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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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30-“믿음과 의심, 그 양날의 칼”
당신은 ‘시크릿’을 믿는가?
몇 년전, 성공을 이루기 위한 우주의 비밀을 알려준다는 론다 번의 ‘시크릿(the secret)’에 전 세계가 열광한 적이 있다. 그 ‘시크릿’은 무언가를 그냥 원하기만 하고 절대 의심하지 않으면 원하던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아주 단순한 개념이었고, 이 단순한 것이 변하지 않는 물리법칙과 같은 성공의 법칙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그녀는 많은 사례를 보여주며 시크릿의 법칙이 이미 동서고금에서 숱하게 이루어졌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럴듯한 전개였다. 그리하여 론다 번의 책은 꿈을 이루고자 하는 많은 사람과, 부유함을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신도 쉽게 꿈과 부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결과 시크릿은 나약한 정신력을 지닌 독자에게 아편 같은 역할을 해내었고 호주의 프로듀서 출신이었던 그녀의 기획된 DVD와 책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시크릿을 통해 론다 번과 DVD 기획자들은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겠지만, 그녀의 시크릿을 믿었던 숱한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전부 부를 이루었을까? 그때 시크릿을 신앙처럼 믿었던 사람들은 지금 과연 자신의 꿈을 이루었거나, 꿈을 이루는 길에 들어서 있을까?
미국의 한 목사가 있다. 부친의 교회를 급성장 시킨 차세대 기독교 리더로 부상한 조엘 오스틴 목사이다. 영화배우 같이 아름다운 사모와 함께 휴스턴 로케츠 프로 야구팀 구장에서 수만명이 모인 가운데, 엄청난 열광 속에 매주일 집회를 진행해가는 젊은 목사이다. 그리고 수백만부가 팔려나간 그의 책 ‘긍정의 힘’은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조차도 한번쯤 보고 싶게 만드는, 신앙서적이라기 보다는 자기계발서 같은 책이다. 이 ‘긍정의 힘’이라는 그의 첫 책은 출판사의 상업성 전략에 따른 기획에서 였는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에 따른 성령의 인도에 의한 집필이었는지는 모르나, 비슷한 후속작을 여러 종 만들어내었고, 알맹이 없는 그의 후작들은 책값이 아깝다고 느낄 정도로 허접했다. 세 시간정도면 다 읽을 수 있을 만화같은 자기 계발서에 하나님만 차용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강한 영감을 주는 듯한 오스틴의 긍정주의 설교에 매주 미국 기독교인들은 더욱 더 빠져들고 있고, 그의 ‘긍정의 힘’시리즈는 지금도 전 세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인세를 지불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나는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도 오스틴에 열광하던 그들은 정말 행복해졌을까? 오스틴의 ‘긍정의 힘’을 믿었던 사람들은 정말 작은 ‘힘’이라도 얻었을까?
‘시크릿과 긍정의 힘’ 이 두 원칙에 왜 많은 사람들이 빠져들고 있을까? 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개념에 빠져들 수 밖에 없었을까? 어려운 시대, 불확실한 미래를 불안 속에서 바라보며 우리는 신앙만큼 우리를 이끌어 줄 단순하고 쉬운 정신의 화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리라.
론다 번의 ‘시크릿’은 간절히 원하고 의심만 하지 않는다면 우주가 꿈을 이루어 준다는 법칙이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믿는대로 된다’는 ‘긍정의 힘’ 역시 하나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 줄 것이니 기도하고 믿기만 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둘은 동일한 원칙을 가지고 있다. 그냥 믿으라는 것이다.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행위’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믿음에 대한 언급’만 있고 ‘행위에 대한 강조’가 없는 것이 이 둘의 특징이다. 왜 행위에 대한 강조를 제외시켰을까? 책임이나 행동에 대한 자신의 노력이 강조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흥미를 잃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믿음을 강조한 히브리서에는 은혜를 받았다는 성도가 많지만, 행위가 중요하다는 야고보서는 은혜가 안된다고 말하는 기독교인이 많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행위를 말하지 말고 믿음만 강조하라! 그리하면 사람들이 너희에 열광하며 따라 오리라. 그 원리를 론다 번과 조엘 오스틴 목사는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물론 불교를 믿는 불자들 역시 ‘원을 쌓으면 이루어진다’고 동일한 원칙을 말하고 있으며, 또 다른 종교들도 결국은 ‘기복’을 제일의 원칙으로 하고 있다. 자신들은 절대 현실에서 복을 구하지 않는다는 일부 종교도 알고 보면 ‘천국에서의 상급’이라는 말로 죽음 이후의 행복을 추구하거나, 윤회의 업에서 벗어나 해탈한다는 ‘내세의 행복’을 꿈꾸고 있으니 결국은 ‘기복’이라는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왜 우리는 이렇게 복을 원할 수 밖에 없는가? 그리고 그 복이 ‘시크릿’이나 ‘긍정의 힘’, 불교의 ‘원’으로 이루어 질수 있는가? 야고보서의 ‘행위’ 없이 히브리서의 ‘믿음’만으로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시크릿을 믿고 투자했다가 원금전체를 날린 주식투자자 같은 부류의 실패한 회의주의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어준다고 철썩같이 믿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한 초라한 행색의, 서리집사에게 조차 무시당하는, 억지웃음의 장로, 믿기 전보다 현실이 더 팍팍해진 광신도들의 냉랭해진 믿음, 아들의 대학 입시를 위해 절에서 수 천배를 하였으나 결국 관절염만 심해졌고, 연이은 입시에 실패한 군 입대를 앞둔 아들을 둔 병든 어머니.........우리 주변엔 이런 패잔병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이런 패잔병 중 한사람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열정이 있었으나 그 열정을 쏟을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무빙 타켓에 겨냥해 보았자 명중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백전백패 할 수 밖에 없는 만년 패자였었었다. 넘치는 열정을 조엘 오스틴의 믿음에 쏟았다간 광신도가 되었을 것이고, 시크릿에 부었다간 정신과 진료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적절한 ‘현실 검열’이 필요했으나 그들은 그것을 ‘믿음 부족’ 혹은 ‘의심’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성공하지 못하는 원인과 현세가 천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로 그 ‘의심’을 들고 있었다. 딜레마였다.
어떻게 하면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우리는 현실을 천국으로 만들 수 있을까? 믿음을 가지되 정신과 진료를 필요로 하지 않고, 열정을 품으나 거품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한가? ‘시크릿’과 ‘긍정의 힘’이 주는 믿음이 우리의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선 그것들만으로는 부족했다. 무언가가 반드시 추가되어야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했다. 순간순간 많은 패배를 하였으나 최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우리의 남은 날들을 승리로 바꾸기 위해선 새로운 어떤 전략이 필요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정교하게 계획된 어떠한 전략을 따를 때에 우리가 서바이블 할 수 있는가? 그 전략이 무엇인가? 이것이 오랜 나의 질문이었다.
서바이블 방법에 대해 알기 위해 전쟁터를 생각해보자. 전쟁터에서 포로가 되어 주변의 많은 포로가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지만 일부는 극적으로 살아나온 사례들이 몇 있다. 빅터 프랭클이 한 예이고, 짐 스톡데일이 두 번째 예이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삶을 승리로 바꿀 서바이블의 전략을 배울 수 있다. 시크릿과 긍정의 힘이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는 지점을 우리는 거기서 볼 수 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최고위 장교였던 짐 스톡데일(Jim Stockdale)은 ‘하노이 힐턴’ 전쟁포로 수용소에 8년간 수용되었다가 종전 후 석방되어 조종사 기장과 의회 명예훈장 등을 받아 최초의 3성 장군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그가 전쟁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실화들에 근거해서 만들어낸 ‘스톡데일 파라독스’는 오늘날 우리에게 패러다임 시프트를 요구하는 새로운 원칙을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Good에서 Great로 진화한 기업들을 조사한 짐 콜린스(Jim Collins)는 Great로 진화한 기업들에서 하나의 법칙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그는 ‘스톡데일 파라독스’이라고 부르고 있다. 짐 콜린스는 위대한 회사로 진화한 기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냉혹한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최종 승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냉혹한 현실을 이겨내고 위대한Great 회사로 우뚝 서고야 말리라는 맹세를 그들은 지켰다. 우리는 이 이중성을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고 부르기로 했다.”
‘냉혹한 현실직시’와 ‘굳은 믿음’, 이 이중적인 개념을 둘 다 동시에 지니고 있었던 기업만이 Good에서 Great로 진화했다 것이 스톡데일 패러독스인데 스톡데일의 패러독스가 나온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전쟁 후 어떤 인터뷰에서 ‘수용소를 견뎌내지 못한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냐는 기자의 물음에 스톡데일은 ‘그들은 낙관주의자였다’라고 답한 것에서 스톡데일 패러독스가 유래했다. 그것은 바로 ‘시크릿과 긍정의 힘’만으로 우리가 절대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성공하지도 못하는 비밀을 알려주는 축약된 지혜의 말이었다. 스톡데일의 파라독스는 포로수용소라는 제한된 공간과 수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서 실제로 삶과 죽음으로 갈리어 간 많은 사례를 통해 내린 하나의 원칙이므로, 우리에게 강한 충격과 깊은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그가 수용소에서 서바이블할 수 있는 강력한 전략 하나를 만들어 나와 우리에게 꼭 배우라고 강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나는 강하게 받았다.
스톡데일은 말했다. “수용소에서 견뎌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낙관주의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야’ 하고 말하던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오고 크리스마스가 갑니다. 그러면 그들은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시 부활절이 가지요.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이건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에는 성공할 거라는 믿음, 결단코 실패할 리는 없다는 믿음과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고 규율을 결코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톡데일의 말이 파라독스가 되는 지점이다. 이 이중성을 우리는 늘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믿음을 가지되 현실을 망각하면 안되고,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되 자원의 한계 역시 직시하면서 우리의 매일을 채워가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무대책과 무책임한 낙관주의자로 살아가서는 실패만 더할 수 있기에 짐 콜린스가 가슴에 품고 다닌다던 “우린 크리스마스 때까지 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에 대비하세요.”를 우리의 가슴에도 역시 늘 새겨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스톡데일 파라독스’는 ‘의미’를 가진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가 가르쳐주는 ‘의미’위에 새로운 전략을 하나를 더 얹어주는 느낌이다. ‘스톡데일의 파라독스’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 위에 ‘현실직시’라는 안전장치를 하나 더해주는 역할을 하는 듯하다. 프랭클의 의미가 ‘믿음’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스톡데일의 현실직시도 함께 라는 ‘이중성’은 ‘의심’의 작용도 함께 하고 있으니, 믿음이 광신으로 빠지지 않을 안전장치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안전장치를 가진 자만이 죽지 않고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과 의심이라는 ‘파라독스’가 될 수밖에 없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다룰 수 있을 때만이, 우리는 꿈을 이루고 자유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시크릿과 긍정의 힘만으로는 통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긍정과 낙관만이 우리를 성공으로 이끌어 간다는 굳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스톡데일의 현실직시는 강력한 정신의 ‘전환’을 요구한다. 굳은 긍정주의를 채택했으나 행복하지 않았던 것은 긍정만으로는 생산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성공으로 만들어 내는 힘은 낙관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냉혹한 현실을 비관할 때 비로소 나올 수 있다. 비관에 따른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을 때에만 사람은 움직이기 시작할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은 반드시 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결과적으로 인생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낙관주의자, 열심히 교회를 다녔으나 자신만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다고 자책하는 기독교인들이 다시 힘을 얻기 위해선 다른 전략,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 은혜와 긍정과 시크릿에만 의존해서는 전환을 가져올 수 없다. 전략을 다시 수정해야 한다. 긍정에만 기대해서는 안 된다. 믿기만 한다고 이루어지는 시크릿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시크릿을 법칙으로 만들어 나갔던 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에 기반을 둔 행동이었다. 행동만이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행동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목적을 이룰 때까지 중지되지 않고 지속되기 위해서 시크릿과 긍정의 힘과 낙관주의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릭 워렌(Rick Warren)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이다. 그래서 짐 콜린스는 '스톡데일 파라독스'와 함께 ‘목적이 이끄는 삶’을 함께 인용하는 것이다.
행위 없는 믿음만으로는 피라미드의 단 한개 벽돌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리고 그 행위를 일으키는 건 보이지 않는 피라미드를 바라보는 믿음이고, 반드시 피라미드를 만들어 내겠다는 목적이 그의 매일을 이끌어 갈 때, 그는 결국 피라미드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경영의 구루(guru)라고 불리는 게리 해멀의 다음 말이 우리에게 다시 확신을 주고 있다. ‘경영의 미래’에서 게리 해멀은 이렇게 말했다.
“실험은 계획을 이긴다. 인간은 누군가를 통제하기 좋아한다. 사람들은 계획에 따라 미래가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가 점점 믿지 못할 상황으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경쟁을 뚫고 성공하려면 계획에 의존하기보다는 미래에 대비하는 실험을 준비하는 편이 더 낫다.”
백번의 계획보다 단 한 번의 망치질이 훨씬 더 중요한 이유이다. 우리는 믿음에 따른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과 함께 실패의 의심도 함께 하면서, 끊어지지 않는 매일의 실천과 실험을 해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석방되리라는 믿음과 함께, 올 크리스마스까지는 석방되지 못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잊지 않고 매일의 훈련을 지속해야 한다.
그것이 누적되어 생산물이 만들어 지고, 생산물이 있을 때 비로소 시크릿은 그들의 법칙이 아닌 나의 법칙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아 니가 참 잘했다’라는 말을 들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믿음과 의심, 낙관과 함께 냉정한 현실 직시, 계획을 능가하는 실험을 함께 할 때 우리는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 꿈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강력한 전략을 하나 더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될 때, 우리의 열정이 거품으로 흘러 넘쳐버리지 않게 되는 안전장치를 하나 갖게 되는 것이다. 믿음과 의심이라는 양날의 칼을 매일 갈아라. 짐 콜린스와 게리 해멀 두 경영이론의 대가들에게서 다시 배운 전략 하나이다.
하루에 좋은 문장을 5개씩 읽었고, 나중에는 30분이상 매일 좋은 책을 반복해서 읽었죠. 힘든 전쟁같은 상황에서 버티게는 해주더군요. 가끔은 그 좋은 문장들 덕에 꿈도 꾸고. 그렇게 하는 중에 같이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이랑 년차 모임을 하다가 서로가 같은 심정인 것을 알았죠.우리가 바뀌기를 기대했으나 별로 바뀌지 않은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3년쯤 지나면 아주 대단한 성공을 했을 거라 기대했던 거지요.그런데 현실은 아니더군요.
그러나 우리는 아주 조금씩 변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이에 사고의 방향을 돌려 놓았고, 그 사이에 같은 글을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눌 대여섯명의 길동무를 얻었고, 사고와 함께 행동도 필요하다는 것을 3년의 성공과 실패에 경험을 했지요. 괜찮은 경험이었습니다.
양날의 검을 자유롭게 휘둘러 볼 수 있는 훈련이 많이 필요합니다. 처음엔 작게 조심스럽게 휘둘러보다가 점점 팔에 힘이 생기고 몸이 균형을 갖추게 되면 더 크게 휘두를 수 있을 것이고, 나중엔 검을 잡고 달리면서도 사용할 수 있겠죠.
경숙님의 매일의 액션플랜이 양날의 검처럼 의심과 믿음의 조합에 '프라스 알파'가 함께하길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