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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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에서 만난 인연
지난 해 초부터 인연을 맺은 시인이 한 사람 있다. 오래전부터 지역에서 활동해 온 그는 몇 해 전까지 모악산 자락에 기대어 살다가 지금은 경남 하동의 햇볕이 좋은 지리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따금씩 KBS FM ‘세상의 모든 음악’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는 그의 시를 들으면서 가까이 그를 한 번 만나고 싶었다. 늘 멀리서만 봐 왔던 사람이었으니까.
2008년 2월 16일. 전주 코아리베라 호텔 리셉션자리에서 김익수 교수님의 정년퇴임식이 열렸다. 멀리 학회활동을 함께 하셨던 지인들이며, 선생님이 몸담고 계셨던 전북대학교의 원로교수님들 그리고 그 동안 선생님을 도와 함께 같은 길을 걸어왔던 제자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였다. 오래 된 흑백사진들이 음악과 함께 영상으로 돌아갔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시절, 선생님에게 은사이자 선생님을 어류학자의 길로 이끌었던 故 최기철 교수님과 함께 한 대학원 시절. 아마도 채집 중이었나 보다. 양복을 입고도 바지를 걷어 올린 최교수님이나 은사님 옆에 조심스레 서서 모자를 얹어 쓰고, 역시 바지를 걷어 올린 제자의 깡마른 모습이나 고집스러운 학자들의 모습이 묻어났다. 목포 정명여고에서 단아한 여고생들 사이에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총각선생님, 그다지 인기 있는 낭만적인 분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차라리 공군 장교로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더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그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 메시지를 남기라고 하길래, 주말에 <악양산방>으로 찾아 뵙겠다고 했는데 대답은 없고, 자꾸 또 메시지만 남기라고 한다. 답답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지인들을 통해 휴대폰 번호를 알아냈다. 문자를 넣었다. ‘회의중’이란다.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통화를 할 수 있었다. 4대강 반대 문화행사 때문에 남한강에 와 있단다. 순간 연락이 안 된다고 투덜대던 내가 머쓱해졌다. 남한강이라면, 여강 근처일테다. 한강 전체구간에서 인공제방이 되어 있지 않은 절경을 간직한 유일한 구간. 진작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다음 날 오후, 전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러 그에게 눈인사를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이 실수였다. 오십이 넘은 나이인데도, 그는 그의 시속에 살던 모습 그대로였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고 무엇보다 아이들 때문에 어수선한 것을 못견뎌라 했다.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사들고 갔던 시집에 인연을 남기고, 마당까지 따라 나서는 그를 두고 도망치듯 나왔다. 대문대신 심겨진 산수유가 노란 봄이었다.
여천, 선생님의 호는 如川(하천만 같아라)이었다. ‘인자와 진리를 찾아서’ 걸어 온 그의 여행길, 그 기행문을 뒤적이다가 낯익은 이름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는 다소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글쎄 그 양반이 내 큰 매형이라니까” 처음 알았다. ‘아- 그랬구나. 세상 참 좁구나.’ 시인 박남준, 그는 김익수 교수님의 처남이었다.
‘새벽강에 왔다네’
그로부터 문자가 왔다. 사랑니 때문에 고생을 하던 그가 마지막 치료를 핑계 삼아 보고 싶은 친구들을 찾아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새벽까지 ‘새벽강’에서 술을 마셨다. 두어 차례를 보고서도 아직도 서먹한 우리는 ‘인맥찾기놀이’를 했다. 고를 것도 없이 안주로 올라 온 분이 김익수 교수님이었다. 나나 그나 할 말이 많았기에. 우리는 따로 안주를 시키지 않고서도 그 긴 시간 내내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선생님이 그 자리에 안 계시길 참 다행이었다.
“우리 매형? 재미없잖아”
그의 첫 반응이었다. 문학을 한답시고 매일 술 담배에 쪄들어 살던 시인과 오로지 집과 학교와 교회를 오가는 것이 전부인 교수와의 삶에서 닮은 점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와서야 사모님과 강원도 여행을 그것도 1박2일 동안만을 다녀오신 선생님, 선생님은 그런 분이셨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내성적이면서도 다혈질인 막내 처남에게는 술 한잔 같이 하기도 어려운 분이셨을 테다. 1975년 선생님은 전북대학교에 전임강사로 부임을 해오셨고, 그런 매형의 집에서 4년을 얹혀 살면서도 대화 한 번을 나눠본 기억이 없다니. 굳이 누구의 책임을 따질 일도 아니지만, 참 남다른 매형-처남이다 싶다.
처남은 뜨거운 사람이었다. 학창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을 했고 스스로 <돈을 쓰지 않는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는 그는 시를 쓰고 있다. 지금은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아마도 억울하게 살아온 집안의 숨겨진 비밀도 한 몫을 했으리라.
매형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항상 성경읽기를 권했고 교회에 빠지지 않았다. 늘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과 사회에 봉사하며 살고 있는 그는 기도를 한다. 올해 초 선거를 앞두고 국회회관에서 4대강 사업과 관련한 토론회에서 허와 실을 밝혀 줄 하천생태전문가가 필요했다. 그 요청에도 매형은 세상 일 앞에 나서는 일에 매번 신중했다.
전혀 닮은 것 같지 않은 두 사람. 처남은 시를 쓰고, 매형은 기도를 하고. 처남은 욕을 하고, 매형은 감사를 하고. 처남은 술을 마시고, 매형은 그 입으로 복음을 전한다. 하지만 그들은 흰머리 희끗한 나이가 되어서 비로소 강에서 만났다. 서로가 다른 길을 걸어왔건만, 그들이 사랑했던 그 길에 지금껏 늘 함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지만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한 가족이었다.
지난 해 5월, 난데없는 ‘청계천 갈겨니’가 검색어의 순위를 달리고 있었다. ‘오마이뉴스’를 비롯해서 인터넷 이곳저곳에서 소란이 일었고, 6월에는 급기야 MBC, SBS, KBS가 그 사건의 진상을 다루었다. 문제의 발단은 서울시가 청계천에 살지도 않는 섬진강 수계 ‘갈겨니’를 방사하고서도 ‘생태하천 복원의 성과’라고 홍보한 데서 비롯되었다. 4대강 사업의 추진을 앞두고, 이명박 대통령의 자랑인 청계천은 그래서 늘 시비의 대상이 되어 왔던 것이다. 누구는 펌핑한 물대신 돈이 흐르는 하천이라 하고, 누구는 유래없는 사례라며 전국에 20여개의 사례를 더 만들어 가겠다고 한다. 강이 죽었으니 강을 살리자는 청와대의 소신과 사회적 상식은 그렇게 어긋나있었다. 결정적인 노교수의 인터뷰 한 마디가 서울시의 말문을 막고 말았다. 김익수 선생님이셨다.
그는 여천如川이었다. 그 매형에 그 처남.
그들은 나란히 강을 따라 걷고 있었다.
서로 다른 삶을 선택했지만, 결국 강에서 만났다.
아니 어쩌면 세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강을 따라 걷다
모든 그리운 것들은
결국 강물지어 흐른다
눈물처럼 흘러 든다
가까이 두고서도
떠나보내지도 않으시는 뜻은
미처 모르겠으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렇게 아픈데도
죽지 않게 하심은
오래 두고 쓰시려는
빚어 만드시려는
당신의 말씀
그 강을 따라
걷게 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