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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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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7일 20시 28분 등록

우리 동네 담배가게 아저씨 나폴레옹

 

 

프롤로그 : 시간은 둑이 없는 강이다

 

나는 이고 싶다. 나는 흐르고 싶다. 영원은 새끼를 배어 열 달을 키우고 시간의 자궁을 통하여 물방울 하나로 세상에 내어 놓았다. 갓난 벌거숭이는 가볍고 허허로웠다. 깊은 산속 옹달샘에서 발원한 물방울은 한 떨기 나뭇잎처럼 계곡을 따라 흘렀다. 바위틈에 끼어 발을 구르는가 하면 평평한 ()을 만나 너른 원을 그리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발을 헛디딘 산짐승이, 한 차례의 미풍이 길을 재촉했다. 말하자면 그는흐르는 존재였다. 계곡을 지나자 드넓은 평야와 푸른 숲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지에 가려 보이지 않던 새털구름이 하늘에서 빛났다. 물방울은 더 많은 풍경들을 담으려 되도록 느릿느릿 흘렀다. 풍경은 자신을 오리고 자르고 이어 붙이며 변신과 복제를 거듭했다. 물방울은 이윽고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자맥질을 했다. 숨을 놓치는 일이 당연지사가 되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허나 더 힘든 건 둑이 없는 강에서 그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는 시간에 원망을 돌리곤 한다. 좀 더 많은 젊음과 좀 더 많은 시행착오가 허락되었다면 우리의 오늘은 이렇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육체의 사랑으로 태어난 남녀 한 쌍을 골라 우리가 가장 바라는 낙원의 조건을 그들에게 부여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不滅(불멸)이다. 그들 중 한 명은 익히 알려진 저명인사이며, 다른 한 명은 다소 이질감이 느껴질 수도 있는 동종의 인간이다. 그것이 결정적인 간택의 이유는 아니다. 그들의 매력은 충만한 에너지 뒤에 가려진 짙은 그림자에 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삶을 복기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불멸의 생명이 주어졌을 때 그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그들을 여기로 초대하기는 했지만 애당초 그들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휘둘릴 인물들이 아닐뿐더러 그들의 행적을 밟은 건 배우기 위함이었다. 흐르지 못하는 강물에서 서성이기보다는 흔적도 없이 증발되어 다른 물줄기를 따라 흘러보고 싶었다. 의미 있는 시도였을까. 삶의 고단함을 이기고 그들의 重生(중생)이 마침내는 아름답게 빛났기를 기원해 본다. 그들이 나이고 내가 그들이다.

 

 

 

팔리아먼트 원의 진실

 

아저씨, 레종 레드 하나 주세요.

네가 피우기에 레종 레드는 좀 센데?

, 저 아니에요. 아빠 심부름왔어요.

계산대를 사이로 편의점 주인과 마주 한 아이가 궁금해져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어 봤다. 160센티를 조금 넘을 것 같은 키지만 변성기 전의 목소리에 구레나룻 자리에 아직 새순이 돋지 않은 얼굴이다.

레종 레드의 니코틴 함량은 0.55mg, 타르 함량은 5.5mg이다. 처음 시작할 땐 에쎄 순 정도가 괜찮겠다. 니코틴ㆍ타르 함량이 5분의1수준이거든.

그게 뭐에요?

얼굴이 잔뜩 상기된 채로 아이는 귓속말을 하듯이 물었다.

그건 말야, 삶의 본질이라는 뜻의 에센스를 줄인 말이란다. 이탈리아어로는 삼인칭 여성 복수명사이기도 하지. 무슨 얘기냐면 쓴맛단맛 다 본 아저씨ㆍ아줌마들이라면 몰라도 네 싱싱한 폐가 바로 본질을 느끼기에는 이르다는 말이다. 알겠니.

주인은 미소를 머금고 동화책을 읽어주듯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는, 어쩌면 당장 돌아올 새벽부터 몽정을 시작할지도 모르는 겉절이 성인은 앞뒤로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주인의 말을 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삼 초 동안 묵음으로 돌리더니 출입문을 열기 무섭게 건물 모퉁이 쪽으로 사라졌다. 형광등 빛을 반사하는 머리카락의 콘트라스트와 설익은 톤의 목소리로 봤을 때 아이는 초등학교를 졸업했을까. 열 살을 갓 넘긴 아이에게 쓴맛이란 무엇일까. 그는 정말 아빠의 심부름을 왔을지도 모른다. 입 담배 첫날에 시가 연기를 제대로 넘겨 버린 경우처럼 아이는 분별없는 아빠 덕에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수도 있다.

뭐 드릴까요?

주인은 좀 전의 상황을 간단히 정리한 표정으로 눈을 맞추며 물었다.

팔리아먼트 원 하나 주실래요.

필라멘트는 없고 팔리아먼트는 있는 거 어떻게 아셨나요?

?...

하하하, 필라멘트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필라멘트는 백열전구에 들어가는 금속선인데 가끔 혼동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단어 배울 때 고생한 기억이 있어서 발음은 제가 좀 정확하죠.

팔리아먼트 원이라는 이름 참 재미있지 않나요. 담배 이름이라는 걸 모르고 들으면 프랑스혁명 전의 고등법원을 가리키는 말이잖아요.

편의점 아저씨와의 첫 만남은 그 정도로 마감됐다. 밤거리로 사라진 레종 레드, 필라멘트, 프랑스혁명 전의 고등법원. 습관화된 구매행위 중에 겪은 흔치 않은 경험이었는지 그날의 기억은 꽤 오래갔다. 그렇다고 해도 편의점 아저씨를 그때 그 장소에서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정도의 기억은 영영 펼쳐지지 않은 채 과거의 사진첩 속에 묻혔을 것이다. 

 

 

 

라오콘 혹은 몽상가

 

자라목을 하고 지하철 출구를 빠져 나와 사무실 방향으로 종종걸음을 쳤다.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바람 탓인지 앞서 가던 사람의 머리카락이 풀섶처럼 날렸다. 머리카락을 따라 가다가 가로등에 걸려진 전시회 광고에 시선이 걸렸다.

라오콘 : 고대 그리스 대표 조각전

일몰직전의 처연함을 연상시키는 11월 날씨 탓인지 자꾸 평소와는 다른 동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점심을 건너뛰고 덕수궁 미술관으로 향했다. 라오콘 군상은 1층에 전시되고 있었다. 4층부터 관람을 시작해 1층에 다다랐다. 12시 45. 5분을 마저 보고 지하철로 두 정거장 떨어진 회사까지는 10분 안에 도착할 요량이었다. 관람객들에게 둘러싸인 라오콘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라오콘은 뱀에 옆구리를 물려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플렛을 펼쳤다. BC 1세기경에 만들어진 라오콘 군상은 포도밭을 일구던 농부의 곡갱이 덕에 1,500년 만에 부활했다. 트로이의 마지막 신관 라오콘. 그는 트로이의 목마가 재앙이 될 것을 예감하고 목마의 배를 창으로 찔렀다가 여신 아테네의 미움을 사 바다뱀에 물려 죽은 주인공이다. 미술사가인 빙켈만은 라오콘에서 그리스 조각의 고요한 위대와 고귀한 단순을 발견하여 이 작품이 헬레니즘 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임을 입증했다. 다른 건 몰라도 라오콘의 꿈틀대는 근육과 갈비뼈와 복부 사이를 가로지르는 포물선이 영화 300의 모델이 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의 신체에서는 인간에 대한 그리스인의 꿈이 느껴졌다. 조각을 좀더 가까이서 보려고 몇 걸음을 옮기다가 그를 발견했다. 편의점 아저씨. 그는 조각에서 2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라오콘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2.42m 높이의 라오콘이 천정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애당초 눈을 맞춘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등을 돌린 연인에게 최후의 구애를 토해내는 듯한 그의 표정이라면 1만년 후에는 기적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았다.

멈춰라

마주 선 두 개의 조각상 중에 하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두 팔을 벌린 그의 모습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모세였다. 행위예술 같은 그 날의 장면은 두고두고 뇌리에 남았다.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에 알았더라면…”

그의 혼잣말에서 혼신을 다한 섹스 후의 허탈감이 느껴졌다. 관람객들이 몰려 움직일 때마다 옷깃이 스쳤지만 그의 눈에는 라오콘과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출구 쪽으로 방향을 튼 그는 천천히 걸음을 떼고 조각상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퇴장하는 그의 뒷모습은 퇴화한 날개로 땅에 의지해 살다가 수 백 년 전에 멸종했다는 도도새의 뒤뚱거림을 연상시켰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와 죽음을 기다리는 자. 전자를 인간이라 하고, 후자는 뱀파이어라고 불린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죽음을 피해 달린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만화영화 소재로 가끔 등장하는 그림자 떼기 게임이다. 골목길을 걷다가 페인트모션으로 그림자를 따돌리고 모퉁이를 돌아 내빼는 것이다. 그들은 세월의 그림자를 멋지게 따돌리는 상상을 하며 혼자 피식거리곤 한다. 빙신들. 지 애미의 자궁에서부터 생명과 죽음이 자웅동체로 함께 했음을 그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아는 것과 각인하는 것은 다른 법. 앎이 행동이 되려면 DNA라는 필름에 빛을 쪼여야 한다. 빛은 학습이다. 반복하고 반복해서 자동 빵으로 연쇄반응이 일어나기 전에 인간의 안다를 믿어선 안 된다. 물론 단 한번의 경험으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찍히는 경우도 있다. 나의 이마를 보라. 주홍글씨처럼 선명하게 불멸(不滅)이라는 화인(火印)이 보이지 않는가.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들은 가시광선 영역 밖의 것들은 볼 수 없지만 뱀파이어들은 불멸의 냄새를 본다. 냄새를 본다고? 그렇게 말할 밖에. 그들의 주 감각기관은 후각이다. 후각은 보통의 인간들이 갖고 있는 오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색맹이다. 눈은 동족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정도다. 흑백을 가리는 일은 인간들이 우위에 있을 지 모른다.

 

나는 뱀파이어다. 인간의 연령으로 치면 이백 살 가까이 살았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모르겠지만 순조의 장자(長子) 효명세자가 승하했을 때 저잣거리에 나가 국상을 구경했다. 세자의 죽음이 안쓰러워 멀리 남대문밖까지 상여행렬을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스물을 갓 넘겨 불멸의 삶을 얻은 후로 안쓰러움은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끝이 있다는 건 아름다운 것이다. 상춘객들은 꽃이 피기 무섭게 바람에 날리는 벚꽃을 보며 인생의 무상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제와 같은 오늘이 내일이 된다면 그들은 살아낼 수 있을까. 명절이면 으레 애매한 방송시간대를 점령하는 영구 시리즈 조차 참아내지 못하면서. 생명의 오묘함을 찬미하며 링클프리 화장품을 발라 대는 인간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부류의 피는 신선도가 떨어질 게 분명하다. 오늘은 나의 냉소를 여기까지만 하자. 원래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낮에 미술관을 다녀온 후 나의 인종 분류방식에 혼란을 겪고 있다. 인간, 뱀파이어 외에 내가 알지 못하는 호모 사피엔스 종족이 있는 게 아닐까.

 

담배가게 아저씨.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두 손을 번쩍  든 채 대리석 조각에다 대고. 정신이상이라고 하기에 편의점에서 마주치는 그의 모습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그에게서는 피비린내 대신 계피를 발효한 향이 났다. 헤모글로빈 수치로 따지면 그는 빈혈로 인해 쓰러졌어야 맞다. 낮은 헤모글로빈 수치에 옅은 복사꽃 향내를 풍기는 뱀파이어들과는 다른 피다. 그를 생각하느라 지하철 탈 생각을 못 하고 걷는 바람에 점심시간을 넘겨 사무실에 도착했다. 주위에서 모아지는 시선을 연출된 표정으로 가뿐하게 반사한 후 자리에 앉았다. 미스 리, 어제 맡긴 신용카드 전표는 처리했나? 사무실에서 나는 방년 스물 두 살 우유빛깔 미스 리이다.

 

 

 

 

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세다. 나는 서른 셋의 나이에 종신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서른 다섯에 프랑스 제1제정 황제이자 이탈리아 왕에 올랐다. 스페인에서 동쪽의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북해의 노르웨이가 나의 에 무릎을 꿇었다. 러시아를 거쳐 극동을 바라보던 나의 비전은 아쉽게도 1821년 세인트헬레나에서 최후를 맞았다. 아들 로마왕이 마음에 걸려 눈을 감지 못했다. 나는 1970년 한국의 화순 운주사 근처에서 환생했다. 본디 운주사의 스님이었던 아버지는 우연히 절을 찾은 어머니와 눈이 맞아 환속한 후 주지스님의 배려로 寺畓을 부치는 농사꾼이 되었다. 아버지는 1980 5월 광주에서 숨졌다. 어머니는 친할머니에 이어 과부가 되었다. 아들이 귀한 나의 가계에서 남자들은 대대로 명이 길지 못했다. 증조부는 만주에서, 할아버지는 6.25직전 여순에서 명을 달리 했다. 외아들인 아버지가 중이 되겠다고 했을 때 할머니는 충격으로 실신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본래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시대의 곡절에 휘말려 요절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생에 대한 의문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 물음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초가지붕을 뚫고 방구들로 쏟아진 것이 出家였다. 어머니의 출현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의식의 방향을 일순 전환시켰다. 짐작하건대 어머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아버지는 조상들의 세계로부터 빠져 나와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반골의 피는 어찌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집을 나간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본디 强骨이다. 강건한 체력과 뜨거운 피는 아버지의 유산이다. 중학교 때는 무쇠 주먹에 의지해 살았다. 타고난 머리는 있었는지 간신히 인문계 고교에 진학했다. 어느 봄날 세계사 시간에 졸음에 절은 봄바람을 타고 나폴레옹이란 이름 넉자가 마음에 들어왔다. 다비드 알프스를 넘는 백마 탄 나폴레옹을 보는 순간 잎사귀 하나가 가슴에 맺혔다. 백마가 아니라 노새였는데 머릿속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이미지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호기심은 몰입이 되어 고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나폴레옹이 별명 아닌 별명이 되었다. 기억의 해방은 돌로부터 왔다. 전경이 던진 짱돌에 머리를 맞고 삼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의식이 돌아온 나는 더 이상 20세기의 내가 아니었다. 19세기가 20세기를 잠식한 것이다. 사람들은 나폴레옹 1세를 자처하는 나를 외면했다. 서른 무렵 운명의 부름을 따라 브뤼셀을 찾았다. 공기 흡입구를 타고 유럽 의회에 입장한 나는 유럽연합의 창시자로서 제국으로의 회귀를 명하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정신병원에서 10년을 보냈다. 이제는 어머니의 전 재산과 맞바꾼 편의점에 내 작은 육신을 묻기로 했다.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인생을 현실인양 살아내기로 했다. 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일지도 모른다.

 

 

 

집으로 가는 길

 

눈이다. 한 송이가 떨어져 코 끝에서 작렬하더니 이마에 난 솜털을 덮고 이윽고 세상은 검정 하늘에 새하얀 바다다. 집으로 가는 길은 버스정류장에 면한 재래시장을 지나 언덕 초입의 중학교를 끼고 770미터의 오르막과 백 한 개의 계단으로 통한다. 코스를 마쳤다고 방심하면 곤란하다. 이웃집 똥개의 구성진 목소리로 귀가 도장 세 개를 받아야 한다. . . .

 

담배가게는 오르막길 중간 지점에 있다. 길 너머로 바깥 풍경을 보며 멍 때리는 주인 아저씨가 보인다. 그를 눈 여겨 본 이후(별 다른 뜻은 없다. 군침이 돌만한 피는 아니다), 초점이 맞춰진 그의 눈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걸까. 한 번은 그의 눈빛이 향하는 꼭지점을 찾아 뒷걸음을 치다가 축대에서 발을 헛디디기도 했다. 타고난 유연성에 뱀파이어의 피가 선사한 아크로바틱 체조 솜씨덕분에 아까운 코피 한 방울로 끝났지만 연륜에 맞지 않는 그 사건을 동족들에게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눈을 보고 있는 거겠지. 그가 피안을 바라보고 있다 한들 나랑 무슨 상관이람. 그는 인간일 뿐. 또각또각 효과음으로 치장한 내 긴 종아리를 훑어보느라 목이 휘어지는, 시장바닥의 군상 중 하나인 걸.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 다양성을 가진 게 또 인간이다. 그 다채로움은 한 명 한 명을 볼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섞어 놓으면 가관이다. 그들이 무리를 지으면 향의 블렌딩이 일어난다. 좀 전에 호프집 앞에서 마주친 오버 코트 삼형제를 볼까. 푸짐한 몸집에 안경 쓴 녀석, 그의 혈관에서는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콜레스테롤 잉여물이 알코올 분자를 바퀴 삼아 봅슬레이 경주를 하느라 곰삭은 홍어찜 냄새를 내뿜고 있었다. 헌데 그에게서는 특이한 향 하나가 더 있었다. 고추씨 냄새였다. 세 명 중간에 우뚝 선 오버코트는 어떻고. 은은한 생선 비린내에서 녀석의 간 온도가 살짝 내려간 게 느껴졌다. 긴장한 게다. 세 번째 애무하듯 껌을 씹던 오버코트는 유효기간이 갓 지난 버터 냄새를 풍겼다. 향의 조합이 잠시 뒤의 풍경을 그려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을 지나자 마자 퍽, 퍽 소리가 났다. 뒤를 돌아보니 두 녀석은 얼굴을 감싸고 나뒹굴고 안경 쓴 오버코트가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고 있었다. 솜씨 좋은 주방장은 생선에 고추씨와 버터를 넣고 프라이팬에 달달 볶아 먹음직한 생선조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요리사가 없는 거리에서 이거 저거를 대책 없이 섞다가 식재료는 물론이고 프라이팬마저 홀랑 태워먹는 경우를 종종 본다. “쌈 싸먹어라이 개쉐이들아.” 감정이 북받치면 인간들은 세상이 쌈으로 보이나 보다. 아귀가 맞든 말든 온갖 재료들을 한 큐에 싸버리는 쌈 말이다.

 

쇼윈도 밖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다. 씩 웃는다. 볼 사이로 주름이 지며 오롯한 명암이 만들어진다. 나도 씩 웃어준다. 그의 시선이 나의 동선을 좇는다. 뒤통수에 미적지근한 시선이 느껴진다.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 아저씨, 동사무소 나이로 나는 스물 두 살이에요. 모르는 사람들은 10대로 본다구요. 아저씨랑 내가 나란히 걸으면 원조라구요. 나이에 연연하는 회사 언니들은 이마의 솜털 좀 봐하며 젊음과 미모를 아우른 나를 부러워한다. 그래 액면가 이 백 살의 너그러움을 보여주자. 증손자 뻘 되는 녀석이 관심을 보였기로서니. 아름다운 꽃에 나비가 꾀듯이 자연스럽게 생각해야지. 혹시 알아. 그의 피에 좀처럼 볼 수 없는 生氣의 정수가 녹아 있을지.

 

그러나 이럴 때 나는 본능적으로 움츠러든다. 우쭐함이 이내 롤러코스터를 타고 진창으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이다. 늪에 빠지면 좀처럼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다. 한 달 이상을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검붉은 피조차 먹다 남긴 선짓국처럼 정나미가 떨어진다. 서둘러 관을 열고 적막 속으로 도망쳐 보지만 악몽의 파노라마는 상영이 시작되면 시작도 끝도 없이 반복되다가 어느 순간 춘삼월 스물 두 살 그 시절로 무대를 옮겨 놓곤 한다.

 

 

 

마포나루 오일장

 

섭섭아, 어서 일어나.

좋은 이름 놔두고 섭섭이가 뭐유, 섭섭이가.

이 년이 이 십 년 부른 이름을 갖고 트집이야.

분례라고 부르지 않으려면 부르지도 마유.

빨리 시집보내야지. 저 가시나 때문에 육성으로 말라 죽겄네.

 

댓바람부터 엄니 때문에 기분을 잡쳤다. 스물 둘, 과년한 딸년한테 유쾌하지 않은 兒名을 예사로 붙인다. 다섯 자매의 막내로 태어난 내가 죄인이지. 아들 하나 보겠다고 굴비 엮듯이 자식들을 낳아놓고서 초가지붕에 비라도 새면 나한테 화풀이다. 그 놈의 섭섭이는 안 그래도 싫었는데, 선교사님 말씀을 들으니 진짜 이거는 아니다 싶다. 남녀는 똑 같이 천주님이 지으셔서 뭐라더라그래 평등하단다. 아들 못 난 억울함을 자식이름으로 삼는 건, 이건 아닌 거다. 엄니는 아침부터 마포나루에 행차할 채비를 하느라 부산하다. 십 리는 걸어야 하지만 동네 아주머이들과 함께 하는 모처럼의 행락길에 엄니의 콧구멍이 연신 벌렁댄다.

 

아부지는요?

니 아부지 깨우지 마라. 점심 찬이나 챙겨 놓고 가란다.

 

서둘러 나섰는데 마포나루 오일장은 이미 북새통이다. 길 양쪽으로 펼쳐진 좌판들 사이로 사람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건어물과 건과실을 파는 건물상을 지나 오른쪽으로 틀자 잡화상이 나왔다. 형형색색의 노리개들이 주인을 기다리며 누워 있는데 모두 내 것 인양 정겹다. 그 중에서 칠보로 장식한 면경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들이민다. 저고리의 땟국물에, 눈가에 걸친 눈곱이 걸리긴 하지만 참 곱다. 입술을 좌우로 찢어본다. 머리를 좌우로 돌려 땋은 머리 사이로 삐쭉 나온 머리카락을 주섬주섬 정리해 본다. 진작 눈치를 챈 엄니는 우리집 살림 운운 하며 길을 재촉했다. 발은 걷는데 눈은 걸음을 떼지 못한다. 오전내 시장통을 유람하고 나니 배 거죽이 밥 달라고 난리다. 동네 아주머이들과 엄니가 마포나루가 내려다 보이는 양지녘에 자리를 잡았다. 보따리를 풀어 보리밥을 담은 공기 두 개와 배추김치 종지를 꺼냈다. 엄니가 주머니에서 달걀 한 개를 꺼내 건네준다. 오늘 아침에 낳았어야. 동네 아주머이들 못 보는 틈에 보리밥에 달걀을 깨 넣고 김치를 섞어 휘휘 비볐다.

 

그 얘기 들었어요? 우리 마을에 서양 선교사가 숨어 들었다매.

어제 자시에 개똥이네 집에서 모였다며.

모여서 뭐 했다는데요?

하늘에 계신 천주님한테 절 하고 성경인가를 갖고 공부했다고 합디다.

몇 해 전에 그거 때문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잖우.

썩을놈들. 괜히 들어와가지고 분란 나게 생겼네.

 

잘 먹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흘려 듣다가 속이 얹혀 버렸다. 개똥이네 집에 나도 있었다. 참석한 사람들 모두 묵언의 서약을 했건만.가슴이 세근반네근반, 얼굴이 화끈화끈하다.

 

관아에도 흘러 들어갔다고 합디다.

 

소근대던 아주머이들의 목소리가 추임새를 받자 갈수록 커진다. 그만 좀 하지. 관아에서 알고 있다면 오늘이라도 우리집에 들이닥칠 수 있다. 언년이 고 년이 바람을 넣지만 않았어도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놓지는 않았을 텐데.

 

멀리 황포 돛배 두 척에서 새우젓을 부지런히 실어내리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주변으로는 주막과 난전들을 점령한 상춘객들이 거나하게 오후 나절을 즐기고 있었다. 강나루 위로 유유히 흐르는 새털구름을 보고 있자니 울컥 억울한 심정이 들었다.

 

저 거 봐요.

 

순식이 엄니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니 포승줄에 묶인 예닐곱 명이 일렬로 나루터로 끌려오고 있었다. 나루터 쪽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 얼굴들을 뜯어봤다. 이 생원 아니요. 저건 개똥이넨데. 언년이는 웬일이지. 죄인들을 마포나루로 데리고 온 걸로 봐서는 배에 태워 의금부로 압송할 모양이다. 일행들은 후닥닥 짐을 챙겨 나루터로 달려가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집에 있었다면 나도 저 신세가 됐을 거다. 엄니의 펑퍼짐한 뒷태가 점점 멀어진다. 엄니 미안해요. 곧 돌아올게. 금방 돌아올게.

 

걸음을 돌려 마을 반대방향으로 뛰었다. 삼사 리를 뛰었을까. 사람들의 행렬이 잦아들고 복사꽃밭이 펼쳐졌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다면 어디라도 좋다. 온몸이 발산해서 복사꽃 향기 속으로 숨어들었으면. 다행히도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과거는 문을 닫았고 미래는 오리무중이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바위틈에 숨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는 생각의 꼬리를 잡으려 미간에 힘을 모았다. 그래. 강 건너 셋째 언니한테 가자. 며칠은 머물 수 있을 거다. 해가 뜨기 전에 나룻배를 구해 강을 건너는 거다. 인적이 끊긴 주변은 달빛도 별빛도 없는 칠흑 같은 밤이다. 짚신에 밟히는 땅의 감촉과 발바닥을 누르는 돌멩이의 묵직함을 이정표 삼아 길을 찾아 천천히 걸음을 뗐다. 세상에 오직 나만이 살고 있는 듯 거친 숨소리가 귓속으로 빨려 들었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송글송글 맺힌 땀이 이마에서 떨어져 인중을 타고 흘렀다. 아부지, 엄니는 어찌 되었을까. 당사자가 아니니까 괜찮겠지. 자식 건사 못한 죄를 물어 물볼기라도 맞을까. 나라에서는 천주님을 왜 그렇게 미워할까. 천주님은 아부지 엄니 보다 푸근하다. 계집애라고 구박하지도 상것이라고 홀대하지도 않는다. 할머이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부지가 술 먹은 날은 집 공기가 말이 아니었다. 우리집 세간은 성한 게 별로 없다. 밥상 다리는 부러져 흥부네 제비새끼처럼 광목으로 얼레설레 묶어 놨고, 깨지거나 이가 나가지 않은 그릇이 없다. 그나마 할머이가 돌아가시고 아부지 성격이 한풀 꺾였다. 아부지는 할머이 성격을 꼭 빼 닮았다. 할머이는 몇 개 남지 않은 이로 밥이든 사람이든 조곤조곤 씹는 게 취미였다. 아침상을 받아 놓고 밥이 왜 이리 설게 됐냐로 시작해서 계집년들이 조신하지 못하게 밥을 먹는다는 둥 애미가 복이 없으니 집안이 요 모양이라는 데까지 가면 아부지가 일단 숟가락을 놓는다. 이 때 아부지랑 눈이 마주쳤다가는 경을 치기 일쑤다. 식구들이 쥐구멍 찾듯이 밥상머리를 겨누고 있으면, 울화통을 참지 못한 아부지는 문지방에 걸려 덜거덕거리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린다. 아들 자식 하나 낳지 못한 죄로 평생 엄니를 구박하던 할머이는 이태 전 꿈에 돌아가신 할아부지가 자꾸 치마자락을 잡아당긴다고 하더니 얼마 안 가 새벽녘에 할아부지에게 갔다. 지지리 볶아대던 할머이가 하루 아침에 사라지자 엄니에게 툇마루를 지키는 버릇이 생겼다. 멍한 표정이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강아지 복실이를 닮기도 했고, 사립문을 열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저승사자를 맞이하는 눈빛 같기도 했다. 툇마루에 앉아 병든 닭 마냥 사립문을 지키던 엄니는 달포 만에 화색을 되찾았다. 그리곤 시간만 되면 동네 아주머이들과 이곳 저곳을 쏘다녔다. 나 건드리면 죽어버릴랑게. 엄니의 기세에 한번 눌리고 난 후에는 아부지도 엄니를 어찌하지 못했다.

 

분례야, 분례 맞지.

...누구세요

 

두 시간 가량을 걸었을까. 나루터가 육안에 들어와 마음을 놓는 순간, 뒤쪽 소나무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 왕 신부야. 검은 형체가 허리를 굽히고 살금살금 걸어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가 되어서야 땀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튀어나온 똥배가 저고리 사이로 튀어나와 어수룩해 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제법 조선인 티가 났다.

 

신부님, 무사하셨네요. 어떻게 빠져나오셨어요?

얘기하자면 길다. 삐에르 신부님도 와 계셔.

 

삐에르 신부는 나룻배에 올라 있었다. 물결에 부딪혀 나룻배의 노가 삐걱거렸다. 규칙적인 노의 움직임을 따라 그의 상체가 미세하게 좌우로 진동했다. 등 너머로 그가 눈을 감은 채 명상에 잠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침묵의 칼과 어둠의 방패로 무장한 채 아침에 한 발 앞서 나루터를 점령한 두려움을 진압한 듯 했다. 그에게서 흘러내린 두려움은 물결 위로 검은 등을 드러낸 채 어둠 너머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파더, 허리 업.”   

 

왕 신부의 채근에 물속에 잠긴 의식을 낚아채 듯 삐에르 신부가 눈을 떴다. 가는 입술에 번지던 미소는 이내 실바람에 사라졌다. 왕 신부가 노를 잡고, 삐에르 신부와 내가 고물에 앉았다. 어디로 가나요. 제물포까지 가면 상해 가는 배를 탈 수 있다. 여기를 떠나는 건가요. 조선땅 전체가 난리다. 식구들은무사할거다. 중국에 가서 소식을 알아 보자. 해 뜨기 전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가야겠구나.

 

배는 밤섬을 지나자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멀리 남산 쪽 인가에서 나온 불빛들이 반딧불이처럼 빛났다. 저 산 너머에 집이 있다. 한 방에 다섯 자매와 아부지 엄니와 할머이가 몸을 포개 겨울밤의 추위를 녹이던 우리집이 있다. 내가 이 강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갈 날이 있을까. 내 나이 스물 둘. 내가 아는 세상은 엄니가 소리쳐 부르면 달려갈 수 있는 거리, 술 취한 아부지를 피해 맨 발로 뛰쳐나왔다가 방안의 등잔불이 꺼진 걸 지켜볼 수 있는 거리가 전부였다. 하루 만에 바다를 건너 중국이라니. 이 모든 게 꿈이라면. 꿈이었으면. 아무도 말해 준 사람은 없지만 나는 스물 두 살의 봄이 더 이상 어제 같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단내 나게 뛰놀던 골목과 이웃집 언년이의 투박한 웃음과 할머이가 남긴 골방내가 이제는 뒤척이던 끝에 만나는 악몽으로 돌변할 지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겨울 이야기(1)

 

늦은 밤, 인적이 끊긴 언덕길 위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에 눈까지 내리니 적막이 따로 없다. 30분 후 알바생과 교대하기 전에 재고와 매출자료를 대사해야 한다. 들릴락 말락 켜 놓은 라디오에서 귀에 익은 멜로디가 흘러 나온다. 라 마르세예즈. 아니다. 1812년 서곡이다. 낯이 뜨겁다. 군인의 명예라고는 알 턱이 없는 일개 작곡가가 조국 러시아의 왜곡된 승리에 도취되어 국적 불명의 라 마르세예즈로 나의 제국을 조롱했다. 불쌍한 차이코프스키, 왕국의 유지를 위해  러시아인 스스로 모스크바에 불을 지른 걸 그는 영웅적 처사라고 떠받들 다니. 드넓은 러시아 제국에서 영웅이라곤 보로디노 전투를 이끈 미하일 쿠투조프 장군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진작 러시아를 정복하고 유럽대륙의 초대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18129월 보로디노 전투는 전술에서는 승리였지만 전략에서는 패배였다. 적은 잘 짜여진 편제를 앞세워 아군에 정면 대응했고 러시아군과 아군을 합쳐 7만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프랑스군은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러나 적은 패배한 것이 아니고 퇴각했을 뿐이었고, 모스크바에 있던 건물의 10분의1만이 성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전쟁에서 패배란 있는 일이지만 보로디노 이후 나의 내면에서 심상치 않은 균열이 감지된 것도 그때였다. 그것은 미지의 종국으로 떠밀리는 느낌, 세계를 모두 합친 힘으로도 나를 당할 수 없을 것이라는 완전함에 서성임이라는 불순물이 낀 느낌이었다. 나는 그 생경한 체험을 애써 전쟁의 피로 탓으로 돌렸다. 모스크바는 춥고 음산했다. 10월에 벌써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나면 차갑고 끈적한 밤의 기운이 병사들의 총구를 녹슬게 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말레 장군의 쿠데타 소식을 듣고 급히 파리로 귀환하는 길에서 나는 나의 운명이 다했음을 예감했다. 

 

지친 병사들을 시찰하고 막사로 돌아오는 길이었지. 용케 파괴되지 않고 남은 교회당을 지나는데 피난 나온 엄마가 백일이 갓 지났을 법한 아이에게 들려주는 자장가가 귀에 들어왔다. 잔잔한 울림이 어둠의 베일로 치부를 가린 전쟁터에 모처럼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적의 주검에서 나는 향기는 예전만큼 감미롭지 않았다. 그것은 한때 전쟁에서 복귀한 나를 튈르리 궁에서 맞이하는 마리 루이즈의 향수보다도 치명적이었다. 지천에 깔린 수 만 병사들의 주검에 주위의 부관들은 코를 감싸 쥐었지만 나는 뼛속을 파고드는 음습한 기운에서 승리자만이 느낄 수 있는 절대고독을 음미하곤 했다. 그것은 수 없이 많은 밤을 피로와 고뇌에 전 이가 맛보는 최고의 만찬이었다. 헌데 자장가 소리를 들은 후 나는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러시아는 다른 사람의 추억인양 묻어 두고 벽난로가 이글거리는 튈르리 궁에서 아들 로마왕을 무릎에 앉힌 채 오래오래 정담을 나누며 늙어가고 싶었다. 전쟁터에서 팔 할을 보낸 중년의 육체는 이미 그런 마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큼 쇠진해 있었다.

 

겨울은 목덜미에 콧바람을 불어넣으며 침실로 팔을 당기는 요부 같다. 한기를 피하려 외투 속으로 턱을 담그면 살얼음 아래 갇혀 있던 기억들이 수면으로 솟구쳐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뺨을 어루만진다. 의지는 몰락을 찬란하게 꾸며주는 노리개일 뿐이고 상념의 자락들이 엉성한 담을 넘어 聖恩이 끊긴 지 오래인 안채로 스멀스멀 무찔러든다. 눈을 뜨면 배달된 아침을 까서 과거에 수혈하는 게 일과다. 추억은 갈수록 풍만해지고 육신은 나날이 메말라간다. 나폴레옹임을 몰랐다면 인생이 그렇게 허비되지는 않았겠지. 1812년은 과거다. 지금은 21세기의 교차로 한복판에 서 있다. 교차로를 지나는 무심한 차들을 향해 나는 멈추라고 명령했고 그들은 현실에 등장한 돈키호테에게 중지 손가락을 들어 환영을 표했다. 그 뿐이었다. 시간의 여행자는 망령든 이로 지탄 받아 청년기를 *아빌리파이에 취해 살았다. 처음 병원을 찾은 날, 어머니는 초점 잃은 눈에 어눌한 말투로 입술을 빠는 자식을 안고 한동안 침묵했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혀는 아빌리파이의 편이었다. 슬리퍼를 신은 채 어기적거리며 기어이 어머니를 배웅했다. 그녀는 출입문에 난 창살 사이로 살이 붙은 내 뽀얀 손을 지긋이 잡았다. 그녀의 발끝에서 시작됐을 울림이 손마디에 전해졌다. 그녀는 울다 웃었고 나는 아빌리파이의 혀 뒤에서 웃다 울었다.

 

병원에서 보낸 시절은 정물화처럼 머물러 있었다. 바깥에서 10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안은 바뀐 게 없었다. 정해진 시각에 밥을 먹고 상담을 하고 뜰을 거닐고 TV를 보고 잠자리에 들었다. 보이지 않는 선을 따라 걸었을 뿐 뭐 때문에 오고 갔는지는 좀체 떠오르지를 않는다. 퇴원하고 횡단보도에서 트럭이 코앞에 급정거 하는 걸 보고서야 시간의 제국으로 복귀했음을 실감했다. 그날부터 가위에 눌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악몽 때문이 아니었다. 사지가 뒤틀리며 해체되는 듯한 무중력의 상태에 빠져들었다. 일주일을 뜬 눈으로 샌 끝에 깨달았다. 시간의 잠수병에 걸린 것이다. 시간이 정지된 곳에서 한 순간에 시간 속으로 던져졌을 때 발생하는 일종의 타임 래그였다. 완쾌된 걸로 알았는데 며칠 전 라오콘 상을 보러 갔다가 후유증을 겪었다. 뱀에 물린 라오콘이 온몸을 비틀며 돌진해 왔다. 착시가 아니었다. 근육은 잔뜩 뒤틀렸고 고통의 신음소리가 귀를 찔렀다. 다행히도 라오콘이 멈춘 덕분에 또 다시 병원으로 넘겨질 위기를 넘겼다. 시간은 나에게 질서와는 거리가 먼 존재가 되어 버렸다. 신은 다른 차원의 시간을 나에게 부여한 건 아닐까. 환생부터가 아이러니다. 전생의 삶에 집착하는데 나는 갈수록 나폴레옹이 아니다.

 

 

 

겨울 이야기(2)

 

1

사장님 잠깐 좀 나와 보실래요.”

 

휴대폰을 통해 들리는 김군의 목소리가 다급하다. 새벽 1가 넘어 걸려온 전화에 추리닝 바지 차림으로 두 세 계단을 성큼성큼 내질러 1층 편의점에 들어섰다. 김군이 뭔 일이냐고 물으려던 낌새를 낚아 채 뾰족 입을 내밀고 길 건너를 가리킨다. 출입문을 열고 나가 보니 취객인 듯 누군가가 질펀히 엎드려 있다. 교통사곤가. 아뇨. 멀쩡히 걸어가다가 픽. 한달음에 길을 가로질렀다. 파마머리에 검정색 코트를 입고 검은 롱부츠를 신은 여자가 인도 한 켠에 치워놓은 눈 둔덕에 그림자처럼 뻗어 있다. 몸을 천천히 돌려 목덜미에 손가락을 대었다. 객사는 면했다. 낯익은 얼굴이다. 일단 119 부르고. 올 때까지 우리 집으로 모시자고.

 

여자를 업었다. 보기보다 몸이 가볍다. 이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 출입문을 여니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맞았다. 어찌 된 일인가. 글쎄요. 크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은데. 우선 응급처치를 해야겠어요. 안방에 여자를 눕히자 어머니가 여자의 손을 바삐 주무른다. 얼굴에 핏기가 없구만. 술 먹은 건 아닌 것 같고.

 

괜찮아요.”

발을 주무르던 어머니의 손길이 부끄러웠는지 정신을 차린 여자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정신이 좀 드세요. 갑자기 쓰러졌는데 아픈 데는 없으세요?”

감사합니다. 잠시 누워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요.”

쯧쯧. 젊은 아가씨가 빈혈이 있나 보네.”

119는 돌려 보내는 게 좋겠다던 여자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얼굴이 참 곱네. 아는 아가씬감. 여자를 유심히 살피던 어머니는 나와 여자를 번갈아 훑으며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웃을 때 왼쪽 입술이 위로 말리는 게 꼭 외할머니를 닮았구나. 아뇨조세핀을 닮았네요. 무의식 중에 나오려는 말을 입언저리에서 막았다. 지난 10년간 그녀는 충분히 힘들었다. 자네는 들어가 쉬게. 새벽같이 일어나야 하잖나. 이 처자는 내가 잘 돌볼게. 주무세요. 안방 문을 닫고 나오는데 뜻밖의 소동 때문인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조용히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에 입김이 절로 났다. 이 밤이 쉬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2

방역당국의 구제역 예방백신 접종과 지속적인 방역활동에도 불구하고 구제역이 좀처럼 진정세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어제는 국내 최대 축산지역인 충남 홍성군에서도 2건의 구제역 발생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현재까지 구제역 발생 지역은 전체 축산지역 중 50%에 달해 시급한 조치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온 나라가 구제역 때문에 난리구먼. 장사하는데 지장은 없겠지.”

편의점이야 공산품 파는 덴데요.”

헤드라인 뉴스로 오른 구제역이 아침밥상의 서두가 되었다.

그나저나 그 아가씨는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없어져 버렸어. 사람 인심이 그게 아닌데.”

안 다쳐서 다행이죠. 가끔 저희 가게에 들르는 사람이에요.”

그 색시 어때.”

어떠냐뇨. 헤헤. 제 나이가 몇인데.”

나라 법에 몇 살 이상 터울은 시집장개도 못 간다고 하던가. 이 동네 사나 본데 다음에는 전화번호라도 알아 둬.”

어머니 꿈 깨세요.”

내 아들이라 그런 게 아니고 난 자네를  잘 알아. 병원 들어가기 전만해도 누구보다 똑똑한 사내였다는 거 내가 보장혀. 진작 간 애비를 닮아 호방하고 힘이 넘쳤지. 나 죽고 나면 자네 혼자여. 남자가 끈 떨어지면 남는 건 추접뿐이여.”

어머니는 흥분하면 사투리가 심해진다. 그 사투리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최후를 풀고 내 이야기까지 이어지면 끝이 꼭 이렇다. 그녀의 화법에는 슬픔을 증폭하는 힘이 있다. 덕분에 애써 억눌렀던 감정들이 삐죽이 튀어 나왔다. 나는 이국 땅에 다시 태어나 왜 이 모양인가.

 

IP *.236.3.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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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1.02.10 15:18:43 *.30.254.21
스승님께서  말하셨지..
상현은 , 강력하고 적극적이고, 긍정의 힘을 지니고 있다고..

연구원 생활이 우리 삶의 변곡점이 되고 있다는 것.
그것이 크던 작던...
난, 나를 포함하여,
유끼 연구원들 의 변화를 보면서 느끼곤 해

소설은 잘 모르겠지만,
소설이나 시나리오 같은...장르가
상현에게 잘 맞는 옷이라는 것은 알겠어...

생각같아선, 몇일 휴가내고 화~악 뛰라고 얘기하고 싶군
나도 못하면서...ㅎㅎㅎ

40대 직장인의 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 것 같아.
직장에서의 그 지루한 시간,
가정에서의 그 어려운 시간, ....

그럼에도 불구하고....해 내잖아.. 캬캬캬

가야 할 길을 알았으니,
이제 가자고....
주저하지 말고..

To : 상현에게,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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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엉
2011.02.10 17:46:45 *.10.44.47
몇일 휴가내고 화~악!!!
아무리 분명한 길도 가지않으면 '길'이 아닙니다.
쉴 새없이 영사기가 돌아도 스크린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 길 끝에서 기다리겠습니다.       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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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
2011.02.12 21:53:07 *.107.81.201
- 우성 형
꼭 필요할 때 꼭 필요한 말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겪어온 연구원 과정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더 아쉽고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형도 힘 내시고 3월에 좋은 결과 있기를 소망합니다 ^^

- 뱀파이엉 양
어정쩡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고 뱀파이엉 양의 거침없는
당돌함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의 에너지를
아낌없이 주변과 나누는 갸륵한 정신과 흔들리되 주저함이
없는 목표의식에 감사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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