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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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 가면 그가 있다.
그가 전국 지속가능발전협의회의 사무처장을 할 때였다. 나는 <원주의제21>에서 전주천 사례를 발표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난생 처음 원주를 방문했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원주천을 둘러보고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먼 길이었다. 토론회 자리에는 전주천보다 좀 더 일찍 수원천 복개반대와 자연형하천으로 조성했던 사례발표를 하기 위해 염태영 처장님이 함께 했었다. 돌아오는 길에 수원까지 태워주겠다고 해서, 염처장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중간에 잠깐 들렀던 곳이 있었는데, 그가 나중에 은퇴해서 지낼 터를 마련해 둔 곳이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지금부터 한번 씩 들러두어야 나중에 동네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면서 오가는 길에 잠깐씩 들른다고 했다. 남자 나이 몇이 되면, 기대고 누울 땅이 보이냐고 물었더니 대략 마흔이 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했다. 나도 마흔이 넘으면 처장님처럼 노년을 지낼 땅을 알아보게 될까... 전국을 다녀야 하니 식사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면서 뒷자리에서 튀밥을 한 그릇 퍼서 권하기도 하고, 기름을 넣고 차계부를 꼼꼼히 적는 이유를 물으니, 나중에 업무활동비를 신청하려면 구체적인 근거가 있어야 할 거 같아서 그렇게 한단다.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 분인지가 참 궁금해지게 하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신팀장, 수원시장이 얼마나 매력적인 자리인줄 알아?”
수원에 도착해서 그의 사무실이 있는 경기도청에 들렀다. 그 때만해도 전국협의회 사무실이 경기도청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의제운동은 전통적으로 경기지역이 활성화되어있었고, 그런 기반을 가지고 성장하던 시절이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잘 정돈된 책장이 인상적이었다. 녹차를 한 잔하면서 그가 꺼낸 말이었다. 벌써 10년 정도 준비를 해왔다고 했다. 주변에 도와줄 사람들도 준비해가고 있고, 캠프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며칠 전 생일자리를 빌어 같이 식사하려고 보니 젊은 피가 스무 명 남짓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쉽게 들뜨지도 않았고, 담담하게 수원시장의 포부를 밝히는 그가 자신 있어 보여서 좋았다. 겸손한 척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절대 뻣뻣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호감가는 환한 미소에 나이보다 젊어 보였지만 분명 사람을 끄는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책장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게 아무 책이든 꼭 마음에 드는 책 한권만 가져가라고 했다. 사람의 생각을 읽으려면 그가 읽은 책들을 보라는 말처럼, 그저 그의 생각이 궁금했을 뿐이었는데.. 느닷없는 호의에 망설임 없이 ‘철암세상’을 꺼내 들었다. 구해서 보고 싶었던 책이었다.
수원역에서 기차 편으로 전주 내려오는 길 내내 그 생각을 했다. 수원의 미래.. 그랬던 그가 한 번의 낙선을 딛고, 지난 선거에서 마침내 수원 시장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그와의 인연도 참 길었다. 처음 그를 만난 것은 1999년 7월 대학로에 있던 <민들레영토>에서였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인연으로 알게 된 한 선배는 서울경기지역의 풀뿌리단체들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짐을 싸들고 올라온 나를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해주었다. 마침 <민들레영토>에서는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회의가 열렸고, 염태영 시장은 당시 <수원환경운동센터>를 대표해서 그 회의 자리에 참석했었다. 참관인 자격으로 두 시간 남짓 회의를 지켜보면서 그가 무슨 말들을 했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시종일관 합리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하고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시민사회단체 선배들에게서 흔치 않았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수원에서 수원천 복개를 반대하는 시민서명운동을 전개하여, 결국 수원시로 하여금 복개계획을 취소하고 오히려 복개된 구간마저도 복원하게 하였다는 것은 신문기사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 2002년 『제3회 지방의제21 전국대회』가 전주에서 열리게 되었고, 코아호텔에서 막 행사가 마무리되었을 때였다. 지인 한 분이 급히 나를 찾았다. 염태영 처장님이 강과 하천살리기 모범사례들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를 한 번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강과 하천을 살리는 단체들의 좋은 사례들을 찾아내어, 일본의 ‘수환경교류회’라는 곳과 정기적인 교류사업을 추진하려 한다는 이야기며 다섯 팀 정도를 선발해서 8월말쯤 있게 될 『제5회 일본 강의날대회』에 출전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들어보니 전주천 사례가 좋을 것 같은데, 꼭 도전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지금의 <강살리기네트워크>와의 인연이 되었고, 일본 강의날대회에서 전주천은 그랑프리인 ‘히로마쓰스다에 상’을 받게 되었다.
이제 그는 시장이 되었다. 꿈에 그리던 수원시장이 되었다. “전주의제21을 그만 두었다”는 말을 듣더니, 바로 수원으로 짐싸들고 오란다. 사람 욕심도 많은 사람이다. 생각해보니 그와의 인연도 벌써 11년이 넘어가고,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지금의 내 또래였다.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지금 내가 의식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어느 후배들이 또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와 내가 만났던 것처럼, 나와 또 어떤 그가 만나고, 같은 꿈을 꾸며, 같은 길을 걷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나도 어느 후배의 글에 담겨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 나는 어떤 사람으로 그려지게 될까. 후배들에게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게 될까.
“희망이 되는 도시! 모든 길이 통하는 도시! 염태영이 꿈꾸는 도시, 수원입니다.”
그의 자서전 ‘우리동네 느티나무’의 표지 글이다.
수원과 전주는 참 많이 닮았다. 역사... 문화.. 그와 나도 같은 길을 걸어왔다. 하천살리기.. 지방의제21... 나도 그처럼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내가 특별히 수원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다. 그는 내가 가는 길목마다 있었고,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세상에 알릴 기회를 주었다. 필요할 때가 되면 나타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었는데, 진짜로 알 수 없는 인연이었다.
희망이란 본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아서 원래는 길이 없었지만 걷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노신『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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