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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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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4일 18시 53분 등록

소근대던 아주머이들의 목소리가 추임새를 받자 갈수록 커진다. 그만 좀 하지. 관아에서 알고 있다면 오늘이라도 우리집에 들이닥칠 수 있다. 언년이 고 년이 바람을 넣지만 않았어도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놓지는 않았을텐데.

 

멀리 황포 돛배 두 척에서 새우젓을 부지런히 실어내리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주변으로는 주막과 난전들을 점령한 상춘객들이 거나하게 오후 나절을 즐기고 있었다. 강나루 위로 유유히 흐르는 새털구름을 보고 있자니 울컥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저 거 봐요.

 

순식이 엄니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포승줄에 묶인 예닐곱 명이 일렬로 나루터로 끌려오고 있었다. 나루터 쪽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 얼굴들을 뜯어봤다. 이 생원 아니요. 저건 개똥이넨데. 언년이는 웬일이지. 죄인들을 마포나루로 데리고 온 걸로 봐서는 배에 태워 의금부로 압송할 모양이다. 일행들은 후닥닥 짐을 챙겨 나루터로 달려가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집에 있었다면 나도 저 신세가 됐을 거다. 엄니의 펑퍼짐한 뒷태가 점점 멀어진다. 엄니 미안해요. 곧 돌아올게. 금방 돌아올게.

 

걸음을 돌려 마을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삼사 리를 뛰었을까. 사람들의 행렬이 잦아들고 복사꽃밭이 펼쳐졌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면 어디라도 좋다. 온몸이 발산해서 복사꽃 향기 속으로 숨어들었으면. 다행히도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과거는 문을 닫았고 미래는 오리무중이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바위틈에 숨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생각의 꼬리를 잡으려 미간에 힘을 모았다. 그래. 강 건너 셋째 언니한테 가자. 며칠은 머물 수 있을 거다. 해가 뜨기 전에 나룻배를 구해 강을 건너는 거다. 인적이 끊긴 주변은 달빛도 별빛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이다. 짚신에 밟히는 땅의 감촉과 발바닥을 누르는 돌멩이의 묵직함을 이정표 삼아 길을 찾아 천천히 걸음을 뗐다. 세상에 오직 나만이 살고 있는 듯 거친 숨소리가 귓속으로 빨려 들었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송글송글 맺힌 땀이 이마에서 떨어져 인중을 타고 흘렀다. 아부지, 엄니는 어찌 되었을까. 당사자가 아니니까 괜찮겠지. 자식 건사 못한 죄를 물어 물볼기라도 맞을까. 나라에서는 천주님을 왜 그렇게 미워할까. 천주님은 아부지 엄니 보다 푸근하다. 계집애라고 구박하지도 상것이라고 홀대하지도 않는다. 할머이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부지가 술 먹은 날은 집 공기가 말이 아니었다. 우리집 세간은 성한 게 별로 없다. 밥상 다리는 부러져 흥부네 제비새끼처럼 광목으로 얼레설레 묶어 놨고, 깨지거나 이가 나가지 않은 그릇이 없다. 그나마 할머이가 돌아가시고 아부지 성격이 한풀 꺾였다. 아부지는 할머이 성격을 꼭 빼 닮았다. 할머이는 몇 개 남지 않은 이로 밥이든 사람이든 조곤조곤 씹는 게 취미였다. 아침상을 받아 놓고 밥이 왜 이리 설게 됐냐로 시작해서 계집년들이 조신하지 못하게 밥을 먹는다는 둥 애미가 복이 없으니 집안이 요모양이라는 데까지 가면 아부지가 일단 숟가락을 놓는다. 이 때 아부지랑 눈이 마주쳤다가는 경을 치기 일쑤다. 식구들이 쥐구멍 찾듯이 밥상머리를 겨누고 있으면, 울화통을 참지 못한 아부지는 문지방에 걸려 덜거덕거리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아들 자식 하나 낳지 못한 죄로 평생 엄니를 구박하던 할머이는 이태 전 꿈에 돌아가신 할아부지가 자꾸 치마자락을 잡아당긴다고 하더니 얼마 안 가 새벽녘에 할아부지에게 갔다. 지지리 볶아대던 할머이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자 엄니에게 툇마루를 지키는 버릇이 생겼다. 멍한 표정이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강아지 복실이를 닮기도 했고, 사립문을 열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저승사자를 맞이하는 눈빛 같기도 했다. 툇마루에 앉아 병든 닭 마냥 사립문을 지키던 엄니는 달포 만에 화색을 되찾았다. 그리곤 시간만 되면 동네 아주머이들과 이곳 저곳을 쏘다녔다. 나 건드리면 죽어버릴랑게. 엄니의 기세에 한번 눌리고 난 후에는 아부지도 엄니를 어찌하지 못했다.

 

분례야, 분례 맞지.

...누구세요

 

두 시간 가량을 걸었을까. 나루터가 육안에 들어와 마음을 놓는 순간, 뒤쪽 소나무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 왕 신부야. 검은 형체가 허리를 굽히고 살금살금 걸어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가 되어서야 땀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튀어나온 똥배가 저고리 사이로 튀어나와 어수룩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제법 조선인 티가 났다.

 

신부님, 무사하셨네요. 어떻게 빠져나오셨어요?

얘기하자면 길다. 삐에르 신부님도 와 계셔.

 

삐에르 신부는 나룻배에 올라 있었다. 물결에 부딪혀 나룻배의 노가 삐걱거렸다. 규칙적인 노의 움직임을 따라 그의 상체가 미세하게 좌우로 진동했다. 등 너머로 그가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침묵의 칼과 어둠의 방패로 무장한 채 아침에 한 발 앞서 나루터를 점령한 두려움을 진압한 듯 했다. 그에게서 흘러내린 두려움은 물결 위로 검은 등을 드러낸 채 어둠 너머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파더, 허리 업.”   

 

왕 신부의 채근에 물속에 잠긴 의식을 낚아채 듯 삐에르 신부가 눈을 떴다. 가는 입술에 번지던 미소는 이내 실바람에 사라졌다. 왕 신부가 노를 잡고, 삐에르 신부와 내가 고물에 앉았다. 어디로 가나요. 제물포까지 가면 상해 가는 배를 탈 수 있다. 여기를 떠나는 건가요. 조선땅 전체가 난리다. 식구들은무사할거다. 중국에 가서 소식을 알아 보자. 해 뜨기 전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가야겠구나.

 

배는 밤섬을 지나자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멀리 남산 쪽 인가에서 나온 불빛들이 반딧불이처럼 빛났다. 저 산 너머에 집이 있다. 한 방에 일곱 자매와 아부지 엄니와 할머이가 몸을 포개 겨울밤의 추위를 녹이던 우리집이 있다. 내가 이 강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갈 날이 있을까. 내 나이 스물 둘. 내가 아는 세상은 엄니가 소리쳐 부르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 술 취한 아부지를 피해 맨 발로 뛰쳐나왔다가 방안의 등잔불이 꺼진 걸 지켜볼 수 있는 거리가 전부였다. 하루 만에 바다를 건너 중국이라니. 이 모든 게 꿈이라면. 꿈이었으면. 아무도 말해 준 사람은 없지만 나는 스물 두 살의 봄이 더 이상 어제 같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단내 나게 뛰놀던 골목과 이웃집 언년이의 투박한 웃음과 할머이가 남긴 골방내가 이제는 뒤척이던 끝에 만나는 악몽으로 돌변할 지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IP *.236.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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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1.01.14 19:10:49 *.10.44.47
오빠. 재미있어요.
글을 끌어가시는 솜씨에서 프로페셔널의 향기가 납니다.
저기 스물두살짜리 처자랑 나폴레옹이 어떻게 연결될지
흥미진진해집니다.  ^^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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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1.01.17 12:05:35 *.30.254.21
마치
대하사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
방송국 PD 나 작가의 향기가....ㅎㅎ

쉽게 쓴 글은 아니련만
쉽게 읽히니 이 얼마나 좋은가!
도대체 나폴레옹과  천주님의 연결을
어떻게 구상하고 이어가려는지..궁금..

소설의 연재 형식을 직접 보는 나로서는
그저 신기할 뿐......화이팅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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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7 18:11:37 *.230.26.16
와, 진짜 잼있어요!
마구 뒷편을 기다리게 합니당!
담, 담 편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요?
근데 연재소설은 기다리기 넘 힘들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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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
2011.01.19 11:44:19 *.30.17.30
어디로 튈지 몰라 더욱 흥미롭네요.
오빠의 그 상상력의 끝은 어디인가요? 
어찌 이런 내용이...신기합니다.
재미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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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26 09:52:04 *.60.18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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