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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4일 22시 24분 등록

닭 한 마리의 기적

어린 시절 동네 구멍가게에서 껌을 사면, 한 권의 작은 만화책이 들어 있곤 했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길, 껌 하나를 꺼내 씹으며, 정말 딱 껌 크기만한 만화책에 흠뻑 ‘쏙’ 빠져 걷곤 했다. 만화 속 주인공 철이는 ‘해결사’였다. 어느 날 철이는 저녁 만찬에 초대를 받았다. 그런데 집안 식구들끼리 싸움이 났다. 모처럼 닭 한 마리로 저녁만찬을 하게 되었는데, 누가 어디를 먹어야 할지를 두고 싸움이 났다.

저마다 맛있는 곳을 먹고 싶어라 했지만, 닭은 오직 한 마리뿐이었다. 아빠는 체면도 차려야 했고, 은근히 식구들이 집안의 가장으로 챙겨주기를 바랐다. 엄마는 매번 식구들만을 위해 양보해 왔지만, 이번에는 자기도 날개를 먹고 싶었다. 퍼걱대는 가슴살은 실은 자기가 좋아하는 곳이 아니었다. 딸은 늘 날개를 먹어왔다. 아빠, 엄마로부터 늘 귀염을 받아 온 자신이 이번에도 날개를 먹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사실 맛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그런 사랑을 받는 것이 더 좋았다. 더구나 예뻐진다는 데... 굳이 닭고기 때문은 아니겠지만 멋진 남자친구가 생길 나이가 되었다. 아들은 닭다리가 먹고 싶었다. 어쩌다가 먹는 닭고기의 닭다리는 매번 어른들의 차지였고, 이제는 막둥이, 꼬마라는 호칭이 싫었다. 이제는 자기도 어른대접이 받고 싶었다.

식구들끼리 오가는 이야기를 잠시 듣고 있던 철이는 중재안을 내었다. 먼저 집안의 가장이자 어른인 아빠에게 닭다리 하나가 돌아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꼬마가 아닌 중학생 아들도 닭다리를 먹게 해 주었다. 늘 양보만 해오던 엄마에게도 닭날개가 차례지어졌다. 닭 날개 하나만을 먹게 된 딸에게는 목살이 덤으로 주어졌다. 며칠 후에 있을 ‘학예발표회’에서 멋지게 노래를 해내라는 뜻이었다. 말도 못하고 내심 서운해라 하는 아빠에게 닭가슴살의 절반이 더 주어졌다. 이제 다이어트가 필요하니, 지방이 적은 가슴살을 즐겨야 된다는 것이 철이의 판단이었다. 엄마가 적극 지지를 하고 나섰고, 뱃살을 줄이자는 명분 앞에 아빠는 더 이상 서운하지 않다. 실은 출근하는 아침마다 늘어가는 뱃살 때문에 고민이면서도, 늘 뭔가를 미뤄왔던 까닭이다. 나머지 가슴살은 남겨두었다가 내일 아침 ‘닭죽’을 끓이는데 쓰기로 했고, 몸통은...

몸통은 초대받은 손님인 철이가 먹겠다고 했다. 다들 대찬성이다. 만족스러운 분배였지만, 그들은 자기에게 나누어진 것만을 먹지 않았다. 아빠는 닭다리 한쪽의 또 절반을 아들을 위해 떼어 주었고, 아들은 그런 아빠가 고마워서 사양했지만 받아먹었다. 아들은 보름 뒤에 있을 아빠의 생신에 무엇이 좋을지 생각하다가 문득 아빠의 ‘허리띠’가 낡았음을 기억해낸다. 딸은 엄마가 닭날개를 그렇게 먹고 싶어라 하는 줄을 몰랐었다. 생각해보니, 엄마도 여자였다. 늘 당신의 화장품을 훔쳐 써오는 줄 알면서도 한 마디 말도 없었던 엄마였다. 그러고 보니 엄마의 눈가에 주름이 늘었다. 언제부터였는지조차 몰랐지만 힐긋해진 엄마의 머리카락도 보인다. 닭날개 한 쪽을 마저 엄마에게 드리고 싶었지만, 엄마는 이미 한 쪽만으로도 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저녁 설거지를 엄마대신 자기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빠가 작년에 담궈 놓은 술을 꺼내오라고 한 것은 그 때였다. 그는 초대받은 손님 그리고 오늘 이 만찬에 자리에 함께해서 닭한마리로 가족을 생각하게 해 준 철이에게 한 잔을 먼저 따라 주었다. 그리고 항상 자신과 가족을 위해 애쓰는 아내에게도 잔을 권했다. 그리고 잔 하나를 마저들고서는 턱 밑에 수염이 막 나기 시작하는 아들을 잠시 쳐다봤다. 결심한 듯 반잔을 따라주며,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지?’라는 말을 잔과 함께 건낸다. 아들이 화들짝 놀란다. 아빠의 권유가 낯설기도 했지만, 이미 친구들과 몰래 훔쳐 먹어 본 걸 들킨 것 같아 얼굴부터 붉어진다. 철이가 어서 받으라고 눈짓을 한다. 식구들 모두의 건강을 비는 즐거운 건배를 하고, 그들 모두는 웃음을 섞어 마신다. 그들은 한 가족이다.

닭 한 마리를 다 해치우고도, 닭 한 마리가 또 남았다.
기름덩어리 닭 꽁지가 접시 한 가운데 혼자 남았다.
“저걸 먹어야 닭 한 마리를 다 먹는거야”

늘 해오던 것처럼 엄마가 손을 뻗는다. 아들이 자기가 먹겠다고 달라고 했다. 자기가 이 집의 막둥이니까, 맨 마지막에 남는 것을 먹는 것은 자기의 권리라고 우긴다. 딸이 달라진 동생의 태도에 어리둥절해진다. 아빠가 헛기침을 몇 번해보지만, 닭꽁지는 아직 식탁위에서 갈 길을 못 찾고 있다.
“어라? 가장의 권위가 안 선다. 그깟 닭 한 마리가 뭐라고.”

그들은 또 다투기 시작한다. 닭 한 마리를 이미 배불리 먹어놓고서는, 또 한 마리를 앞에 두고 긴장이 돈다. 이번에는 철이도 어쩔 수 없다.


* 늘 사람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 힘들고 벅찬 일이었지만, 나는 ‘닭 한마리의 기적’을 믿었다. 뭔가 분명히 방법이 있을거라고 믿었다. 다만 내가 아직 찾아내지 못할 뿐이라고 믿었다. 기적은 언제나 있었다. 사람들의 눈 속에, 마음 속에 분명히 있었다. 그것만 찾아내면 갈등은 기대하지도 못했던 기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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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11:51:17 *.93.45.60
더 바디샵의... 아니타 로딕은 마지막 남은 사탕을 누구에게 줄지를 결정할 수 있다면 경영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갈등의 현장? 거긴 바로 삶의 현장입니다. 경영이 최선을 향해, 최적을 향해 뭔가를 선택하고 노력하는 일이라면... 거기선 늘 기적이 만들어 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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