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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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다시 만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회사에 입사한 후, 영화 번역을 하던 대학동기와 함께 영화를 보러 다니던 때가 있었다. 막 개봉한 상업영화뿐만 아니라, 친구가 같이 가자던 예술영화도 몇 편 보곤 했다. 동아리 선배이긴 했지만 개인적 친분은 그다지 없었던 신랑을 다시 만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어느 토요일 밤새 연속으로 영화를 상영하는 행사가 있다고 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직장생활에 휘둘리던 나는 밤 새워 영화를 볼 정도의 진지한 관심은 물론 체력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어떤 종류의 영화인지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고 그러겠다고 흔쾌히 승낙을 했다. 늦은 밤 친구와 만난 대학로에는 그도 함께 있었다. 몇몇 연락을 했는데 나온 사람은 둘뿐이었다나. 우리 셋은 간단히 요기를 하고 밤 열두시부터 시작되는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세상에, 내가 돈 받고도 결코 보지 않는 공포영화 시리즈였던 것이다. 스멀스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공포와 축축하고도 찜찜한 분위기. 지금도 첫 영화 제목이 기억난다. <킹덤>...
이미 마지막 전철이 끝난 지 오래인 터라, 간을 졸이면서 졸지도 못하고 내리 세편의 공포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영화관을 나설 때는 졸음과 긴장, 추위까지 비몽사몽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물론 나 빼고 두 명은 열심히 따끈따끈한 영화 얘기를 하고 있었다. 포장마차에서 뜨거운 어묵을 먹고 어스름한 새벽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며, 난 내가 잠시 미쳤었지 생각했다.
그것이 우리 만남과 연애의 시작이었다. 가난한 복학생과 세상물정 모르는 직장 신출내기의 연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돈도 시간도 없던 우리가 가장 쉽게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영화구경이었다. 막 문을 열었던 동서울 CGV에서 영화 한 편 보고 간단히 저녁을 먹고 우리 집까지 함께 지하철을 타고오던 평범한 데이트가 대부분이었다. 나는 사실 어떤 영화를 보는가보다는 그를 만난다는 사실에 더 설레곤 했다.
연애시절 개봉작을 거의 다 볼만큼 함께 영화를 보았지만 그와 나의 영화 취향이 정말 다르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결혼 후 한참이 지나서였다.
우리는 둘 다 재미있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추구하는 재미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로맨틱물이다. 거기에 코미디가 더해진 것도 물론 좋고. 알고 보니 신랑은 그런 영화를 보면서는 거의 졸았다. 그동안 어떻게 따라 다녔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아마 연애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결정적인 한 편은 일본영화 <간장선생>이었다. 습관처럼 그를 따라나섰다가 엄청나게 후회를 했던 그날, 다시는 좋아하지도 않는 영화를 보러 따라다니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그날 우리는 기꺼이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암묵적인 합의에 도달한 것이다.
그 후 난 영화를 꼭 신랑과 보아야 한다는 관념에서 벗어나 비슷한 취향의 친구나 직장동료와 맘 편하게 좋아하는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한번은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던 제인 오스틴 원작의 <센스 앤 센스빌리티>를 TV에서 상영했다. 물론 나는 열심히 다시 보았고 잠시 함께 보던 신랑은 신기한 듯 나를 몇 번 쳐다보다가 이해하기를 포기했던 적도 있다. 물론 아기를 낳고 난 후 꽤 오랫동안 취향과 상관없이 영화구경 자체가 꿈같은 사치였지만 다행히 암흑시대는 이제 점차 끝나간다.
십년이 넘어도 그는 별로 바뀌지 않았고 나 또한 변하지 않았다. BBC에서 방영했던 <오만과 편견>4부작 DVD는 여전히 나만의 추억이 깃든 보물이요, 그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다.
그러나 한편 이제는 함께 영화를 봤다하면 백전백승이다. 영화 제목과 감독과 배우를 보고, 대략의 영화평을 읽어보면, 우리가 이 영화를 꼭 같이 볼 것인지, 아님 각자 알아서 할 것인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가장 최근의 성공작은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이다.
요즘도 그의 컴퓨터가 밤새 돌아간다 싶으면 영화를 다운받는 중이다. 영화 한편을 보며 주말의 늦은 밤을 온몸으로 즐기는 그와 함께 하면서 나는 내가 영상보다는 활자를 더 좋아하고 즐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기꺼이 나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했다.
주말 저녁 후다닥 집안일을 끝내고 아이들이 평화롭게 잠들면 그때부터 우리의 시간이 된다. 얼음 몇 조각 넣어 거품이 올라오는 맥주나 이름모를 와인을 준비하는 것은 그의 몫이다. 나는 얼른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칩과 오징어채, 그가 좋아하는 아몬드와 치즈를 챙긴다. 거실의 넓은 테이블에 앉아 가볍게 건배를 한 번 한 후,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 빠져든다. 그는 이어폰을 끼고 골라놓은 영화를 보고 나는 옆에 앉아 읽던 책을 집어든다.
책 속의 세상에서 헤매다 문득 바라본 몰두한 옆모습이 멋있다. 괜히 그를 건드려도 보고 그의 영화도 훔쳐본다. 때로는 그렇게 훔쳐보던 영화에 나도 푹 빠지는 일도 있다. 기꺼이 처음으로 영화를 돌려주며 줄거리와 배경이야기를 해주는 그 사람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를 보며 우리는 먼 미국의 의료보험에 대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가끔은 무언가 마음에 안드는지 보던 영화를 끄고 투덜거리는 그와 내가 읽는 책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물론 한창 재미있는 대목일 때는 말도 못 붙이게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도 잠깐 책읽기를 멈추고 그와 생각과 감동을 기꺼이 함께하고 싶다.
이렇게 우리는 때로는 같이 때로는 따로 각자의 취미생활을 즐기며 우리만의 작은 주말의식을 만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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