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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바람처럼 내달렸다. 들키면 안돼. 어디에 숨을까. 꾸불꾸불 골목길은 그의 놀이터 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장 구석진 곳에 웅크렸다.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크, 호흡도 멈추었다. 지나갔다. 다행이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숨바꼭질 놀이에서 나를 찾는 술래의 소리가 들렸다.
“못찾겠다 꾀꼬리. 빨리 나와라.”
유년시절 함께한 골목길은 그의 추억의 밑바탕이 되어있다. 남들은 지나 다닐수 없는 작은 통로를 날씬한 몸매 덕분에 쾌감을 느끼며 자유자재로 통과하며 다녔다.
막혀 있을 것 같으면서도 끝까지 가보면 다른 통로로 연결되어 있고,
끝났다고 여겨질 후미진 곳에서도 또다른 길이 펼쳐져 있다.
골목길의 미로(迷路)처럼 아라크네가 거미줄을 뽑아내는 것처럼 여러 갈래로 연결되어 있는 작은 길들은 우리네 인생사와 같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절대절명의 순간에서
막다른 갱도의 시점에서
그래도 작은 길의 뚤려 있음으로 우리는 빛을 본다.
중요한 것은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의 붉은 실타래를 잡듯 그 믿음을 놓치 않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래야 그 길의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인이 된 그에게 골목길은 한참 물이 익은 연애를 하기에 좋은 아지트였다.
멀쩡한 길을 놓아두고 그는 앞으로 함께 살게될 그녀와 그곳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아이, 무서버예. 와이리 으슥한 데를 갑니까예.”
“무섭긴 뭐가 무섭노. 큰길 보다는 이쪽 길이 더 빠른기라. 내말 믿고 이리로 가자카이.”
미리 보아둔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한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였다.
기회의 순간을 포착한 그는 담벼락에 그녀를 몰아 세우고 어설프기 짝이 없는 찐한 첫키스를 시도 하였다.
“어머, 망칙스럽게. 와이캅니까예.”
“가만있어 보라카이.”
가로등 불빛 모기떼가 날아 다니는 가운데 달님은 부끄러운 듯 한쪽 눈을 가렸다.
북촌 한옥마을 길목을 찾은 그는 너무나 신이 났다.
서울에도 이런 곳이 있구나. 우와.
가파른 길도, 높다른 길도, 구비진 길도 그에겐 환희로 다가왔다.
“그래 이거라카이.”
재미있었다. 어릴적 숨바꼭질 하던, 딱지치기 하던, 훈장 따먹기 하던, 구슬치기 하던 그 공간의 틈새와 여유가 절로 떠올져 졌다.
구슬구슬 맺힌 땀을 훔치며 높은 곳에 다다르며 바라본 기와집 풍경은 마음 가득 트인 느낌과 함께 한줄기 바람을 몰고 왔다.
번화한 큰길에서는 느껴볼수 없는 향수, 여유, 트임이 다가왔다.
사람의 역사가 시작된 이곳
삶의 애환이 굽이굽이 펼쳐진 이곳
생계의 바탕이 펼쳐지는 이곳
남녀의 로맨스가 어우러진 이곳
놀이의 열중함이 있는 이곳
소년의 추억이 아려있는 이곳에 늦은밤 반가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메밀묵 사~려 찹살떡.”
그렇구나. 아직도 남아 있었구나.
그리고 반갑게 맞아준 또다른 손님.
“시원한 아이스께끼 있구먼유.”
신체 여러 장기의 갈라짐이 각기의 역할로써 소임을 다하듯이
조직사회속의 개인이 자신의 역할에 책무를 다하듯이
우리네 잘난것도 없고 못난것도 없는 인생살이에서 하루를 영면(永眠) 하듯이
꼬불꼬불 가닥가닥 이어진 골목길은 하나의 작은 틈새로 작은 숨구멍으로 작은 세포 하나 하나가 합쳐진다.
시냇물이 모여 개천을 이루고 그것이 다시 강이 되고 바다로 합쳐지듯이
거기에 밑바탕에 미로 같은 골목길이 있었다.
새벽 일어나 밥솥에 쌀과 현미를 넣고 아침밥을 한다.
몇 번정도 쌀을 고른후 일정량의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얹히고 불을 켠다.
10분 정도가 지나면 압력 밥솥은 열기와 내부의 힘이 융합이 되면서 달음박질을 일으켜 새로운 역사를 일으킨다. 칙폭 칙폭 증기 기관차가 달려 나가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썩 들썩 장단과 함께 어울림의 연출이 이루어질 즈음, 가스 불을 끄면 그제사 한숨을 쉬면서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그런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작은 길과 큰길, 작은 마음 큰마음, 작은 역할 큰 역할이 합쳐지자 우리 앞에는 생명을 영위할수 있는 따끈한 밥 한공기가 식탁위에 모락모락 존재의 기운을 풍기는 풍광이 펼쳐진다.
차려진 식탁에 혼자가 아닌 동무들을 부르자. 어린 시절 함께 했던.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제막 밥 한숟가락을 들려고 하는 순간,
“승호야 놀~자.”
그렇다. 예기치 않는 인생의 순간처럼 우리에겐 그런 설레임과 떨림이 오늘도 시작 되는데, 그곳에서 나는 보물지도 하나 들고 아무도 찾지 못한 보물섬을 찾으러 가는 짐 호킨스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