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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7일 11시 56분 등록

칼럼. 오늘 할 일을 내일, 1달 뒤로 미루는 준범이

" 변명이란 곧 자기합리화다. 선택을 연기하고 할 일을 미룬 것에 대해 그럴듯한 구실이나 논리적 이유를 대는 것이다. 즉 게으름은 '선택적 회피'라는 사실과 '지금 회피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변명으로 이루어져 있는 셈이다." - 『굿바이 게으름』, 문요한

준범이는 1학기 우리반 서기였다. 1학기 때 서기할 사람을 보는데 제일 먼저 유일하게 자원했다. 서기의 할 일을 말해주며 여러 차례 정말 하고 싶은지를 물었는데 얼마나 단호하게 잘 하겠다고 하고 싶다고 말하는지 당연히 잘 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결과는 2학기 때는 못 맡기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서기는 매일 수업 시간마다 선생님의 사인을 받아야 하는데 당일에 제대로 받아놓은 적이 하루도 없다. 그래도 다행인건 학급함에 있는 유인물들은 꼬박꼬박 내 책상에 가져다 놓는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그냥 믿고 1학기가 지났다. 하지만 2학기에 들어서자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서기는 그날 수업이 바뀐 것이 있으면 교무실 칠판에서 매일 확인하고 반 아이들에게 가르쳐주는 역할도 한다. 그런데 준범이가 교환된 내용을 잘못 가르쳐주어 몇 번 낭패를 본 아이들이 서기가 제대로 역할을 못한다고 불평이 속출을 했다. 게다가 나도 준범이 때문에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1달에 1번 출석부검사를 해서 제출해야하는데 번번히 제날짜에 제출할 수가 없는 것이다.

준범이는 그날 받은 사인을 미루는 덕분에 1달치의 3분의 2정도를 하루나 이틀에 몰아서 한다.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양 땀을 뻘뻘 흘리면서 피곤이 역력하게 다니는 모습이 계속 못마땅했다.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자신이 자원해서 하는 데다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청소도 열외였다. 그런데 3월부터 9월이 되어서도 그날 해야 할 일을 그날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2학기가 되자 우리반 성실맨 제우가 찾아와서 2학기 때 서기를 자신이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존에 하고 있는 준범이가 있으니까 준범이가 안 한다고 하면 시켜주겠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준범이가 1학기 때 계속된 나의 잔소리가 듣기 싫을 것이고 서기가 매일 신경써야하는 일이 귀찮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만두겠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내 예상은 빗나가고 준범이는 자신이 계속하고 싶고 잘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렇게 열심히 하겠다는 준범이를 외면할 수 없어 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래서 출석부검사하는 날의 2주전부터 매일 준범이에게 밀린 2주치랑 당일 사인 받을 것을 미루지 말고 그날 받아놓으라고 당부를 했다. 매일 조회시간, 종례시간 마다 준범이에게 각인시켜주었다. 내 말을 들을 때 마다 준범이는 “알아요 잘 할께요, 선생님”을 연발했다. 1주가 지나고 출석부를 봤는데 그녀석의 습관이 여전하다. 또 다시 매일 조회와 종례시간에 오늘 해야 하는 출석부 정리를 다 마치고 집에 가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성실하지 못하면 서기를 하고 싶어 하는 제우에게 기회를 주어야할 지도 모른다고 이야기를 해두었다. 그런데 그뒤로 1주일 내내 나의 당부가 무색하게 준범이는 매일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고 그냥 집에 갔고 출석부는 군데군데 엉성하게 구멍이 나 있었다.

으아~ 이 녀석 그냥 확 하지 말라고 할까 하는데, 불현 듯 이 녀석 나랑 같은 스타일인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동병상련으로 준범이가 불쌍했다. 잘하겠다는 말이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습관이 그렇게 들어버린 준범이는 그냥 그렇게 미루기를 반복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냥 그만두라고 하기에는 미안해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차원으로 서기할 사람을 공개모집했다. 1달전부터 하고 싶어하던 제우가 제일 먼저 와서 열심히 하겠다며 신청을 했다. 그 뒤로 3일동안 공개모집을 하면서 준범이를 기다렸다. 끝까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잘하고 하고 싶다더니 이상하다. 하지만 공개모집 기간이 끝났고 제우가 정말 하고 싶다고 몇 차례나 이야기 했던 터라 제우에게 서기를 맡겼다.

며칠이 지나 준범이를 불러 물었다. 왜 공개모집 할 때 지원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대답을 하지 않는다. 준범이에게 1학기 때 서기를 하면서 느낀 점과 2학기에 들어와서 왜 서기활동을 제대로 못했는지를 적도록 했다. 준범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1학기 때 서기하면서 느낀 점은 ‘좋았다’한마디로, 2학기에 왜 서기활동을 제대로 못 했는지는 ‘처음에는 제대로 했는데요. 제대로 가지고 다녔고요. 근데 선생님 사인 못 받은 것도 처음엔 채우려고 했는데요. 근데 시간표가 좀 많이 바뀐 날이 있었는데요. 그때 갑자기 다시 시간표가 그 시간대로 되었는데 애들이 계속 욕을 했어요. 그거 때문에 막 하기도 싫어졌어요.’라고 썼다. 결국 자신이 서기활동을 못한 것은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는 잘 하려고 했는데 아이들이 못한다고 욕을 하는 것이 듣기 싫어서 서기를 안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준범이는 자신에게 미루는 습관이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자기에게 일을 못한다고 하는 아이들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준범이에게 어떤 처방전이 필요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나에게도 있는‘미루기’의 DNA를 갖고 있는 이 녀석에게 새로운‘마무리’의 DNA를 심어 주어야 한다. 오늘 할 일은 오늘 끝내는 미루지 않는 습관을 들일 수 있는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작은 승리의 맛을 보게 해야 할 것이다.

IP *.68.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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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22:25:13 *.34.224.87
ㅎㅎㅎ...연주야..
준범이에게, 동병상련을 느꼈구나.
일요일이면, 컬럼과 리뷰를 올리는 너의 마무리 DNA 를
확실하게, 전달해주렴....골 맛을 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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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10.18 09:46:51 *.42.252.67
처방전은 이미 내려졌고 약은 연주 샘이다.
본인의 경험이 녹아있는 조언은 듣는 사람에게
공감과  감동으로 다가와 새로운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될 것이야.
준범이가 자기를 위한 훈계로 선생님이 뻥을 치는거라 생각하는 것 같으면
연락해라.
북리뷰 복사를 해서 시간에 현광펜을 그어 보여줄께.
beforer 연주 샘, after 연주 샘. ㅎㅎㅎ
준범아 걱정마라. 너희 선생님도 그랬지만,늘 일등을 하는  선생님으로
바뀌었다. 희망을 버리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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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0.18 17:05:35 *.236.3.241
준범이 스스로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안을
세우도록 하는 건 어떨까. 남이 제시하는 것보다는
스스로 고민해서 도출한 방법에 책임감을 느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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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10.20 01:46:25 *.129.207.200
안타깝군. 이 아이는 학과 공부 보다는 치료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이 이런 경우는 보통 가정에서 제대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해서가 아닐까? 

나도, 초등학교때 숙제를 매번 전화로 친구에게 물어봤어. 매일 같이 물어보다가, 친구 어머니에게 따끔하게 혼났지. 당시 우리집이 어려워서 부모님이 나를 보살펴주지 못했거든. 그런 결핍을 엉뚱한 쪽으로 채우려고 했었지. 

성인이 되기 전에  형성되는 성격, 습관은 참 중요한데, 준범이는 눈에 띄게 비정상적이다.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성인이 된다면, 이런 아이는 사회에서 낙오될 것이야. 신용도 없고, 핑계만 일삼는 사람을 쓰는 회사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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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1 14:18:49 *.93.45.60
연주샘 힘내요.
연주심과 준범이가 같이 1개의 노트를 써보는 건 어때요? 1주일에 한번씩 만나서 채워넣기를 하구요. 피터드러커 자서전에 자매선생님... 중에 한분이 그러셨던 것 같은데...하하하.
내년엔 준범이도 서기를 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힘내세요 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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