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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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마법의 반지를 찾아 나서고 싶었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의 지혜로운 솔로몬 왕은 자신의 인장과 신의 이름을 새긴 은반지를 갖고 있었다. 왕은 그 반지의 힘으로 모든 동물들의 말을 알아듣고 또한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죽고 나자 그 반지는 ‘문이 여러 겹인 신전’ 에 숨겨졌다고 한다. 그 반지를 찾아 끼고 나와 함께 인생을 살고 있는 개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가 흡족한 삶을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란 적도 있었다. 영화<닥터 둘리틀>에서의 둘리틀 박사가 되어 동물과 이야기를 하며 사는 것을 상상하며 좋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 영화 속에 나오는 설정이 모두 허구만은 아니다. 가끔은 둘리틀 박사 이상 저들과 대화를 하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개들은 에너지와 보디랭귀지를 써서 언제나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우리가 그들의 본능에 귀 기울여 그 심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개의 가장 깊은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 또 그들이 주는 한 순간의 순수한 기쁨을 온전히 느끼면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 내가 현재 데리고 있는 동물에 대한 감정을 아름답게 남길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나는 그들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 알아야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있다. 요즘 나는 ‘무조건’ 잘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영원한 인간의 벗인 개의 행동과 심리에 관한 연구는 다윈과 로렌츠 등 대표적인 생물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이어져왔다. 하지만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의 벗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관찰하지 않았었다. 내 만족감이 충분히 채워지면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동물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 같다고 원하는 것이 다 같은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말이다. 서로의 ‘커뮤니케이션’이 정확하게 전달 될 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그 아껴진 시간과 힘은 또 다른 나의 성장을 위한 자유의 시간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리고 그들도 조절이 필요했다. 시도 때도 없이 매달리며 사랑을 갈구하기 보다는 적절한 타이밍에 흡족한 사랑을 받아 만족할 줄 알아야 했다. 연습이 없는 한 번 주어진 삶을 멋지게 또 후회 없이 살기 위해 나는 새로운 눈을 떴다. 제 3의 눈 ‘차크라’를 열어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관찰해 나갔다. 그것을 알고 나면 개들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있는지, 또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지금보다 훨씬 다양하게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모르는 게 약’ 인 시절에서 ‘아는 것이 힘’ 이 되어야 했다.
훈련과 대화가 많아졌다. 그 동안은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해석하고 요구에 맞추어 주었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이야기를 하며 그들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관찰했다. 간단한 반응은 알아들었다. 눈빛과 몸짓으로 그들은 나의 대화에 반응하였다. ‘산책하고 싶어? 나갈까?’ 하면 벌써 꼬리를 흔드는 것이 모자라 궁둥이까지 흔들어 댄다. 나 지금 바빠. 글 써야 해. 저리가’ 하면 귀와 꼬리를 내리고 이불에 엎드려 흰자가 보이지 않는 개들의 눈에 흰자가 살짝살짝 보이게 나의 눈치를 보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간단한 대화로 이야기를 하지만 많은 대화를 온 몸으로 하기도 한다.
개는 사람처럼 입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의사 전달 방식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개에게는 사람 이상으로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신체 부위가 있다. 귀와 꼬리 콧등 위의 근육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를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한다. 또 꼬리도 퇴화되어 근육 속에 묻혀 미추라는 명칭만 가지고 있다. 그러나 개의 귀는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아주 큰 일을 한다. 귀와 꼬리의 움직임만으로도 나만의 그들의 언어 해석은 가능하다. 멀리 누가 오고 있는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말이다. 견종에 따라 꼬리를 올리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개들은 분명 꼬리로 많은 것을 이야기 한다. 기쁨, 슬픔, 공포 등을 꼬리로 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대화하면서 함께 세월을 보낸다. 그리고 함께 늙어간다.
개는 의사 전달을 하는데 인간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만의 표현방식으로 계속 감정을 전달하고 있었다. 개는 사람이 던지는 말 보다는 몸짓에서 미묘한 신호를 읽어내는 능력 덕분에 대화가 통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들의 눈빛이나 몸짓으로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듣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행동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있다면 나는 이것이 대화라고 생각한다. 사람들도 말을 하지 않아도 표정이나 행동으로 그들의 상태를 짐작하고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꼭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사랑을 느낄 수 있고, 고맙다 말을 하지 않아도 고개 한 번 깊이 끄덕 해주면 나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믿음이 오는 것이 어쩔 때는 말 한마디보다 더 큰 울림으로 가슴에 남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도 살면서 무언가 내 삶에 장애로 다가올 때 변화의 시간을 찾는다. 그것은 개인에 따라 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새롭게 무엇을 시작하고 싶을 때 나의 마음에 무겁게 나를 눌러 앉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언지 잘 들여다 보아야 변화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 개에게 자는 시간 이외에 내내 끊임없이 애정을 주지 않으면 개에게 무언가 결핍되고 불쌍해 보이는 나의 생각이 문제였다. 너무 사랑해서 집착이 되어버린 잘못된 사랑의 방식이 나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 무거움을 즐거움으로 바꾸기 위해 현재 끊임없이 찾고 그들과 대화하는 중이다. 타협으로 서로가 서로를 알아 주는 대화, 즉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어야만 자기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름의 집착에서 사랑이란 이름의 절제로 변화하는 시간이다. 변화의 동기는 규칙과 경계, 한계였다. 산책과 훈련, 애정을 주는 이 실천이, 개가 우리 삶에 가져다주는 모든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 될 것이다.

개에 대한 투사(Projection)에서 역할(Role)과 공존으로 네 모습이 변모하는 느낌이다.
나는 너의 책이 단순히 개에 대한 이야기보다
개를 통한 me story가 되면 어떨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개가 좋아지면서 몸과 마음이 느꼈던 경험, 즉 체험(Embodiment)과
그것이 집착으로 바뀌면서 투사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경험,(내가 꿈벗 모임에서 만날 때는 이 느낌이 강했다.)
그리고 이제 점점 개의 역할을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해보면서 역할병존의 단계로 상승하고 진정한 너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이것이 자족적인 것이 아니라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은 여기까지...
좀 더 구체화되면 다시 이야기해줄께.
참고해.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의 벗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관찰하지 않았었다. 내 만족감이 충분히 채워지면 그것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개를 사람으로 바꿔놓아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문장입니다. 내가 부족한 면이고 채워나가야 할 면입니다. 개에 대한 이야기가 자꾸 사람 얘기로 들려 뒤돌아 보게 됩니다.
누나, 솔직히 얘기해 봐~~
요새는 사람 떠올리면서 칼럼 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