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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일 14시 03분 등록

응애 46  - 2011년 1월 1일

1자 막대를 네 개나 붙이고 새해의 첫 칼럼을 시작한다.

어제, 2010년 12월 31일에는 새벽에 일어나 여의도 국회의사당 위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지켜보았다.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마치 번데기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는 과정처럼 천천히 고귀하게 진행되던 아침 해의 탄생. 고요히 솟아오른 동그라미 하나. 그 붉은 빛은 이내 황금빛으로 바뀌어 더 넓은 세상을 비추러 높이 솟아 멀어졌다.

오늘, 어제의 그림자를 간직하고 새벽 눈을 비비며 같은자리에 머물러 기다렸으나 오늘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왔다. 은빛 구름사이로 얼굴을 감추고 서서히 사방을 밝혀나갔다. 그것봐라. 어제의 태양은 어제처럼 떠올랐고,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오늘이다. 은회색 빛은 새벽을 지나며 곧 다시 밝은 햇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있다.

일상에 묻어둔 긴 사연들을 정리했다. 대부분 나의 삶의 흔적이던 종이들을 없애버렸다. 무슨 사연이 그리 많은지, 비록 그 순간들엔 절박했을지라도 세월과 함께 모두 떠내려 가버렸던 이야기들. 해마다 이 사연들을 꺼내놓고 연말연시를 바쁘게 보내느라 산사람에게 연하장 한장 보내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좀 다르게 살아보려고 한다.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박스들을 집 밖으로 내보냈다. 꼬꼬박들이 다 나가면 그때에는 내가 나갈 차례,  천천히  나가면 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다. 곧 낯선 곳에서 아침을 먹게 될 것이다. 나의 빔이 곧 쓰임이 될 터이니 올해의 화두는 當無有用이다.

오래 전에 새해 첫날을 12조각으로 나누어 한해의 할 일을 기획한 적이 있었다. 설산에 빠져서 라인홀드 메쓰너의 <검은고독, 흰고독>을 숨을 죽여 가며 읽었다. 밥도 먹지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그와 함께 눈 덮인 산에서 보냈다. 그가 무서워서 울 때 함께 울었고 그가 희열에 들떴을 때 나도 따라갔다. 그리고 그해에는 산엘 무척 많이 다녔다. 그렇게 한 3년을 계속했다. 새해의 결심을 억지로 만들어낸 퍼즐로는 결과가 성에 차지 않아서 그만 끝냈다.

어느 해에는 거룩한 사람이 되겠다고 송년미사를 시작으로 매일 미사에 도전했다. 비교적 이 프로젝트는 성향과 맞아들어 한결 거룩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나의 운명은 항상 제일 좋은 순간에 나를 불러 거친 들판으로 다시 나아가게 했다. 나는 항의도 하지 않고 주어진 역할을 따랐다. 이사보따리에 거룩함도 함께 싸서 선반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힘든 일들을 처연하게 겪어 나갔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모든 사건들은 내 영혼의 밭을 갈아  말랑 말랑해진 땅 위에 좋은 씨앗을 움틔우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던 것 같다.

이제부터 다시 새 종이 위에 새해를 축하하는 인사를 써보낸다.

올해는 모든 작은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고, 또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이 그러하면 이미 우주는 그 마음을 읽어 나의 인연을 만들어 줄 것이다. 어쩐지 그런 믿음이 저절로 떠오르는 이 좋은 날에  컬럼에 눈길 닿은 모든 분들께도 올 한해 좋은 운이 함께 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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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날
2011.01.02 13:09:18 *.175.105.156


같은 날이고 또 다른날 인데.. 오늘 밖에 없는 날 .. 인 새해 주시는 복된 기원 감사히 받았습니당^^emoticon

샘께도 .. 원하시는 대로 나누고 이루시는 한 해 이시기를 기원드립니당.

쓰신 화두는 '" 비우면 쓰여진다.."   "비움으로 쓴다 "... 뭐 그런뜻인감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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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
2011.01.02 19:06:08 *.67.223.154
2011년 첫번째 애독자  같은날님
반가워요.
당무유용.... "빈그릇에 담아갈 것 있다" 고 나는 생각합니다.  ㅎㅎ
노자도 올해에는 내 빈그릇에 담기기를 기대합니다.

좋은 날 좋은 만남에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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