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범해 좌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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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애 45 - 크리스마스 카드
적막강산. 홀로 걷는다. 고독은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눈꽃이 휘날린다. 앞만 보고 걷는다. 늘 가고 오던 이 길, 함께 걷던 그 길 위를 이젠 내가 홀로 걷고 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나를 기다려주마던 그는 이제 나를 잊었다. 잊혀진 내가 그를 기다린다. 나지막하고 정감이 넘치던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불러주던 그 날, 그 시간들이 그립다. 그때는 얼마나 짧게 덧없이 가버릴 황홀인지 몰랐다. 늘 그렇게 깊은 울림으로 함께 있을 줄 알았다. 눈오는 겨울 날, 슬픔에 젖어 하염없이 걸었다.
종소리가 들린다. 빨간 코트가 지나간다. 흰 장갑도 보인다. 군밤 장수가 등장한다. 따뜻하다. 그 향기, 추억을 일깨운다. 꽁꽁 언 손에 건네주던 갓 구워낸 군밤 봉투, 나 하나 자기 하나, 아니 나 한입, 자기 두입.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눈에 젖어 봉지는 찢어지고 밤들은 제각각 길 위로 툴툴 흩어져 가버린다.
커피향이 진하다. 달콤한 케익이 유혹한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빨리 걸었다. 그를 닮은 사람이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다시 되돌아 가본다. 그가 내려주던 커피는 내 취향과 정확하게 맞았다. 그가 골라오는 케익은 내가 먹고 싶던 바로 그 맛과 향기를 갖추었다. 혼자 골라온 케익은 차디 차고 커피는 쓰디 쓰다.
건널목에 서 있다. 신호등이 바뀐다. 그대 잘 가오. 앞만 보고 걷는다.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 잘 가오. 처음 다가오는 버스에 훌쩍 뛰어올랐다. 앞만 보고 서있다. 차도 앞만 보고 달린다. 이제 뒤에 남는 것은 없다. 모두 앞만 보고 간다.
서점에 들렀다. “나는 사랑의 처형자가 되기 싫다.” 어빈 얄롬의 책이다. 오래전부터 갖고 싶었다. 열 개의 사랑이야기를 분석한 실존 심리 치료 이야기. 소설을 쓰고 싶어 했던 정신과 의사가 여행 중에 기록한 글이다. 사랑이 끝난 뒤에 사랑을 말하는 것은 간단하다. 쿨하다.
책속에 갇혀서 사흘을 보냈다. 발돋움을 해보았다. 그새 영혼도 함께 자랐으려나... 힘내라 강물을 응원하러 종강파티에 다녀왔다. 님을 위한 행진곡도 찟기는 가슴으로 불러본다. 그립다. 영웅의 그림자, 밟을 수가 없다. 다시 홀로 걸었다.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쓸쓸하다. 고독은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 이제는 그만, 크리스마스 카드 속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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