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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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린 머리와 마법화장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다양한 커풀룩과 둘만의 오로라로 한 눈에 정체를 알아볼 수 있다. 번잡하고 정신없는 공항에서도 그 행복하고 설레는 느낌은 꽤 멀리까지 퍼져나간다. 일행이나 비행기를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에, 틈틈이 그들의 모습을 쳐다보며 혼자서 이런저런 상상을 하는 것은 꽤 재미있는 일이다. 어떻게 만난 이들일까, 얼마나 사귀었을까, 서로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백인백색이라는 말이 딱 맞게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지만 그들이 꿈꾸는 미래는 모두 ‘행복’하나일 테지.
번잡함과 정신없음에 질려 많은 이들이 평생 한번만 해도 충분하다고 고개를 내젓는 것이 결혼식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혼여행은 즐거웠던 추억일 것이다. 물론 요즘은 결혼 전 여행이 그다지 새삼스럽지도 않아서 신혼여행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이 촌스러운 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혼여행은 ‘결혼’이라는 매듭으로 묶인 후 첫 동행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일이며, 미혼인 남녀에게는 하나의 환상으로 간직되어 있지 않을까.
부모님들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기로 결정하고 마치 소꿉장난처럼 전셋집과 살림살이를 준비한 우리였지만 신혼여행만큼은 제대로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아름다운 곳에서 의미 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일치했던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이곳저곳 돌아다니는데 전혀 취미가 없던 우리는, 첫날 이후 내내 가이드를 따돌리고 둘이서만 함께 보냈다. 연애를 오래해서 새로운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일상의 아무 의무도, 시간의 제약도 없이 그냥 서로를 쳐다보며 둘만이 함께 보낸 그 집중적인 시간동안 알게 된 것이 거의 연애 일 년만큼의 몫이었던 것 같았다. 마치 서로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로 만들어진 폭포 안에 손잡고 함께 들어가 있는 느낌이었다. 달랑 일주일의 결혼 휴가동안, 결혼식과 신혼여행, 그리고 양가 인사까지 우겨넣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아쉬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온 첫날부터 쏟아지는 ‘해야만 하는 일들’은 얼마나 많았는지. 이것이 바로 결혼의 현실이구나 실감이 났다. 여행의 피로가 가시기는커녕, 짐을 다 푸르기도 전에 우리는 회사에 각자 출근해야 했고 야근 또한 다시 시작되었다. 주말에는 인사드릴 곳과 행사는 얼마나 많은지. 결혼을 함과 동시에 우리는 부모님의 우산에서 벗어나 제 역할을 해야 하는 친척집단의 구성원이 된 것이다. 주변에서 전해지는 집들이의 부담은 또 어떻고. 정신없이 한 달, 두 달, 시간이 마구 지났다.
결혼을 한다는 것이 서로를 둘러싼 기존의 환경을 알아간다는 것, 그리고 새로운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익숙해질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차츰 알게 되었다. 또한 동시에 새로운 역할과 환경, 주변의 기대보다 백만 배 더 중요한 것이, 둘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 그리고 둘만의 환경과 역할을 정하고 만들어나가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마 좀 조급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일 년 정도 후 아기를 갖자고 계획했던 우리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임신과 육아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일단 아이를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 아주 긴 시간동안 아이가 모든 생활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선견지명이 그때 어떻게 생겼을까. 아이가 어떤 존재인지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말이다. 아무튼 천만다행으로 우리는 아이를 가지기 전, 둘만의 집중탐구시간이 다시 한 번 필요하다는 데에 기꺼이 합의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 칠 개월 만에 두 번째 여행을 떠났다. 함께 여름휴가를 보내길 바라던 주변의 은근한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둘만의 여행이었다.
비교적 휴가가 자유로웠던 그와 달리, 토요일도 4시까지 근무하던 내가 4일의 여름휴가와 일요일을 붙여 간신히 확보한 5일을 꽉꽉 채운 여행이었다. 나는 지금도 여행가방을 끌고 회사 앞에서 기다리던 그에게 달려가던 그 때의 느낌을 떠올릴 수 있다.
비행기를 타고 또 페리를 타고 찾아간 그곳은 완전 천국이었다. 멋모르고 보낸 신혼여행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시간과 의무에 쫓기던 힘든 몇 개월을 보낸 직후였기에 더 달콤한 휴식이었을 것이다. 몇 시간이고 함께 해변에 누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피로가 가시는 듯 했다. 이야기하다 졸다가를 반복하기도 했고 아이들처럼 뛰어 놀기도 했다. 아무래도 어색함과 서먹서먹함이 남아있던 신혼여행 때와는 또 다른 편안함이 있었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더 많은 이야기와 감정들이 새록새록 쏟아졌다. 연애와 결혼의 차이를 이미 겪고 나누는 이야기들은 더 현실적인 무게를 가지고 다가왔고 동시에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더 깊이 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페리를 함께 탔던 한국 분들은 신혼여행 온줄 알았다고 이구동성 이야기했지만 우리에게는 신혼여행보다 더 의미있었던 여행과 귀국이었다. 이번에는 에덴동산에서 내쫓긴 아담과 이브 같은 낯설은 느낌이 아니라, 우리를 기다리는 푸른 별 지구로 둘이서 손잡고 사뿐히 착지하는 우주 비행사의 기분이었달까. 우리는 그 행복한 마음으로 첫 아이를 기다릴 수 있었다.
우리의 결혼생활이 비교적 탄탄한 토대위에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이 두 번째 여행의 덕이 크지 않았나 생각한다.
삶에 대해, 아이에 대해, 미래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깊이 알 수 있는 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말하지 않은 것조차 추측할 수 있게 된 시작이었다. 무엇보다도 큰 의미는 서로 함께 하는 대화와 시간의 가치와 효과에 대해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둘만의 행복한 추억과 공감대로 어떤 부부나 겪을 수밖에 없는 힘든 시간을 버텨낼 든든한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주변을 보면 아이를 낳기 전 쌓아야 할 둘만의 공감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들도 의외로 많다. 아이가 엄청난 축복이요, 가정의 꽃임은 분명하지만 또한 부부에게는 아이를 통하지 않는 핫라인도 존재해야 한다. 나는 가족은 트라이앵글 같다고 생각한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의 연결선을 그리고 또 아이를 통해 또다시 새로운 연결선을 만드는 것.
마치 세 개의 꼭짓점을 가진 트라이앵글처럼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는 각각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서로를 하나로 이어주는 단단한 연결고리를 가질 때 가장 조화롭고 행복한 가족관계가 된다고 믿는다. 남편이 아내를 통하지 않는 아이들과의 선이 있어야하는 것은 물론이다. 어느 한 선이 끊어지지도, 좌우가 찌그러지지도 않은 균형 잡힌 삼각형이 일단 만들어지면 그 안에서 어지간한 어려움은 모두 녹아내린다. 그렇다면 서로가 서로를 위한 최고의 스폰서가 되는 것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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