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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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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6일 09시 15분 등록

  “또? 뭘 매번 적으라고 해...”


  그걸 놓고 제대로 이야기 한번 나눈 기억도 없는데 매년 새로운 담임선생님은 종이 한 장을 나누어 주었다. 아마 ‘가정환경조사서’ 비슷한 제목이었던 것 같다.

  같이 사는 온 가족의 최종학력과 직업부터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자가냐, 전세냐, 월세냐, 집에 있는 가전제품의 종류까지,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조사라고 여겨질 것들을 매년 꼼꼼히 적어내게 했다. 학교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모르겠지만 하기도 싫고 도대체 왜 해야 하는지 항상 궁금했던 많은 것 중 하나였다. 

  일찍 철이 들고난 후부터는 엄마에게 갈 것도 없이 알아서 적당히 적어내곤 했는데, 그래도 항상 나를 고민에 빠뜨렸던 항목이 있었다.

  

  바로 ‘취미’, 그리고 ‘특기’였다.

  취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고 특기는 ‘남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기술이나 기능’이라고 사전에는 쓰여있다.

  즐기는 것은 책읽기였고, 특별히 잘한다고 생각되는 것은 일찍부터 집안에 있는 잡다한 책들을 섭렵한 덕택에 얻어진 책 읽는 속도가 비교적 빠르다는 것 정도?

  도대체 뭘 적으라는 거야.

  한번은 취미도 독서요, 특기도 독서라고 적었더니, 특기를 다시 써오라고 한 적도 있었다. 무엇을 적어야하는지 끙끙대며 옆 아이의 종이를 힐끔거리다가 내 것을 슬그머니 뒤집기도 했다. 아마 대부분의 아이들은 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번은 담임이 ‘너희들 취미가 다 독서인데, 난 왜 한 번도 너희들 책보는 것을 못 봤냐?’하며 우리를 놀린 적도 있었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그냥 피아노라고 적었다. 가장 많이 적는 무난한 것이었으니까.


  피아노를 배우던 언니를 샘내어 울고불고 한참을 졸라 피아노를 배운 적이 있긴 했다. 막 싹트기 시작했던 즐거움은 툭하면 30센티 자로 손등을 때리던 무서운 선생님 탓에 금방 꺾여 버렸지만 무슨 까닭이었는지 꽤 멀었던 선생님 집을 혼자서 한참동안 걸어 다녔다. 혼자 온갖 상상을 하며 걷던 그 골목길이 그 때 배운 피아노보다 더 깊게 기억에 남아 있고 결국 피아노는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 되었다. 


  어른이 될 때까지 나의 취미란과 특기란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나는 책읽기, 특히 소설을 좋아하는 것 외에 특별한 취향이 없는 밋밋한 사람이었다. 재미있는 책 한 권을 들고 앉으면 밥 한 끼는커녕 두 끼도 거뜬히 건너뛸 수 있으니 독서가 진정 ‘즐기는’ 취미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무언가 새롭고 신선한 것에 대한 욕심은 살짝 숨어 있었나 보다.


  회사에 입사한 후, 영화 번역을 하던 대학동기와 함께 영화를 보러 다니던 때가 있었다. 개봉하는 상업영화뿐만 아니라, 친구가 같이 가자던 예술영화도 몇 편 보곤 했다. 동아리 선배이긴 했지만 개인적 친분은 그다지 없었던 신랑을 다시 만난 것은 바로 그 때, 우연한 계기였다.    

  어느 토요일 밤새 연속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가 있다고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직장생활에 휘둘리던 나는 밤 새워 영화를 볼 정도의 진지한 관심은 물론 체력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어떤 종류의 영화인지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고 그러겠다고 흔쾌히 승낙을 했다. 늦은 밤 친구와 만난 대학로에는 그도 함께 있었다. 몇몇 연락을 했는데 나온 사람은 둘뿐이었다나. 우리 셋은 간단히 요기를 하고 밤 열두시부터 시작되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상에, 내가 결코 돈 받고도 보지 않는 공포영화 시리즈였던 것이다. 지금도 첫 영화 제목이 기억난다. <킹덤>...

  이미 마지막 전철이 끝난 지 오래인 터라, 간을 졸이면서 내리 세편의 공포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영화관을 나설 때는 졸음과 긴장, 추위까지 비몽사몽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나 빼고 두 명은 열심히 따끈따끈한 영화 얘기를 하고 있었다. 포장마차에서 뜨거운 어묵을 먹고 어스름한 새벽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난 내가 잠시 미쳤었지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우리 만남과 연애의 시작이었다. 가난한 복학생과 세상물정 모르는 직장 신출내기의 연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 때 막 문을 열었던 동서울 CGV에서 영화 한 편 보고 간단히 저녁을 먹고 우리 집까지 함께 오곤 하던 평범한 데이트였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던 우리가 가장 쉽게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영화구경이었고 나는 사실 어떤 영화를 보는가보다는 그를 만나는 사실에 더 설레곤 했다.

  연애시절 개봉작을 거의 다 볼만큼 함께 영화를 보았지만 그와 나의 영화 취향이 정말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결혼 후 한참이 지나서였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재미있는 영화가 좋다. 문제는 그 추구하는 재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로맨틱물이다. 거기에 코미디가 더해진 것도 물론 좋고. 알고 보니 신랑은 그런 영화를 보면서는 거의 졸았다. 그동안 어떻게 따라 다녔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 연애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었겠지.

  결정적인 한 편은 일본영화 <간장선생>이었다. 습관처럼 그를 따라나섰다가 엄청나게 후회를 했던 그날, 다시는 좋아하지도 않는 영화를 보러 따라다니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그날 우리는 기꺼이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암묵적인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그 후 난 영화를 꼭 신랑과 보아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비슷한 취향의 친구나 직장동료와 맘 편하게 좋아하는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한번은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던 제인 오스틴 원작의 <센스 앤 센스빌리티>를 TV에서 상영했다. 물론 나는 열심히 다시 보았고 잠시 함께 보던 신랑은 신기한 듯 나를 몇 번 쳐다보다가 이해하기를 포기했던 적도 있다. 물론 아기를 낳고 난 후 꽤 오랫동안 취향과 상관없이 영화구경 자체가 꿈같은 사치였지만 다행히 암흑시대는 이제 끝났다.     


  십년이 넘어도 그는 별로 바뀌지 않았고 나 또한 변하지 않았다. BBC에서 방영했던 <오만과 편견>4부작 DVD는 여전히 나만의 보물이요, 그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다.
  그러나 한편 이제는 함께 영화를 봤다하면 백전백승이다. 영화 제목과 감독과 배우를 보고, 대략의 영화평을 읽어보면, 우리가 이 영화를 꼭 같이 볼 것인지, 아님 각자 알아서 할 것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가장 최근의 성공작은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이다.

  이것이 우리가 따로 또 같이 영화를 즐기는 비법이다.

IP *.230.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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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12.06 09:52:48 *.42.252.67
영화가 맺어 준 너의 반쪽 이야기구나.
영화관에서 그 사람과 손을 잡았던 설레임같은 것이 왜 빠져있어?(제일 궁금하구먼)
그게 영화관하면 젤 먼저 떠오르잖아.
'영화를 보는 취향은 틀린 '따로' 이지만 손을 잡고 있는 '같이'가 더  좋아
나는 그와 같이 평생을 살기로 마음 먹었다.
아직도 그의 따뜻한 손과 나의 가슴 떨리던 심장 소리가  영화관을 찾을 때마다
나를 설레게한다. '
아침부터 관시리 내가 설레이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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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07:42:13 *.230.26.16
ㅍㅎㅎ, 손잡은 곳은 다른 데라서 ^^;;
아, 진짜 설레이는 글을 쓰고 싶어서 설레이는 아침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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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12.06 13:09:27 *.10.44.47
내가 결코 돈 받고도 보지 않는 공포영화

저도 결혼하고 첨 알았어요.
'13일의 금요일'의 속편이 그렇게나 많은지를..
결혼하고 처음 맞던 여름. 케이블 TV에서 끝도 없이 이어지던 납량특집 공포영화.
윽! 지금 생각해봐도 완전 끔찍해요.
이사오면서 TV를 치워버린 건 아마도 그때 받은 충격의 영향일지도..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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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07:44:04 *.230.26.16
그렇구나^^
묙은 나랑 반대네. 난 나중에 TV를 샀고, 너는 나중에 TV를 치웠고 ^^
영화 한 번 같이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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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0.12.06 14:45:13 *.236.3.241
선이 느끼기에 말랑말랑한 소재를 잡으니
손과 혀가 말랑말랑해지는 느낌이다 ^^
영화를 키워드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도 있네~~
이야기를 편하게 할 때 장점은 서술의 대상뿐만 아니라 주변의 풍경이며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점인 것 같다.

마지막의 '이것이 우리가 따로 또 같이 영화를 즐기는 비법이다.'는 제목을
의식해서 쓴 문장인데 없으면 더 깔끔하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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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07:28:42 *.230.26.16
글도 말랑말랑해졌다는 뜻이죠? ^^
시작만이 아니라, 마지막 문장도 어려운 것 같아요.
더 읽어보고 고민하겠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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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12.07 00:58:18 *.129.207.200
첫문장이 다들 좋아졌네요. 점점 프로페셔널 느낌이 나는데요.

글을 읽으면서, 제 와이프와 영화 취향을 생각해보았어요. 제 아내는 최강희 나오는 영화를 좋아하더군요. 
그래서, '달콤 쌉싸름한.........' 연애할 때 보았습니다. 저는 재미 없더군요. 저는 드라마가 강한 영화가 좋아요. 

그래서, 부당거래도 재미있게 보았답니다. 한석규 김혜수 나오는 것 재미있다고 하던데, 
와이프랑 영화 본지도 꽤 되었네요.  

누님 글을 읽으면, 부부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요. 잊고 있었던, 설레임, 소중함 다시 꺼내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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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7 07:00:24 *.230.26.16
와우!
인건아, 최고의 찬사인걸^^
너에게 그런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면 정말 기쁘다.
고마워, 더 열심히 써볼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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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2010.12.07 11:04:34 *.203.200.146
지난번 "남편을 고르는 세 가지 조건" 이후로 언니에게 참 어울리는 주제를 골랐다는 생각이 계속들어요.
남편과 친구처럼 지내고픈 결혼을 앞둔 과년한 처자의 한 사람으로 저자의 경험에서 나오는 솔직한 이야기들이 쏙쏙 공감이 되어 다가옵니다.
결혼전의 환상과 결혼후의 현실을 언니 특유의 '조화'라는 키워드로 균형있게 전달해주실 것이라 믿어요.
언니의 이야기가 정답일 수는 없겠지만 많이 참고가 될꺼에요.
아직 남은 많은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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