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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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넘어가기. 쾌쾌한 사랑방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던 옛날 이야기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였다. 승용차나 버스 같은 교통수단이 없던 시절에는 도보가 서민들의 유일한 이동 도구였다. 시집살이 설움에 한숨짓는 새댁에게, 막걸리 한 사발, 돼지고기 한 근과 맞바꿀 나뭇짐을 지고 장터로 출정하는 가장에게, 재를 넘는 일은 그리움을 좇아 일상과 단박에 작별하는 그 무엇이었다.
추석 이튿날 아이와 나는 부모님과 부모님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재를 넘고 있었다. 초부리 산 288-1번지. 거기에서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전날의 폭우가 무색하게 하늘은 시냇가의 꽃들 위로 고즈넉이 맨 살을 드러내었다. 재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 병우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나쥬”
아들이 낯선 경사각을 알아채고 눈을 빤히 쳐다보며 안아달란다. ‘말이 늦된 건 신체발달과 연관이 깊으니 자주 걷게 하라’는 의사의 말이 떠올라 애써 외면하고 녀석의 손을 단단히 쥐었다. 낑낑거리며 되돌아가려는 병우를 채근해 길을 올랐다. 가던 길에서 왼편으로 빠진 병우가 개울가를 내려다봤다. 엄지손가락에 다른 손가락들을 차례로 마주치다가 고개를 좌우로 두리번거린다. 녀석의 상기된 표정을 타고 개울의 물소리가 온전히 전해졌다.
차로 5분 거리를 아이와 유유자적하며 걷다 보니 30분이 흘렀다. 목덜미에 살짝 맺힌 땀이 적당한 햇살에 미풍을 받아 시원스럽게 증발했다. 엄마를 찾아가는 길은 늘 약간의 도식이 필요했다. 첫 번째 길에서 직진하다가 오른편으로 보이는 모퉁이가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어져서 10번째. 마당가의 개 짓는 소리도, 부산하게 밥상 차리는 낌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먼지 낀 빨강ㆍ노랑 장미다발 사이에 새로 꽂은 분홍ㆍ노랑 국화가 섞인 화병 두 개가 손님을 맞았다. 묘지번호 288-1. 엄마의 새로운 주소는 이승의 명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먼지 낀 장미를 걷어내고 병우가 꽃집에서 고른 노란색 프리지아를 꽂았다. 눈을 감았다. 신에게 감사하고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망자는 침묵하였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는 이어졌다. 이런 침묵이라면 나쁘지 않다. 우리가 부활하여 만나는 날에도 엄마가 나의 이야기에 일일이 답을 준비해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답은 아쉬운 놈이 찾아내기 마련이다.
바지주머니 속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마자 의식적으로 톤을 낮춘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그런데요.”
“옆에 있던 병우는 어디 갔나요. 알고 계십니까.”
흘깃 주위를 살폈다. 아이가 없다. 몸을 한 바퀴 돌려 사방을 훑었다. 아이가 사라졌다.
“당신, 당신 누구야”
“제가 누구인지는 차차 알게 될 거고, 아들을 찾는 게 우선이겠죠. 하하.”
“병우를 납치한거야? 지금”
“아들을 찾고 싶으시죠. 그럼 지금부터 제 말을 또박또박 따라 하시기 바랍니다.”
“협박하는 거야. 얼마를 원해?”
“성격이 급하시군요. 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만. 기회를 딱 한 번만 더 드리겠습니다.”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 놈의 목소리가 가증스럽다. 소름이 돋는다.
“나
“나… 나
놈의 요구사항은 세 가지였다.
첫째, 한국행동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서 지난 2년간 내가 진행한 연구결과를 오픈할 것.
둘째, 필요 시 놈이 요구하는 실험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
셋째, 모든 일이 완료될 때까지 유괴사실과 요구사항을 와이프를 포함한 타인에게 일체
알리지 말 것.
놈은 프로젝트가 끝나는 일주일 후에는 병우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로 가족의 품에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놈의 요구에 응하기는 했지만 괜한 장난전화인가 싶어 나는 묘지 주변이며 화장실이며, 나중에는 묘지 관리사무소까지 내려와 병우의 흔적을 찾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냉정하자. 냉정하자. 생각을 하자. 그는 연휴 다음날인 목요일
올림픽대로를 타고 가던 차가 한남대교 남단에 진입했을 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여보, 왜 이리 늦어. 병우는 뭐해”
딸 아이의 독감 때문에 집에 남은 와이프의 차분한 목소리 말미에서 짜증이 묻어났다.
지금 나는 말해야 한다. 사실을 말하든 픽션을 말하든 그녀를 납득시키는 게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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