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숙
- 조회 수 3439
- 댓글 수 6
- 추천 수 0
칼럼 37-의식 수준에서의 ‘무기력’의 위치-20101206
사람의 ‘정신’과 ‘의식’의 수준에 차이가 있다는 가설은 많은 선각자들에 의해 여러 방법으로 제기되었다. 그 중 미국 정신진화 전문가 데이비드 호킨스(David Hawkins)박사는 의식의 레벨을 수치화한 가설를 제시하고 운동역학(Kinesiology)에서 빌어온 기술을 자신이 상담한 사람들에게 수십년간 적용한 결과를 유명한 저서 "Power and Force(‘의식혁명’으로 1997년 국내 번역)“에 제시하고 있다. 그가 실험한 운동역학(Kinesiology) 기술은 동양의학 중 어떤 음식이나 약재가 자신에게 잘 맞는지 혹은 맞지 않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오링(O-Ring) 테스트의 방법과 유사하다. 데이비드 월터(David Walter)는 1976년에 출판한 방대한 분량의 <응용 운동역학>에서 ”운동 역학의 가장 놀라운 발견은 근육이 육체의 이롭지 않은 자극을 접할 때면 순간적으로 약해진다는 사실이다“ 라고 했는데, 이 근육의 약해짐을 이용하여 데이비드 호킨스는 사람마다 자신에게 맞는 것에는 강력한 물리적인 당김을 느끼고, 맞지 않는 것은 근육이 배척한다는 가설을 제안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는 것까지에도 적용했다. 그리하여 그 결과값을 수치화하여 인간 의식의 수준에 대수치를 연결하는 당시까지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대담한 가설을 제기했다.
그는 인간 의식값을 20에서 1000까지의 수치로 설명하며, 사람마다 어떤 단계의 값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예수와 부처의 의식레벨을 1000, 간디는 700, 아이슈타인과 뉴턴, 프로이트는 499라고 했다. 여기서의 수치는 대수의 의미이므로 의식수준 50과 55의 차이는 단순한 차감값인 5만큼의 차가 나는 것이 아니고, 지수값만큼의 차이가 난다는 말을 하고 있다. 그 수치의 절대값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여기서 논의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가 단계별로 정리한 의식의 지도는 현재까지 정신을 연구한 철학자, 의학자, 심리학자들이 이미 발표하였거나, 혹은 우리가 막연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상당히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볼 수 있어, 그의 지도에 나타난 ‘무기력’의 위치를 통해 객관적인 ‘무기력’에 대한 정의와 의식레벨 전체에서 다른 항목들이 무기력과 어떤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엿볼 수 있어 도움이 된다.
데이비드 호킨스가 제안한 의식의 지도는, 의식의 수준에 흥미를 가진 인간 정신을 다루는 사람들, 자신의 현재 상황을 변화하고 싶어하는 이, 나아가 정신의 진화를 원하는 사람들에 통합적인 시각과 통찰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되어 여기서 소개한다. 그가 정리한 의식의 단계는 다음 <표1>과 같다.
<표1>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의 지도 (출처:의식혁명)
대수의 수치 |
의식수준 |
감정 |
세속의 관점 |
신의 관점 |
과정 |
700-1000 |
깨달음 |
언어이전 |
존재 |
자아 |
순수의식 |
600 |
평화 |
축복 |
완전한 |
항상존재하는 |
지각 |
540 |
기쁨 |
고요함 |
전부 갖춘 |
하나 |
거룩함 |
500 |
사랑 |
존경 |
자비로운 |
사랑 |
계시 |
400 |
이성 |
이해 |
의미있는 |
현명함 |
추상 |
350 |
포용 |
용서 |
화목한 |
인정많은 |
초월 |
310 |
자발성 |
낙관 |
희망에 찬 |
감화주는 |
의향 |
250 |
중용 |
신뢰 |
만족한 |
능력이 있는 |
해방 |
200 |
용기 |
긍정 |
가능한 |
용납하는 |
힘을 주는 |
175 |
자존심 |
경멸 |
요구가 많은 |
무관심한 |
과장 |
150 |
분노 |
미움 |
적대의 |
복수에 찬 |
공격 |
125 |
욕망 |
갈망 |
실망하는 |
부정하는 |
구속 |
100 |
두려움 |
근심 |
무서운 |
징벌의 |
물러남 |
75 |
슬픔 |
후회 |
비극의 |
경멸의 |
낙담 |
50 |
무기력 |
절망 |
절망의 |
비난하는 |
포기 |
30 |
죄의식 |
비난 |
사악한 |
원한을 품은 |
파괴 |
20 |
수치심 |
굴욕 |
비참한 |
멸시하는 |
제거 |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모든 사람이 항상 어느 단계의 특징을 일관적으로 보이거나 그 패턴에 따라 지속적으로 사고하거나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출생 시 유전자에 각인되어 나오는 정보와 성장하면서 학습된 많은 인자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특정한 단계의 값을 취한다는 것이 데이비드 호킨스의 이론이다. 모든 사람은 <표1>의 수치 단계 중 어느 한곳 정도에 베이스를 가지고 있고 그 특징에 따라 사고하고 행위하는데, 현재 인류 전체의 평균치가 205의 ‘용기’정도의 수준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류 모두가 205정도이라는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200이하의 사람이 85% 정도라고 그는 말한다. 그럼에도 205의 평균치가 나오는 것은 대수치가 높은 몇몇의 각자(覺者)들이 수십 수백만명의 부정 에너지를 상쇄할 수가 있어서, 전체 에너지 값을 높이는 역할을 하여, 인류전체의 평균 대수치를 높여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전체 인구의 0.4% 정도가 500이상의 에너지 장이고, 1000만명 중 한명만이 600 이상의 수준이라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후속 저서에서 그 평균 레벨이 조금 더 상승했다고 말 하지만, 수치의 값에 중요성을 두는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논의하지 않겠다. 단지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이 평균이하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600대의 한사람이 수백만명의 에너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은, 교황의 한마디에 수 많은 사람들이 감화되는 것이나, 김수환 추기경과 만난 사람들이 그 순간 높은 에너지에 감동되어 평생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고백하는 것 등의 예에서 우리는 엿볼 수 있다. 아마 그것은 진실일 것이다.(우리가 변경연에 몰려들었고, 사부님의 한마디에 집중하고 감동을 받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이다)
그대는 자신의 지수가 어디쯤인지 알 수 있는가? 자신이 ‘사랑’의 단계에까지 올라갔다고 말하고 싶은가? 가족에 대한 변하지 않는 사랑이나 일순 이성과의 사랑에 빠져있는 단계에서 말하는 사랑이 아님은 모두가 다 알 것이다. 여기서의 레벨은 한 사람이 전쟁과 평화, 절망과 희망과 같은 상반되는 모든 상황에서 외부와 대응하는 그의 마음의 프레임이자 인지의 방식이고 교육의 결과이자 삶의 철학일 것이다. 그것이 그의 기본적인 의식수준이다.
이런 이유로 만약 어떤 사람이 ‘175’ 자존심의 레벨에 머물러 있다면, 그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것에서 에너지를 얻을 것이다. 그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동력은 ‘자존심’지키기이다. 그리고 그 자존심의 단계에서 ‘200’의 용기의 수준으로 상승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정일 것이다. 데이비드 호킨스는 한 인간이 원래 가지고 있는 레벨에서 평생을 노력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겨우 수치값 ‘5’정도만 상승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슬프지만 의식의 진화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은 어떻게 해야만 의식의 향상을 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항상 가르침을 펼쳐왔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해왔다. 이 사다리를 오르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이런 이유로 간절히 변하고자 하는 우리가 변화에 어려움을 느끼는 것이고, 성장과 진화는 더더군다나 불가능하게 느끼는 것인지도 모른다. 운 좋게 어떤 계기로 조금의 변화를 했다고 하더라도, 다음 순간 강력한 끌개에 의해 다시 아래로 원상 복귀되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많이 보는가! 그런 이유로 자신이 변했다고 말할 때나, 타인에게 변화를 종용할 때 우리는 매우 위험하고 깨지기 쉬운 물건을 다루듯 조심해야 한다. 또한 누군가의 관점이 선각자의 충고 몇 마디로 변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과 세상을 속이는 행위이다. 진정한 변화는 오랜 훈련에 의해 정신과 육체에 근육을 만드는 작업이다. 그 근육 하나하나에 새로운 레벨을 학습시키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변화란, 다른 새의 깃털로 장식한 까마귀 우화속의 주인공과 같은 빈 공허함만 남길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쉽게 변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나에게 몇 마디 말로 성장을 충고하는 사람도 경계한다. 변화와 성장을 쉽게 말하는 사람은, 그가 진정한 변화의 노력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가짜구루’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아파할 때 그 아픔에 함께 공명할 수 있는 자만이 그의 레벨에 무관하게 ‘진짜구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로 충고하는 사람보다 차라리 자신의 고통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나, 작은 것 하나라도 변화를 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의 말에 더 진정성을 느끼는 것이다.
변화와 진화는 어려운 작업이고, 어쩌면 평생이 걸리는 개인 프로젝트가 될지도 모른다. 정신치유를 위한 정신과 상담이 수십년 간 진행되는 예를 보면서 변화와 진화의 어려움을 자신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닌, 인류의 공통되는 문제일수 있음에 안도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하루 이틀 만에 누군가가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하지 말아야 하고, 또 타인을 변화시키겠다고 섣부른 충고를 하는 것도 멈추는 것이 좋으리라. 우리의 어리석은 판단이나 설익은 진단과 충고로 진짜 변화를 원하는 그의 희망을 잘라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설픈 치유자가 환자를 망치는 사례를 우리는 임상심리 서적에서 얼마나 자주 볼 수 있는가!. (그래서 상담자 자신이 슈퍼바이징을 받아야 하는데, 제대로 된 슈퍼바이저에게 슈퍼바이징 받지 못한 상담자는 그 존재 자체로 환자에게 해악이다.) 슬픈 현실이지만 인간은 모두 자기 자신 하나 지켜가기 어려운 존재들이다.
앞에서 나는 변화가 쉽다고 예단하는 자들은, 그들이 한 번도 진지한 변화의 노력을 해본적이 없는 자들일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정말로 이건 중요한 관점일지 모른다. 매사가 쉬운 사람의 진정성은 일단 의심해봐야 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서 보았듯이, 한 번도 집을 짓지 않는 베짱이는 한평생 노래만 하다가 죽어간다. 개미의 성실함만이 피라미드를 세울 수 있을 것이고 변화의 과정 역시 그러할 것이다. 베짱이가 개미로 변할 수 있는가? 베짱이의 천성은 변화자체를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결국 눈 내리는 밤 개미집을 두드리며 울 수밖에 없는 것이 베짱이이다. 변화를 원한다면 개미처럼 노력하라. 하루 하루를 베짱이처럼 살아간다면 눈 내리는 밤의 저주가 멀지 않을 것이다. 변화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다.
변화의 과정을 거쳐 보려고 한번이라도 진지한 노력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변화란 뼈를 깎고 피를 태우는 과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일어나는 일임을 알 것이다. 누군가가 분명히 예전과 달라졌다면 그는 자신이 알든 모르든 그 과정을 통과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열흘 만에 성공으로 변화시켜주겠다는 식의 선동적인 문구나 숱한 자기계발의 법칙이 그 순간의 마약 역할 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고, 순간 통찰은 줄 수 있을지 모르나 진정한 변화의 행위는 시작하지도 못하게 막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변화와 진화를 원한다면 그 과정이 매우 어렵다는 점과 다시 추락되어 원상복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항상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삶이 쉬운 것이 아니다. 성장은 더욱 더 그러하다.
그렇다. 진정한 변화와 상승과 진화는 오랜 노력을 요하는 과정이고, 우리는 그것을 미리 알고 시작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지(관점)의 전환을 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변화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몇몇은 그 일생의 변화가 전설처럼 느껴질 정도로 의식의 레벨값이 수백이상으로 수직상승을 하기도 한다고 호킨스는 말한다. 나는 뒤에서 의식의 레벨을 상승할 수 있을 인지의 전환 기법을 논의하겠다.(아직은 다루지 않겠다)
단지 내가 여기서 독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데이비드 호킨스가 정리한 의식의 지도에서 ‘무기력’ 이 존재하는 위치를 보라는 것이다. <표1>에서 보면 무기력의 위치는 대수 수치 50, 지도의 거의 하위 단계에 머물러 있다.
데이비드 호킨스가 정리한 무기력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출저 : 의식혁명 P. 72)
무기력 수준은 빈곤, 절망, 자포자기로 특징지어진다. 현재와 미래가 황폐해 보이고, 비애가 인생의 주제로 보인다. 이 단계는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로서, 여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하나, 그 도움조차도 그들에게는 쓸모없게 느껴질 뿐이다. 보살펴주는 사람에 의해 외부의 에너지가 조달되지 않는 한, 무기력에 의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살려는 의욕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자극에 무감각하며, 시선은 더 이상 사물을 좇지 않고 주어진 음식도 삼킬만한 에너지도 없는 상태에 이른다. 집도 없이 헤매는 사람들과 사회의 낙오자가 이 수준에 속한다. 나이든 노인들의 체념 상태이기도 하고, 또 만성 질병이나 심한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수준이기도 하다. 무기력한 사람들은 의지해야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그들을 ‘무거운’ 짐처럼 느끼기가 쉽다. 사회에서는 자원의 낭비로 보이는 이 수준의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동기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테레사 수녀와 그 추종자들이 걷는 인도의 캘거타 거리야말로 바로 이 수준에 해당된다.) 이 수준은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조차 갖기 힘든 희망의 포기 상태이다. |
위의 데이비드 호킨스가 정의한 무기력의 상태는 너무나 절망적이다. 이것을 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길 것이다. 자신과 다르다면 행운에 감사하라.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이 경험한 적이 있음 아파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단계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서 그 무기력의 탈출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절망하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절망을 자축하라. 그대도 언젠가 그곳을 나올 수 있으리니.......
우리는 가능한 200이하의 레벨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운명이 자신을 그 상태로 출생하게 했거나, 교육이 자신을 그렇게 배워가게 했거나, 불행한 사건으로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계보다 아래의 레벨로 추락되어 버렸다면, 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단계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의식의 진화와 변화는 분명 어렵고 오랜 시간을 요하는 작업이다. 무기력에서의 상승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면 우리는 가진 재료와 자원으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야 한다.
무기력의 단계에 들어갔거나 오랫동안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그가 정말 아무런 희망이 없으므로 그 상태에 들어갔고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미 무감각해져 버렸고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슬픔조차도 느끼지 못하고 분노도 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절망과 포기이고 그래서 그에게서 보이는 것은 <표1>에서 보듯이 ‘비난의 마음’뿐이다. 서울역의 노숙자를 본적이 있는가? 그가 하루 애써 구걸한 돈으로 밥 대신 소주를 사마시고, 하루 일당을 그들끼리의 노름으로 날리거나, 술 취해 싸움질을 해대는 모습을 본적이 있는가? 그들은 자신과 가족, 동료를 비난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운명을 저주한다. 노숙자에게는 ‘비난하는 마음’만이 남은 무기력이 그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노숙자 상태인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가 멀쩡한 직업과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정신은 무기력에 병든 인생노숙의 상태인 사람도 있다. 그는 어찌할 것인가? 물리적인 노숙자나 정신의 노숙자 그들 모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적어도 그가 도움을 찾아 헤맨다면 그의 치유는 가끼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정신의 노숙자에게 그 상태에서 나오라고 말하는 욥의 친구나 치유자도 있을 수 있다. 그들의 충고로 환자가 나을 수 있을까? 치유자가 정말로 치유를 하려고 한다면 환자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가 그 단계로 들어간 것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어떤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계에서 나오는 과정이 힘든 일이었기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약 그와 같은 상태였다면 노숙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장담을 할 수 있는가? 역지사지를 하지 못하는 자는 가르치는 자격도 사랑한다고 말할수 있는 자격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절망적인 무기력상태의 노숙자에게 그곳에서 스스로 나오라고 말하거나, 한심하다고 충고하거나, 틀을 깨라는 충고를 함부로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무기력한 절망을 가슴으로 본다면 말이다. 차라리 그에게 소주 한 병을 살돈을 주거나 밥 먹을수 있는 기관으로 인도하는 편이 낫다. 그것도 하기 싫다면 내버려 두어라. 38년 된 혈루증 여인이 예수를 만나 변화했듯, 앉은뱅이가 ‘달리다굼’ 한마디에 자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듯, 어느날 그가 추기경을 잠깐 만나 그 황홀경에 의해 하루 만에 변화하거나, 스스로의 대오각성에 의해 목욕재계를 하고는 피나는 노력을 하여 재벌로 탈바꿈 될 수도 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바로 데이비드 호킨스가 말하는 의식지수가 수백단위로 상승하여 삶이 전설이 된 사람일 것이다.
분명 무기력이란 인간을 파멸시키는 치명적인 의식수준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건 다음에 논의하겠다.

1) 책을 펼쳐놓고도 집중하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는 증세
2) 몸이 둔하고 무거워지며 몸무게까지 날로 증가하는 현상
3) 하나도 힘들지 않을 분량만을 했을 뿐인데도 쉬 피로하고 힘들어짐
4) 만사에 의욕보다 이내 지쳐버리고 그로인해 짜증스러움 가중
5) 업친데 덥친 격으로 주변인이나 상황까지 계속 꼬여만 가며, 약속 안 지켜, 연일 지체시키며 신경 건드림
6) 느긋한 휴식보다 처리할 일들만 산더미
7) 쓸데 없는 일들만 수두룩 찾아들어
으앙~ 뽀빠이 도와줘요~ ^-^*
.gif)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052 | 응애 44 - 지상에 숟가락 하나 [4] | 범해 좌경숙 | 2010.12.09 | 2522 |
2051 | 니체씨 히틀러양을 만나다(가제) 인물 프로필 [18] | 박상현 | 2010.12.06 | 2445 |
2050 | [컬럼] 니가 사람이냐 [11] | 최우성 | 2010.12.06 | 2377 |
2049 | 손님이 나를 만든다. [14] | 맑은 김인건 | 2010.12.06 | 2410 |
2048 | [칼럼] 따로 또 같이, 그와 나의 취미생활 (1) [9] | 이선형 | 2010.12.06 | 2577 |
» | 의식 수준에서의 ‘무기력’의 위치 [6] | 박경숙 | 2010.12.06 | 3439 |
2046 | 개들과의 행복한 동행 [12] | 이은주 | 2010.12.05 | 2377 |
2045 | 라뽀(rapport) 34 - 이승호 완패(完敗) | 書元 | 2010.12.05 | 2044 |
2044 |
하계연수 단상32 - 뱃사공 카론의 여정 ![]() | 書元 | 2010.12.05 | 2444 |
2043 |
하계연수 단상31 - 그대 무대를 꿈꾸어라 ![]() | 書元 | 2010.12.05 | 2352 |
2042 | 밑이 구린 사내들 이야기, 미꾸라아-쥐 [8] | 신진철 | 2010.12.04 | 2872 |
2041 | 칼럼. 원영이의 기다림 [5] | 김연주 | 2010.12.04 | 2303 |
2040 | 응애 43 - 트렌드 워칭 | 범해 좌경숙 | 2010.12.03 | 2284 |
2039 | 개봉박두, 신진철의 첫 책 [12월 오프과제] version 1.0 [5] | 신진철 | 2010.12.02 | 2389 |
2038 | '전주천 10년의 기록'을 발간하면서 | 신진철 | 2010.12.02 | 2373 |
2037 | 갑순이 이야기 [3] | 신진철 | 2010.12.01 | 2450 |
2036 | 응애 42 - 보노보 찬가 [3] | 범해 좌경숙 | 2010.11.30 | 2211 |
2035 | [칼럼] 배불뚝이 TV 사용설명서 - 첫문장 수정이요 ^^ [15] | 이선형 | 2010.11.29 | 2367 |
2034 | [컬럼] 손바닥 두뼘의 축복 [7] | 최우성 | 2010.11.29 | 2368 |
2033 | 무기력을 배우는 과정 하나 - 호스피탈리즘 [17] | 박경숙 | 2010.11.29 | 2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