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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9일 12시 06분 등록

응애 44 - 지상에 숟가락 하나

그날도 오늘처럼 바람이 세차게 불고 몹시 추웠다. 시내에 나갈 때마다 들르는 서점이 있다. 시집을 몇 권 사고 나오려는데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다. 표지엔 꿀벌 한 마리가 무심히 날고 있다. 책을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살아서 박복했던 아버지는 그래도 죽음만큼은 유순하게 길들일 줄 알았나보다. 이렇다 할 병색도 없이 갑자기 식욕을 잃더니 보름 만에 숟갈을 아주 놓아버린 것이었다.

현기영의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이렇게 시작된다. 죽음을 주제로 첫 책을 준비하고 있는 나는 선생님께 벌써부터 죽음전문 작가로 불리우고 있다. 죽음 전문작가 - 가장 가까운 미래의 네이밍이다. 내명함이다. 그래서 죽음이란 단어가 눈에 띄면 곧바로 멈추어서서 몰입한다. 한 페이지를 넘겼다.

가쁜 숨 속엔 신음 소리가 낮게 실려 있었지만 당신의 얼굴은 평온했다. 낮은 신음 소리는 마치 모닥불이 꺼지면서 재가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 읽어야 할 책이 산처럼 쌓였는데... 이 책을 또 사들고 들어가면......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금 더 읽어내려갔다.

그러므로 부친의 영전에서 맏상제로서 내가 흘린 눈물 속에는 필경 자신의 죽음을 미리 보아버린 자의 두려움과 슬픔도 함께 있었을 것이다. 이제 아버지가 가셨으니, 다음은 내차례로구나, 하는 각성이 나의 폐부를 아프게 찔렀던 것이다. 탄생은 우연일지라도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이라는 것.

그렇게 3장 반을 읽었다. 더 망설일 것 없이 책을 들고 나왔다. 궁금해서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버스 맨 앞좌석에 앉아 계속 책에 몰입했다. 주말 저녁이어서 차가 엄청나게 밀렸지만 나는 한강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 이 새로운 사람을 읽어나갔다.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이미 58세에 이르른 작가가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라산이 나오고 제주바다가 나오고 용두암이 나오고 봄 들판과 똥 돼지가 다 나온다. 오늘 저녁 눈앞에 마무리해야 할 일을 두고도 이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계속 읽었다. 바람처럼 잠시 왔다가 바람처럼 다시 사라져버리는 아버지, 가난하지만 자식사랑 지극하고 성실한 어머니, 일이 인생의 최우선인 할머니, 엄격한 할아버지 , 부드럽고 따뜻한 외할머니 할아버지....그리고 해방과 전쟁과 4.3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 그 험하던 세월....

작가가 하나씩 하나씩 풀어놓는 이야기는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왔다. 사실 작가의 고향인 제주 땅을 나는 자주 다녔다. 이국적인 풍광을 지닌 나무와 바다가 좋아서 나중에 더 자유로워지면 들어가서 살고 싶은 곳의 하나였다. 더구나 제주 올레가 만들어지고부터는 코스 12까지 다 걸어보았으니 나도 제주에 대하여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어림없는 얘기다. 작가가 태어나는 것과 코흘리기 시작하고 개구쟁이 유년시절과 사춘기를 모두 지켜본 제주의 산과 들이 작가에게 보여준 것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사람들만이 그를 키운 것이 아니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어미의 젖은 생후 몇 개월 만에 뗐지만, 그대신 그는 자연에 젖줄을 대고 성장한 셈이란다. 정말 그의 심신의 성분 구조속에는 자연속의 숱한 사물들과 풍광들이 용해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 심신에 변화가 생겨 자주 고향을 돌아보고 종종 방심 상태에 빠져들어 지나온 날을 더듬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이 글을 쓴 목적이 잊혀진 어린 시절을 글속에서 다시한번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오직 기억에 남아있는 시간만이 진정으로 살아있는 과거이므로. 가끔은 잊혀진 과거로부터 기적처럼 다시 태어나는 순간들이 있다. 글을 쓰는 행위가 무의식의 지층을 쪼는 곡괭이질과 다름없는데 그 곡괭이 끝에 과거의 생생한 파편이 걸려들 때마다, 마치 그 순간을 다시한번 사는 것 같은 희열을 느낀다.

작가의 가슴에는  바람처럼 드나들던 아버지에 대한 느낌과 에피소드가 별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아버지가 인천에 또 다른 어머니를 만나 함께 살림을 차린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진짜 어머니는 남편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었는데..남부끄러워 어떻게 낯 내놓고 사느냐고 그 사실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웃에 하소연하기는커녕 큰소리로 울지도 못하고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치욕에 떨며 생가슴을 앓았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닮은 아들의 얼굴이 미워 아들에게 쓰디쓴 비꼼과 빈정거림을 한동안 퍼부어댔다.

이 아픈 상처를 어머니와 공유하면서 그는 인천에 있는 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과장과 거짓말도 섞고 위협과 공갈과 감상도 섞어서 써보냈다. 무심 무정한 아버지를 감동시키기 위해 그는 사실의 나열보다 사실인 것처럼 꾸며대는 픽션이 더 감동적이라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렇게 아무 분수를 모르고 한 일이 승산없는 싸움의 시작, 글쓰기 인생의 시작이었다고 작가는 회상하고 있다. 그는 그렇게 부재중의 아버지에게 7년 가까이 이런 편지쓰기를 계속했다. 그리고 아버지에 관한 글로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무정한 아버지의 일탈이 오늘날 그를 작가로 우뚝서게 하다니 글에게도 분명 그 운명이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기 시작한 글은 그의 고향을 말하고 그가 겪은 엄청난 현대사의 굴곡을 말하고 글로 고난을 겪고 다시 글로 그 명예를 회복했다. 이 책은 텔레비젼 방송을 타고나가 무려 47 만 부가 팔려나갔다. 죽음이란 단어를 통해 우연히 만난 지상의 숟가락하나는 이제 내 손에도 닿아 주말부터 계속 다듬어지다가 이제 게시판에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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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12.09 14:57:06 *.108.81.47
좌샘!  글 좋네요.
짧은 글은 너무 좋은데 연결을 어려워 하시네요.
이번 송년회 때 경매에서 제 도네이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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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12.09 17:28:26 *.67.223.154
한샘, 박 터질텐데..... 그 도네이션 표 1장....
경쟁에 약해빠져시리.......우짜지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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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따라흐르는 강순례자
2010.12.09 18:22:56 *.98.218.93

샘 글이..
 어린날 의 장소들을 한 번 찾아가보면 마른 낙엽처럼 비어져 버린
기억과 감성의 입맥에 물이 들수 있으려나 떠올리게 합니다.
시절이 그러는지 마른 젖을 일찍 뗀 아이처럼 헛헛함이 드는 저녁이네요.

소멸의 명확함이 오히려 '지금'에 불을 지피게하는 불쏘시개가 되도록 힘을 내어봐야 할것인데요..
요즘들어서는.. 인생은 해석. 인것같기도 합니다.

메일 드리려고 했는데.. 꽃 본김에 화전부쳐야 겠네요.
송년인사 드립니다 emoticon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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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0.12.09 20:32:06 *.67.223.154
잘 지내고 계시나요?
눈꽃으로 눈꽃전을 부치시려고요?

강물을 따라 걷다보면 ...참 , 그때 땡볕아래 파헤쳐진 조국의 강토에 속상했던 때가 생각나요.
이젠 눈으로만  세상사 어지러움을  바라보고 있지요.

길상호 시인의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를 구해놨는데요.
와서 사인해 달라고 졸라볼까요? ㅎㅎㅎ 
두분 신세 많이졌는데.... 지난 여름엔......  얼굴 한번 보고싶군요. 강순례자님.

참 , 곧 발표날텐데..... 준비 잘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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