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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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새 하늘이 어두워진다. 입춘도 지나 날이 좀 풀리나 싶더니, 다시 변덕을 부린다. 꾸물거리던 날씨가 어깨 위를 짓누르기 시작하더니만, 배낭이 처지기 시작한다. 결국 등허리 아래쯤에서 주저앉고 만다. 온통 피가 쏠리고, 신경이 한 곳에 머문다. 또 시작이다. 짐을 내려두고 잠시 쉬어야 했다. 제법 큼지막해보이는 바위를 골라 걸터앉아 담배하나를 꺼내 물었다.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이제 그만 잊혀질만도 할텐데. 한참 시절 시위도중에 전경대에 쫓기다 방패로 찍힌 자리가 생각보다 깊었다. 잊을만 했다가도 이렇게 날씨가 지랄 맞으면, 어김없이 찾아오곤 한다. 반갑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우리에게 제일 무서웠던 건 담임선생님이 아니었다. 소사아저씨였다. 한쪽 다리가 불편했던 아저씨는 우리가 다니는 곳곳 어디에도 있었다. 온실의 묵은 화분을 내놓기도 했고, 리어커 구루마에 삽이며, 곡괭이 같은 것을 싣고 다니기도 했다. 그는 말이 없었고, 우리 중 누구도 그에게 말을 붙여 본 사람이 없었다. 해가 어둑해지고, 운동장에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면 그는 호루라기를 불었다. 바람 빠진 축구공 하나에 정신을 팔았던 우리는 앞을 다투어 교문 밖으로 밀려 나가야 했다. 그에게 붙잡히면 작살이 난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떠돌던 풍문이었다. 소풍을 가는 날 아침 비가 내리면, 운동장 대신 교실에 모였다. 누구 입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를 비밀이야기들이 나돌았다. 학교를 지을 때 땅을 파다가 삽을 길게 박아 넣었는데, 꿈틀하니 용의 허리를 찍었다는 것이다. 허리가 반쯤 잘린 용은 몸부림을 쳤지만 끝내 승천하지 못했고, 원한이 맺혀서 소풍날만 되면 울음을 울었다고 했다. 천둥과 번개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용이 흘린 눈물이 비가 되어 쏟아진다는 것이었다. 그 때 용의 허리를 찍었던 사람이 바로 소사아저씨였고, 절뚝거리는 다리도 그때 날카로운 용의 비늘에 다친 흔적일 것이라고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순신 장군 동상 밑을 파보면, 아이들의 주검이 묻혀 있고 비가 오는 날 밤 12시만 되면 귀신들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교장 선생님이 앉아 계신 의자 밑에도 시체가 있다고 했다. 이미 학교를 졸업한 어느 형이 어느 날 우연히 빨간 불빛 아래서 복도를 왔다갔다하던 그림자를 분명히 봤다고 했다.
광주에서 사람들이 죽었다고 했다. 얼굴이 뭉그러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시신들이 어디론가 트럭에 실려 갔다고 했다. 어느 저수지에서는 젖가슴이 도려진 채로 숨진 젊은 여자도 있었다고 했다. 언젠가는 대통령이 총 맞아 죽었다고 하더니만, 어른들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하듯, 아이들도 학교에 오면 매일매일 수근거렸다. 6학년이 되면서 수목원 청소를 맡게 되었다. 이따금씩 삽을 가지고 질경이 캐내는 일을 하던 친구들 몇이서 용기있는 제안을 했다. 이순신 동상 밑을 파보자는 것이었다. 말을 꺼냈지만 누가 해야 할 지는 쉽게 정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진짜로 죽은 아이의 손가락이라도 나오면 어떡해야 하나. 결국 가위 바위 보로 운명을 갈랐다. 두 명이 뽑혔다. 다행이었다. 나는 망을 보기로 했다. 그 절뚝걸음의 소사아저씨가 언제든 우리 뒤에서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 몇이서 긴 칼 옆에 차고 잔뜩 노려보던 이순신 동상 뒤로 사라졌다. 드디어 어설픈 삽질이 시작되는가 싶더니만 누군가 소리를 질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튀었다. 덩달아 나도 따라 뛰었다.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 때문에 더 심장이 벌렁거렸다.
어그적 거리는 걸음으로 그가 들어섰다.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가득 입에 문채 들어서는 그의 몸에서는 역겨운 냄새가 풍겼다. 모두들 코를 쥐어 싼 채로 달아났다. 오직 샌과 온천장의 주인 할머니만이 그를 맞는다. 가장 큰 탕으로 그가 안내되고, 불편한 몸뚱아리가 미끄러지듯 탕안으로 들어간다.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리고서야 반쯤 정신을 차린 센이 그의 몸에 깊게 박힌 가시를 찾아냈다. 단짝친구가 나서서 도와 보지만 둘로는 역부족이다. 식구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모든 온천장 식구들이 다 나서서 힘을 모았다. 드디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가시로 보였던 것은 누군가 타다 버린 자전거였고, 한번 뽑히기 시작하더니 온갖가지 쓰레기들이 줄줄이 뱉어져 나왔다. 그는 ‘오물신’이 아니었다. 이름을 잃어버린 것은 치이로만이 아니었다. 모든 이들의 도움으로 오물을 다 토해내고서야 그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센의 작은 두 손에 경단하나를 남기고, 온천장 대들보를 한 번 휘감더니만 긴 여운을 남긴 채 어둑해져오는 밤하늘로 사라져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투둑. 툭, 투우둑. 눈발대신 가는 빗방울이 재촉하고 나선다.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마지막으로 한 모금 더 빨았다. 길게 바람을 따라 허공으로 흩어져 가는 푸른 연기를 따르던 눈길을 거두고선, 툴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서둘러야 했다. 벌써 계곡 골짜기를 따라 스물스물 어둠이 내리기 시작했다. 봉우리너머로 뿌연 산그림자를 드리우던 온기도 식어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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