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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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혹시 당신의 아이, 사랑한다면서 원수처럼?
1996년 3월 사범대학에 입학을 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의 ‘꿈이 교사였니?’라는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로 사범대생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사실 사범대가 목표가 아니라 단지 대학생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사범대생으로 3년을 지내는 동안 나는 내가 교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교사가 나와는 어울리지 않고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니 나는 자격이 없다며 온갖 핑계를 대면서 교사를 내 미래의 꿈으로 정해놓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꿈이 뭔지도 모른 채 대학교 3학년이 되었고 커리귤럼에 따라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문장들을 배웠다. 그 수많은 문장들 중 유종월(柳宗元)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을 읽은 그날의 전율이 아직도 생생하다.
“탁타의 직업은 나무 심는 일이었다. 무릇 장안의 모든 권력자와 부자들이 관상수觀賞樹를 돌보게 하거나, 또는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과수果樹를 돌보게 하려고 다투어 그를 불러 나무를 보살피게 하였다. 탁타가 심은 나무는 옮겨 심더라도 죽는 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잘 자라고 열매도 일찍 맺고 많이 열었다. 다른 식목자(植木者)들이 탁타의 나무 심는 법을 엿보고 그대로 흉내 내어도 탁타와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앉은 자리에서 이 짧은 글을 읽고 또 읽으며 몇 가지 생각이 들었다. 나무 심는 것에 빗대어 이렇게 명쾌하게 교육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던 옛사람의 글재주에 감탄했고, 내가 교사가 된다면 이런 교사가 되어야 하는 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특히 교사가 되겠다고 한 번도 마음을 먹은 적이 없었는데 자연스럽게 이런 교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신기했다. 아마도 난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몰라 두려웠던 모양이다. 곽탁타전을 읽으며 탁타의 ‘나무의 천성을 따라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라는 말처럼 ‘교사는 학생의 천성을 따라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 내가 가야할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끔씩 왜 교사가 되었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나의 선생님들을 떠올린다. 나의 성장의 시기에 적절한 지원을 해주시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고마웠던 그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기억에 남는 선생님하면 끔찍했던 학창시절의 기억중의 일부분으로 떠올리곤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는 각 시기마다 따뜻하게 이끌어주셨던 선생님에 대한 기억으로 나의 학창시절이 친구들과의 추억에 더해져 나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나의 선생님에 대한 첫 기억은 유치원시절부터이다. 어린 시절 나는 모든 것이 느린 아이였다. 말도 행동도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도 한글을 배우는 것까지도. 특히 부모님은 곧 초등학교 1학년이 될 첫 아이가 유치원에서 1년 동안 배운 한글을 12월이 되어서도 제대로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것에 적잖이 걱정을 하고 계셨다. 그런 여러모로 능력이 부족한 나에게 유치원 선생님께서 12월 크리스마스 기념 학예회를 하는데 2가지 역할을 맡겨주셨다. 하나는 솔로몬임금의 지혜에 대한 연극을 하는데 무대에서 왕의 옆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는 궁녀역할이었다. 당시 심하게 내성적이었던 나는 아이들과 함께 어울려 연극을 한다는 것도 사람들 앞에 나서서 오랫동안 무대 위에 있는 것 자체도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거기에다 선생님은 친구와 함께 2페이지 정도 분량의 옛날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역할도 맡기셨다. 선생님이 준 글을 감정을 실어서 읽으면 되는 것인데, 그 역할을 맡은 친구는 기뻐했지만 나는 두려움이 앞섰다.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두 번째 문제이고 한글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니 발표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나는 선생님에게 2가지 다 못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선생님은 2가지 모두 아직 시간이 많이 있으니 연습만하면 충분히 해낼 수 있다고 용기를 주셨다. 그리고 학예회까지 3주 동안 열심히 연습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해주셨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있던 학예회 발표날 나는 연극시간 내내 무대 위에서 꿋꿋하게 울지 않고 궁녀역할을 해냈고, 친구와 함께 반씩 나눠서 이야기를 발표했다. 지금도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내가 학예회 이후 한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글을 제대로 읽고 쓸 줄을 모르니 발표당일 읽어 내려가는 것이 불가능했던 나였다. 그래서 생각한 엄마의 특단의 조치는 이야기를 몽땅 외워서 발표하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가 불러주는 내용을 무작정 외웠다. 그러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발표문에 나오는 한글이 익숙해졌고 학예회 당일엔 힘들게 외웠던 것이 무색하게 손에 든 발표문이 술술 읽혀지는 것이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재주가 없다고 탓하지 않으시고 발표할 기회를 주시고 용기를 북돋아 주셨던 것이 나를 성장시켜주었다.
나의 선생님에 대한 두 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에 대한 것이다. 여전히 수줍음 많고 느릿했던 나는 1학년 때 아이들이 대부분 배우고 올라온 구구단외우기를 잘 못했다. 2학년에 올라오자마자 본 시험에서 당연히 성적이 좋지 않았고 나머지 공부를 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9단까지 외울 수 있을 때까지 방과후에 남아서 공부를 했고 5단까지 알았던 나는 몇 주 뒤 9단까지 술술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나머지 공부를 하는 동안 내가 구구단을 잘 모른다고 선생님이 나를 다그치거나 때리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남아서 공부를 하는 것이 부끄럽고 상처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구단을 외우는 내내 그날 공부할 분량을 마치면 칭찬해주셨고 9단을 모두 외우게 되자 선생님은 정말 잘했다며 업어주셨다. 나도 하면 되는 구나하는 생각과 선생님께 인정받았다는 것에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세 번째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시다. 항상 부모님 나이 또래이거나 그보다 더 많은 나이의 선생님들이 주로 담임선생님이었는데 이번엔 아주 젊고 예쁜 여자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친근하게 지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셨는데 지금까지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마니또 행사다. 그 행사는 1학기 동안 진행이 되었는데 그동안 특히 학교 다니는 것이 설레고 즐거웠다. 마니또를 뽑으면 자신의 마니또가 모르게 친구를 위해서 일정기간동안 선행을 베풀고 마니또를 발표하는 날에 친구를 위한 정성어린 선물과 편지를 준비해서 전해주는 것이었다. 마니또 기간 동안 나를 뽑은 친구가 누구일지 상상하면서 즐거워했고 내가 뽑은 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잘 해줄 수 있을까하며 친구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선생님을 나의 마니또로 뽑았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매달 시험을 보았는데 그 달에 내가 처음으로 1등을 했다. 선생님을 나에게 학교생활이 재미있다는 것과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셨다.
내 기억속의 4번째 선생님은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시다. 체육 선생님이셨던 담임선생님은 한눈에 보기에도 맞으면 정말 아플 것 같은 단단한 몽둥이 하나를 항상 들고 다니셨다. 우리반 아이들은 성적이 떨어지거나 친구들과 싸우거나 하면 항상 그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곤 했는데 나는 그 몽둥이로 맞아본 일이 거의 없다. 대신 지각생 전용 회초리인 야구방망이가 3학년 내내 매일 내 차지였다. 선생님은 기초 생활습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고 그것이 학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이셨다. 나는 학교에서 성실한 학생에 속했지만 문제는 학교에 오기까지였는데 3학년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지각을 했다. 3학년 생활지도 담당이셨던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뿐만 아니라 3학년 학생 중 지각생을 모두 관리하셨고 지각을 하면 예외 없이 야구방망이로 기본 3대를 맞았다. 나는 1년 내내 매일 등교와 함께 야구방망이 엉덩이 찜질 3대로 학교에서의 하루를 시작을 했다. 혹시 담임선생님이 여자라고 봐주셔서 살살 때리셨냐고? 여중이어서 모두 여자였고 사실 나도 맞을 때 마다 너무 아파서 내일은 절대 지각하지 말아야지 하며 다짐했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은 너무 맞는 것이 싫어서 복도에 계신 선생님이 다른 친구를 지도하는 사이 다른 반 교실로 몰래 들어가 베란다를 통해 살금살금 우리반 까지 숨어들어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1년 내내 맞는 것이 싫고 아파하면서도 한 번도 담임선생님이 지각 때문에 체벌하시는 것에 대해 원망을 한 적이 없다. 내 기억에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감정적으로 체벌을 하시지 않았다. 우리반과 학교에서 정한 규칙에 어긋나는 경우에 대해서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셨다. 연주는 아무리 가르쳐도 바뀌지 않는구나하며 포기하지 않고 1년 동안 나의 지각하는 버릇을 고쳐주시려는 진심어린 선생님의 마음이 전달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나는 비록 중학교 시절에는 지각대장이었지만 선생님덕분에 지각이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했고 고등학교에서는 지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특히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제일 일찍 등교하고 가장 늦게 하교하는 학생이 되었다.
내 기억속의 다섯 번째 선생님은 고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시다. 고3이 되었는데 1학기 첫날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는 순간 고등학교 마지막 1년이 고단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 담임선생님이 고2때 정말 싫어했던 과목인 물리담당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물리라는 과목이 너무 어려워서 맨 앞에 앉아 졸면서 수업듣기를 자체 거부하곤 했다. 물리 시간에 성실하지 않았던 학생으로 1년을 보냈기에 선생님에게 찍혔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기우였다. 담임선생님은 우리반 아이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계셨고 애정을 보여주셨다. 선생님이 수업이 비는 시간이면 종종 우리반이 수업받는 모습을 바라보고 계셨다. 잘못 생각하면 선생님이 우리를 감시한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우리반 아이들 대부분은 선생님의 우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받아들였다. 지금이야 일상처럼 하지만 벌써 15년 전에 우리반이 활동하는 모습을 비디오 영상으로 촬영을 해서 1년이 지났을 때 보여주시기도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반 아이들이 생일을 맞이하면 따로 교무실로 불러 책을 선물로 주셨던 일이다. 선생님은 그 아이와 어울리는 책을 고르시고 짧막한 글을 적어주셨는데, 아이들은 담임선생님이 이번엔 어떤 책을 골라오셨을까 어떤 글을 적어주셨을까 궁금해 햐며 교무실에 다녀온 생일인 친구를 둘러싸서 돌려보곤 했다. 나는 그때 이후 가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이 선물로 주신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사실 책의 내용보다 책의 마지막 장에 적어주신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힘을 얻곤 한다.
“ 연주야!
고달프고 힘이 들 때는 파란 하늘을 보렴.
푸른 하늘처럼 넓고 깊고
푸른 마음으로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 있으리라 믿는다.
95.8 서재정 ”
소극적이고 표현력이 부족했던 나는 선생님에게서 애정 어린 마음을 표현하여 상대방을 기쁘게 할 수 있음을 배웠고 교사가 된 이후로 선생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나의 아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다.
내 기억속의 마지막 선생님은 교생실습을 나가서 만난 교생담당 선생님이시다. 정착 사범대생으로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보내야했을 대학시절을 방황을 하면서 보내다 대학교 4학년이 되자 예비교사로 교생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나는 모교로 교생실습을 나가고 싶어서 출신고등학교에 신청을 했는데 다행히 흔쾌히 받아주셔서 4월 1달을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과 처음 초보교사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나를 잘 따라주어 즐겁게 생활을 했고 무엇보다 교생담당 선생님의 관심과 배려는 지금까지도 고마움으로 기억된다. 교생실습을 나간 첫날 처음 본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만나서 반갑다고 악수를 청하시며 ‘나는 선생님을 학생이 아니라 동지로 생각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 내가 마냥 어린 학생이 아니라 선생님의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이구나 인식하게 되었고 나를 동료로 인정해주는 선생님이 고마웠다. 다른 과목 교생실습생들도 많이 있어서 교무실 한 구석에 교생들을 위한 책상이 있었음에도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교무실이 조용해 공부하기 좋다며 1달동안의 교생실습 내내 나를 위해 자신의 옆자리에 책상과 의자를 마련해주시고 전공과목을 공부하도록 배려해주시고 교육과정해설서 특강도 해주셨다. 그리고 실습기간 동안 자주 나를 위해 동교과 선생님과 함께 회식자리를 마련해주셨는데 함께 교생실습 나온 동료들이 부러워하며 번번히 나를 따라 나서곤 했다. 흔히 사범대생은 교생실습을 계기로 교사의 길을 선택하거나 포기한다고 하는데 나는 전자의 경우다. 교생실습을 나가기 전까지는 교사의 길을 내가 가야한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교생실습을 하는 동안 담당했던 아이들과의 즐거운 추억과 교생담당 선생님의 관심과 배려 덕분에 교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동료 교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내 삶에서 즐겁고 재미있는 생활이 될 수 있겠다고 확신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내가 학창시절을 거치면서 만난 선생님들 덕분에 지금의 나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이 책을 쓰면서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모두들 내가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기다리며 지켜봐주셨다는 점이다. 선생님의 모습을 통해서 내가 느끼고 배우며 성장할 수 있었다. 나를 선생님들이 원하는 모습대로 디자인하고 싶어서 억지로 강요하고 몰아 쳤다면 오히려 어디론가 튕겨져 나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교직 생활 10년차기 되자 나를 위해 존재해 주셨던 선생님께 비로소 그 소중한 추억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나를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신 선생님들께 고마움을 전할 수 있을까? 문득 대학교 졸업을 하고 선생님께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는 메일보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답장에서 ‘연주야, 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다면 그것으로 선생님은 충분하니까 마음 쓰지 말아라.’라고 하셨다. 그래 맞다. 선생님의 발걸음을 따라 교사가 된 나이기에 좋은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다. 매학기가 새롭게 시작되면 담임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올해도 최선을 다해야지 하며 다짐을 하곤 한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과연 선생님들의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도록 교사로 최선을 다 했는가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을 무렵, 변화경영연구소의 6기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그 1년 동안 내가 10년 동안 만난 아이들을 떠올려 보는 작업을 했다. 나도 모르게 나의 아이들에게 내가 학창시절 선생님께 배운 것들을 자연스럽게 적용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유치원 선생님처럼 능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하는 아이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주려고 노력했고,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처럼 기초학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이른 아침이나 방과후에 보충수업을 해주며 공부를 못 한다고 다그치지 않고 작은 성과에도 칭찬을 해주려 노력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처럼 마니또를 비롯한 학급 행사를 통해 아이들에게 학교생활이 때로는 즐겁고 신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했고, 습관적으로 지각이나 결석을 하는 아이들에게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으며 기초생활습관이 삶을 더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임을 알게 하려고 계속해서 지도했으며, 때론 직접 준비한 케이크로 아이들의 생일을 챙기며 세상에 태어난 기쁨을 서로 축하하며 사랑은 함께 나눌 때 더욱 행복할 수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고, 아이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해서 키워야할 미완성의 존재가 아닌 이미 창조의 씨앗을 품고 있는 완전한 존재로 동등한 세상의 구성원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대해주려고 노력했다.
이제 내가 10년 동안 만난 평범한 듯 보이지만 창조의 씨앗을 품고 있던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자신에게 있는 창조의 씨앗을 인정하지 않고 발견하지 못해 아직 기다림을 견디는 아이들도 있고, 이미 창조의 씨앗을 찾아내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으려는 아이들도 있다. 그 아이들은 만난 나는 우리나라 공교육 속의 평범한 교사였지만 평범한 듯 보이는 아이들이 품고 있는 창조의 씨앗을 발견하면서 나도 창조적인 교사가 되어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아이들이 모두가 이미 갖고 있는 창조의 씨앗을 발견하는 것보다 그것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밀고 나와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든든한 지원과 적절한 조치를 해줄 삶의 멘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정기간 동안 아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보내 줄 수 있는 삶의 멘토가 필요하다.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아이들에게 그런 역할을 해줄 사람은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교사나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는 부모님이 적격이다. 그 둘이 함께 아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낸다면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든든한 힘이 실릴 것이다. 삶의 멘토는 아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아이들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다. 만약 삶의 멘토를 자처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아이들이 디자인되기를 바란다면 곽탁타의 말처럼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격이 될 수 도 있다. 선택과 실천은 온전히 아이들의 몫이고 우리가 믿음의 끈을 놓지만 않는다면 아이들은 자신의 본성에 부합하는 스스로가 선택한 길을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걸어갈 것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