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우성
- 조회 수 2494
- 댓글 수 6
- 추천 수 0
상처회복 메뉴얼 / [2-2 컬럼]
“환자의 권리에 대해 말씀해 보세요”
“환자는 가치관이나 신념, 종교적인 요구를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자신이 질병상태, 치료계획 및 예후, 진료비 내역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을 들을 권리가 있고, ~~~ 어쩌구 저쩌구입니다.”
“화재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재를 발견한 사람은 큰 소리로 화재 사실을 알리고, 소화전 발신기를 누르고, 소화기를 가지고 와서 일차 소화를 실시하고......~~~ 어쩌구 저쩌구..합니다”
“화재가 발생하면 어떤 우선순위로 환자를 대피시켜야 할까요?”
“가장 중증인 A 등급의 환자부터 2인1조가 되어 ~~~ 어쩌구 저쩌구..합니다.”
토요일 아침, 강당에 모인 직원들이 강사의 질문에 답변을 암기하느라 낑낑대고 있다.
병원이 난리가 났다. 의료기관 인증평가가 코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의료기관 인증평가’ 란 대한민국 병원의 의료서비스와 환자안전을, 국제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보건복지부가 새롭게 도입한 병원평가를 말한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2월 22일~24일간 인증평가를 받도록 예정되어 있다. 404개의 인증평가항목을 통과하기 위하여 6개월 전부터 준비를 해왔다. 높은 수준의 감염관리를 위해 병원의 하드웨어를 고치고, 수 백개의 내규(매뉴얼)을 만들고, 필수 메뉴얼은 전 직원들이 암기할 수 있어야 인증을 통과할 수 있다. 명절에도 공사를 하고, 쉬는 토요일에도 병원에 출근하여 암기하느라 끙끙 댄다.
많은 매뉴얼들이 새로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환자들이 가득한 병원에 화재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에는 그런 상상조차 하지 않았으나,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아주 구체적인 실행매뉴얼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병동별로 자위소방대를 구성하여 화재통보 연락반, 대피반, 소화반을 만들고, 구성원 모두가 소화기, 소화전, 완강기 사용이 실제 로 가능해야 한다. 주간발생과 야간발생으로 구분하여 대처방안을 만들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 등급별로 대피우선순위를 결정하면서 개인별 역할분담도 결정한다.
만약에 화재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는 ‘화재발생시 응급대응 프로세스’ 가 완성된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재난이 발생해서 수십명의 환자들이 들이닥칠 경우를 대비한 매뉴얼도 만들어졌다. 수많은 매뉴얼들을 보면서 왠지 든든했고, 의료서비스나 환자안전 수준이, 한결 업그레이드 된 병원이 된 것 같아 자부심도 생겼다. 평가의 순기능이자, 체계적인 매뉴얼의 힘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도 화재는 발생한다. 살아가면서 예측하지 못했던 불이 내 삶을 덮쳐올 때, 우리는 어떤 매뉴얼을 가지고 불 끄기를 시도해야 할까? 인생의 화재가 발생하더라도 대응 매뉴얼이 있다면 삶에 대해 든든함이 느껴지려나? 지난 주 병원에서 있었던 고객민원의 작은 해프닝을 돌이켜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민원을 접수한 것은 5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신용카드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용카드가 사용되었다. 사용처를 확인해보니 당신네 병원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냐?’ 고 물어왔다. 민원 담당 직원은 가족들 중에 그녀의 카드를 사용한 분이 없는지 확인해 보시라 했다. 그녀는 ‘이미 확인했다. 가족 중에는 내 카드를 사용한 사실이 없다.’ 며, 사실을 규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병원으로 오시라고 안내했다. 카드로 진료비를 수납했다면 수납창구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병원에 와서 ‘누군지 함께 보자’ 고 한 것이다. 그녀는 병원에 왔고 같이 영상을 확인했다. 그녀의 카드를 대신 쓴 사람은 누구였을까? 카드가 사용된 시간에 CCTV에서 수납을 하는 사람은 여자였고, 자동차 사고로 응급센터에 내원한 환자였다.
그녀는 화면 속의 여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의 딸이었다. 카드 사용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는 ‘사용한 적이 없다.’ 고 딱 잡아뗐다던 딸! 영상속의 딸은 그 엄마가 모르는, 웬 남자와 함께 있었다. 아마도 그 남자랑 차를 타고 가다가 자동차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음, 대략 난감한 시츄에이션이다.
“따님이 맞으세요?” 하고 재차 묻자, 묵묵부답이더니,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병원을 나가 버렸다. 저장된 폐쇄회로 영상(CCTV) 이 없었다면, 계속 자신의 주장을 고집했을 것이고, 딸의 거짓말도 들통나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의 경직된 얼굴과 굳은 침묵 속에서 작은 불씨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불씨는 그녀의 삶에서 커다란 화재로 타 올랐을까? 아니면 노련한 소방 메뉴얼에 의해 금방 꺼져버렸을까?
몸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병원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우리는 대부분 아마추어다. 상처받은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에도 서툴지만, 때로는 마음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러나 무의식에 잠재된 상처의 기억은 언젠가는 수면위로 나와 스스로를 공격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맺고 있는 관계망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도시 곳곳에 ‘상처 학교’ 같은 곳이 있으면 좋겠다. 예상치 못했던 화재를 대비하여 대응 매뉴얼을 만들 듯, 인간의 마음이 다쳤을 때, 그 상처를 감싸 줄 체계적인 매뉴얼을 배울 수 있는 그런 학교 말이다. 생각해보면 모든 인간관계가 아픔과 기쁨의 근원이 된다. 내게도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었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나도 모르게 상처회복을 위한 3가지 처방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는 ‘교차로’ 처방이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은 내용을 각색했다. 깊지 않은 인간관계에서 주고받는, 평균적 수준의 상처에는 약빨이 제법 받는 편이다.
"야! 누군가와 부딪혀 속상하냐?"
너는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고 그놈은 이쪽으로 걸어온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가다가 교차로에서 잠시 만났다. 다시 각자의 길을 갈 것이다. 그런데 곧 헤어질 그 놈 때문에 속상하니? 사람 때문에 힘들면 이렇게 생각해라. ‘지금 우린 교차로에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교차로’ 수준의 처방으로는 회복이 어려운, 깊은 상처를 받을 때도 가끔 있다. 좀 더 강한 놈이 필요할 때는 유머가 도움이 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충고를 처방한다.
“어떤 야비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고민하지 말라.
단지 아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하라. 이상한 광물 표본 하나를 우연히 발견한 광물학자의 태도를 보여라. 이상한 상사를 만나면 ‘저건 못 보던 샘플인데’라고 생각하라.”
세 번째, ‘교차로’ 처방이나 ‘철학자의 충고’로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듯한 외로움을 느끼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혹은 가까운 가족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에는, 자신의 존재가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느낄 수도 있다. 가장 강도 높은 처방이 필요하다. 그런 때는 아래의 문장을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마음에 아로새기는 것이 (내 경우에는) 도움이 되었다.
‘그.어.느.누.구.도
내.동.의.없.이
나.에.게 상.처.주.는.것.을
허.락.하.지.않.겠.다.’
아마도 자존감을 일깨워주는 글의 힘이 아닐까 싶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일도, 처방의 약빨도 점차 바래지고, 때로는 무심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아프지 않으면 상처라고 부르지 않는다. 처방이 있다고, 상처받는 것이 두렵지 않을 수는 없다. 소방 메뉴얼이 있다고 화재를 무서워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상처에도 특효약이 있을까?
작가 공지영은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라는 산문집에서 ‘사랑하는 것은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과연 사랑이 모든 상처에 작동하는 만병통치약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상처받으면서도, 또 다시 사랑하고 다시 또 상처받는 이유가 어렴풋이 이해되었다.
확실한 것은, 모든 상처는 발생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발생했다면 빨리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매뉴얼이 필요할 것 같다. 화재 발생비율과, 사람의 마음이 상처받을 때의 발생 비율을 비교해 본다면, 상처회복 매뉴얼이 화재 매뉴얼보다는 훨씬 먼저 준비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