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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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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0일 00시 20분 등록

팔리아먼트 원의 진실

 

아저씨, 레종 레드 하나 주세요.

네가 피우기에 레종 레드는 좀 센데?

, 저 아니에요. 아빠 심부름왔어요.

계산대를 사이로 편의점 주인과 마주 한 아이가 궁금해져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어 봤다. 160센티를 조금 넘을 것 같은 키지만 변성기 전의 목소리에 구레나룻 자리에 아직 새순이 돋지 않은 얼굴이다.

레종 레드의 니코틴 함량은 0.55mg, 타르 함량은 5.5mg이다. 처음 시작할 땐 에쎄 순 정도가 괜찮겠다. 니코틴ㆍ타르 함량이 5분의1수준이거든.

그게 뭐에요?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로 아이는 귓속말을 하듯이 물었다.

그건 말야, 삶의 본질이라는 뜻의 에센스를 줄인 말이란다. 이탈리아어로는 삼인칭 여성 복수명사이기도 하지. 무슨 얘기냐면 쓴맛단맛 다 본 아저씨ㆍ아줌마들이라면 몰라도 네 싱싱한 폐가 바로 본질을 느끼기에는 이르다는 말이다. 알겠니.

주인은 미소를 머금고 동화책을 읽어주듯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어쩌면 당장 돌아올 새벽부터 몽정을 시작할지도 모르는 겉절이 성인은 앞뒤로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주인의 말을 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삼 초 동안 묵음으로 돌리더니 출입문을 열기 무섭게 건물 모퉁이 쪽으로 사라졌다. 형광등 빛을 반사하는 머리카락의 콘트라스트와 설익은 톤의 목소리로 봤을 때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했을까. 열 살을 갓 넘긴 아이에게 쓴맛이란 무엇일까. 그는 정말 아빠의 심부름을 왔을지도 모른다. 입 담배 첫날에 시가 연기를 제대로 넘겨 버린 경우처럼 아이는 분별없는 아빠 덕에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수도 있다.

뭐 드릴까요?

주인은 좀 전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한 표정으로 눈을 맞추며 물었다.

팔리아먼트 원 하나 주실래요.

필라멘트는 없고 팔리아먼트는 있는 거 어떻게 아셨나요?

?...

하하하, 필라멘트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필라멘트는 백열전구에 들어가는 금속선인데 가끔 혼동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단어 배울 때 고생한 기억이 있어서 발음은 정확히 압니다.

팔리아먼트 원이라는 이름 참 재미있지 않나요. 담배 이름이라는 걸 모르고 들으면 프랑스혁명 전의 고등법원을 가리키는 말 같잖아요.

편의점 아저씨와의 첫 만남은 그 정도로 마감됐다. 밤거리로 사라진 레종 레드, 필라멘트, 프랑스혁명 전의 고등법원. 습관화된 구매행위 중에 겪은 흔치 않은 경험이었는지 그날의 기억은 꽤 오래갔다. 그렇다고 해도 편의점 아저씨를 그때 그 장소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정도의 기억은 영영 펼쳐지지 않은 채 과거의 사진첩 속에 묻혔을 것이다. 

 

라오콘 혹은 몽상가

 

자라목을 하고 지하철 출구를 빠져 나와 사무실 방향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영하로 떨어진날씨에 바람 탓인지 앞서 가던 사람의 머리카락이 풀섶처럼 날렸다. 머리카락을 따라 가다가 가로등에 걸려진 전시회 광고에 시선이 걸렸다.

라오콘 : 고대 그리스 대표 조각전

일몰직전의 처연함을 연상시키는 11월 날씨 탓인지 자꾸 평소와는 다른 동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점심을 건너뛰고 덕수궁 미술관으로 향했다. 라오콘 군상은 1층에 전시되고 있었다. 4층부터 관람을 시작해 1층에 다다랐다. 11시 45. 5분을 마저 보고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회사까지는 10분 안에 도착할 요량을 세웠다. 관람객들에게 둘러싸인 라오콘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라오콘은 뱀에 옆구리를 물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플렛을 펼쳤다. BC 1세기경에 만들어진 라오콘 군상은 포도밭을 일구던 농부의 곡갱이 덕에 1,500년 만에 부활했다. 트로이의 마지막 신관 라오콘. 그는 트로이의 목마가 재앙이 될 것을 예감하고 목마의 배를 창으로 찔렀다가 여신 아테네의 미움을 사 바다뱀에 물려 죽은 주인공이다. 미술사가인 빙켈만은 라오콘에서 그리스 조각의 고요한 위대와 고귀한 단순을 발견하여 이 작품이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임을 입증했다. 다른 건 몰라도 라오콘의 꿈틀대는 근육과 갈비뼈와 복부 사이를 가로지르는 포물선이 영화 300의 모델이 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의 신체에서는 인간에 대한 그리스인의 꿈이 느껴졌다. 조각을 좀더 가까이서 보려고 몇 걸음을 옮기다가 그를 발견했다. 편의점 아저씨. 그는 조각에서 2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라오콘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2.42m 높이의 라오콘이 천정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눈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등을 돌린 연인에게 최후의 구애를 토해내는 듯한 그의 표정이라면 1만년 후에는 기적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멈춰라

마주 선 두 개의 조각상 중에 하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두 팔을 벌린 그의 모습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모세였다. 행위예술 같은 그 날의 장면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았다.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에 알았더라면…”

그의 혼잣말에서 혼신을 다한 섹스 후의 허탈감이 느껴졌다. 관람객들이 몰려 움직일 때마다 옷깃이 스쳤지만 그의 눈에는 라오콘과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출구 쪽으로 방향을 튼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고 조각상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은 퇴화한 날개로 땅에 의지해 살다가 수 백 년 전에 멸종된 도도새의 뒤뚱거림을 연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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