꿔주시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나는 ‘오지랖도 참.’ 이러면서 혼자 웃었다.

고개를 다시 창문으로 돌리는데, 아차 싶었다. 오지랖은 아무 일에나 지나치게 간섭하고 참견 한다는 뜻 아니던가. 나는 왜 그 말을 여기서 쓰고 있지? 마음 좋은 아주머니의 인심을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쓸데없이 참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정 많다 혹은 참 기분 좋은 아주머니라고 생각해야 마땅한 일을 두고 별에별 일에 신경을 다 쓴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내가 이 지경까지 됐는가? 언제부턴가 인정이나 인심 같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고 믿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난감한 사정을 헤아리고 도와주는 것은 괜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나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어떤 어려움에 무신경 해진지 오래 됐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까지 몰아서 똑똑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며 나무라기까지 했다. 반대로 내가 곤란한 상황이 됐을 때, 누군가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 조차 저 사람이 왜 나를 도우려고 하는 거지? 하며 괜한 오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다른 사람들의 사정에 신경을 끄고 살면 편하다.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가 버린다고 해서 누구도 나에게 저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뭐라 할 사람도 없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닌데 뭐. 나만 괜히 마음 쓰다가 나만 손해 보지 뭐.’ 라는 생각이 그들의 상황으로부터 아예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괜히 도와주려고 하다가 내 입장이 곤란해 지는 경우도 많이 봐 왔다. 목격자를 찾습니다 라는 애타는 현수막이 많이 붙어 있지만, 실제 제보자가 많지 않은 것도 괜히 손들고 나섰다가 번거롭게 경찰서만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하고 잘못하면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억울한 사정이야 내가 살아가는데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그냥 관심 밖에 두는 것이다.

박완서 에세이에서는 기분 좋게 나눴던 다정함이 하루의 기분을 망치게 하는 경험으로 바뀐 얘기를 하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자신의 반지를 신기해 하는 아이가 있어서 말대답을 해 주며 반지를 한번 끼워줘 보려고 했는데, 아이 엄마가 화를 내면서 ‘보자 보자 하니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 하면서 아이를 낚아채 가버렸다는 에피소드였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하며 억울해 했는데, 나나 그 아이엄마나 다를 것이 없다. 다른 사람의 호의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의 뻑뻑함은 나나 그 아기 엄마나 다를 것이 없었다. 나 또한 혼자 가는 여행에서 셀카를 찍는 나를 보며 사진 찍어 드릴까요? 라고 손을 내민 사람에게 혹시 그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도망 가 버릴까 두려워서 선뜻 내밀지 못하지 않았던가.

사람들 사이의 나눔이나 기분 좋은 선물은 점점 만나기 어려워지고 있다. 도움이나 선물 같은 것들을 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면서 받고 싶은 마음도 같이 사라졌다. 어느 게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같이 사라졌다.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작은 마음의 움직임들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채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다. 그저 각박한 세상에 묵묵히 자기 몫을 챙기면서 혼자서 모든 것을 똑똑하게 해 낼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런 세상이 좀 서글프기는 하지만,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바뀔 수 있는 세상도 아니기에 나 또한 그 무리들에 섞여 적응하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매일 아침 받는 요구르트 생각이 났다. 아침밥을 못 먹고 다니기 때문에 회사에서 요구르트를 하나씩 받았다. 아침에 출근해 보면 책상에 놓여있는 요구르트를 보면 괜히 든든해지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가끔 아침을 먹거나 언니가 갈아준 과일 주스를 마시고 출근하는 날은 요구르트를 안 먹게 되었다. 그런 날 요구르트는 하루 종일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 아직 유통기한이 훨씬 많이 남아 있지만 뜨뜨미지근해진 요구르트를 먹기가 싫었고, 내일이면 다시 신선한 요구르트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아침을 먹지 않고 다니는 사람이 많았기에 누군가에게 주면 맛있게 먹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귀찮았다. 먹고 싶다고 하지도 않은 것을 내밀었다가 싫다 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또 먹을만한 누군가를 찾는 것이 번거롭기도 했다. 괜히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 하다가 마음 상하는 일이 있을 것 같아 시도도 하지 않고 요구르트를 쓰레기통으로 밀어 넣기를 여러 번 했다.

버스에서의 번개 깨우침 이후에 세상을 향해 조금 마음을 풀어 놓기로 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나누면 맛있게 먹을 사람이 있을꺼야.’ 라는 마음을 앞세워 요구르트를 회사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회사 냉장고는 도시락을 싸고 다니는 사람들이 반찬을 놓아 두기도 하고 음료수를 놓아두기도 한다. 각자 이 반찬은 누구꺼 이 음료수는 누구꺼라는 포스트잇을 형형색색 붙여 놓는 냉장고였다. 사과 반쪽에도 자기 이름을 써 넣고 먹지 말라는 접근 경계 표시가 되어 있다. 요구르트 키높이 만한 포스트잇에 ‘아무나 드세요. 맛있게. ^^’ 라는 메시지를 써서 붙여 두었다. 수많은 반찬통과 포스트잇 사이에 내 메시지가 보일까 싶어 요구르트를 여기저기 돌려 놓아 보기도 했다.

이 냉장고를 열어보는 사람은 스물다섯명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 그 정도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도 내가 내민 손을 잡아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그렇게 된다면 아주 민망한 일일 것이다. 물론, 아무도 알지 못하겠지만 혼자 손 내밀었다가 스스로 거둬드려야 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내가 내민 손을 잡아 주리라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오후 3시쯤 요구르트가 아직 남아 있나 누가 먹어 없어졌나 살짝 냉장고 문을 열어 봤다. 없어졌다. 신기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 내 손을 잡아 준 것 같아서 반가웠다.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그렇게 냉장고에 요구르트를 놓았다. 그렇다고 내가 먹을 몫을 갖다 놓는 것은 아니고, 내가 안 먹게 되는 어떤 날 이벤트처럼 아무나 먹는 요구르트를 갖다 놓았다. 누가 먹었는지 나는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걸 먹은 사람조차도 누가 놓았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고 나 조차도 상대를 알 수 없는 마니또 게임 같은 것이다.

기분 좋은 선물이다. 잘 보이기 위한 선물도 아니고, 대상을 선택해서 특별히 대해주려고 주는 선물도 아니다. 몇 번 친구의 책상 위에 커피나 비타민 혹은 책 같은 것들을 놓아둔 적은 있다. 그보다도 이렇게 아무나를 대상으로 뭔가를 꺼내 놓는 것은 더 기특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서 받는 어떤 것이 아니라 누구든 손을 내밀면 따뜻하게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진다.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영화의 트레버처럼 좋은 것 하나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좀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할 것이라는 용기가 생겼다. 꼬마 아이가 귀여워서 사탕을 내밀면 옆에 있던 엄마는 아무나 주는 거 먹지 말라며 아이의 손을 거칠게 거둬들이는 세상이다. 어떤 사람이 손을 내밀더라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그러니 도움을 주려고 손을 내밀려고 하다가도 괜한 오해를 살까 싶어 주저하고 망설일 때도 많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고 해서 나 조차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나의 작은 노력이면 작은 세상 하나가 바뀔 수 있다. 요구르트 하나면 될 일이었다. 내가 손을 내밀면 누구든 기꺼이 잡아 줄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바꿔가면 되는 것이다. 이런 세상을 작은 냉장고 한 칸에서부터 조용히 변화 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면 빙긋 웃음이 난다. 아직 나를 믿어주는 냉장고 한 귀퉁이가 있어서 좋다.

세상은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바뀔 수도 있다. 목적 없이, 특별히 얻고 싶은 것 없이도 사람들에게 베풀기도 하고, 누군가 손을 내밀 때 기꺼이 잡아주기도 할 일이다. 일상적으로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작은 베풂의 손길로 다른 한 사람의 하루가 얼마나 행복하고 살맛 나게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은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쪽이나 맞잡는 쪽이나 기분 좋긴 마찬가지다.

세상을 내가 바꿀 수 있다는 조그만 믿음 하나를 다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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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09.29 02:09:44 *.129.207.200
문장 하나하나가 미립자 알갱이가 되어, 바닥을 통통 튀는 느낌입니다. 전체를 놓고 보면, 인천공항 같아요. 필요한 것만 있으면서, 제 기능을 다하지요. 군살이 없다고 할까요? 가볍고, 기분좋게 해야할 말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참 부러운 화법인데, 참 부러운 문장이네요. 

이 칼럼도 요구르트 인가요? 그렇지요. 괜한 짓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저는 음식장사 하면서, 그런 경우를 경험해요. 제 딴에는 손님을 위한 것인데, '됐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섭섭하지요. 뭐 많지는 않지만, 잠들때까지 꿀꿀하더라구요. 

혹은, 나는 호의를 보이는 것인데, 상대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하인 부리듯이 나오면, '사람들에게 잘 해줄 필요 없다'는 생각이 많아져요. 특히 직원들과의 관계가 그래요. 잘 해주어서도 안되고, 아예 신경 꺼도 안되지요. 보지 않되, 보고 있는

나의 야구르트는 무엇일까요? 상처 받을수도 있다는 것을 각오하고, 호의를 표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면 결국 나에게 좋고, 안하면 점점 고립되겠지요.  

 명문입니다. 변경연에서 읽은 글중 단연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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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09.30 21:25:08 *.34.224.87
좋다...
좋은데..
비슷해요..
아~주 비슷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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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0.09.30 23:10:43 *.8.230.182
미영!
재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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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10.01 07:50:27 *.10.44.47
뎀뵤의 두번째 책이 기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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