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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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내 세 명이 비좁은 진열대 사이를 느릿느릿 오가며 이 물건 저 물건을 툭툭 건드린다. 오른쪽 진열대를 오가던 두 명은 생리대 코너에서 어색한 아이 쇼핑에 들어갔다. 한 명은 뒷짐을 진 채 매대 끝에서 끝까지 규칙적으로 걸음을 옮긴다. 익숙한 분위기다. 적이 북과 나팔을 앞세워 전진해 왔다. 그들은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박자로 거리를 좁혔다. 점이 막대가 되고 이윽고 이각모에 반쯤 묻힌 눈썹이 꿈틀대는 걸 확인할 때까지는 정적이 주인공이다.
“아저씨, 이거 얼마에요.” 그 중 막내뻘로 보이는 한 명이 생리대를 계산대에 불쑥 내려 놓는다. 17,400원입니다. 뭐 그리 비싸요. 정찰가격입니다, 헤헤. 이렇게 비싼 생리대가 하나도 구실을 못하면 어떡해야 합니까. 우리 마누라 여기서 산 물건 찼다가 새로 산 바지 다 버렸는데 어떡하면 좋겠냐고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니까 17,400원이 구실을 못해 50만원 짜리 바지를 버렸다 이겁니다. 언더 스탠?아가 넌 어째 말하는 게 그러냐. 뒷짐 진 사내가 앞으로 나서더니 나와 생리대를 번갈아 쳐다 본다. 야가 좀 싸가지가 없소. 간단히 말하면, 당신네 가게에서 산 물건 때문에 아끼는 제수씨가 정신적으로다가 기스가 좀 났소. 다른 건 필요 없고 바지값만 책임지소. 어느새 나머지 한 명은 매대를 돌며 물건들을 하나씩 떨어트린다. 어쩔테요. 손님, 그런 일이라면 해당 업체에 문의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물건을 파는 입장이고 제조물에 대한 불량 처리는… 이 아저씨가 말귀를 못 알아듣네. 야는 당신을 믿고 이걸 산 거야. 당신 얼굴을 보고 산 거라고. 업체니 뭐니 시답지 않은 야그 그만 두고. 거두절미. 현찰로 50만원만 주소. 제가 업체 연락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주인 아저씨가 귀가 먹었나 보다. 말귀가 뻥 뚫리게 해 드려야겠다. 각본이 짜여진 듯 말이 끝나기 전에 사내 둘이 매장을 돌며 물건들을 쓸어 내렸다. 어머니 말이 떠올랐다. 좋게 좋게 살아. 50만원이면 이 상황이 좋게 매듭지어질까. 다른 건 몰라도 명예를 모르는 건달들에게 내일을 기약할 일은 아니다. 악에 받힌 행동대장이 기어이 멱살을 잡았다. 이 상노로 새끼.
“어머 아저씨 그 손 놓으세요.” 잔뜩 꾸민 목소리지만 귀에 익다. 그녀가 출입문 앞에 서서 웃고 있었다. 넌 뭐야. 제가 누구인지 알려 드리면 그만 두실거죠. 계산대로 성큼성큼 걸어온 그녀는 가볍게 목례를 하더니 매장 밖으로 나를 밀어내고 문을 잠궜다. 나에게 윙크를 날리는가 싶더니 기다란 손을 흔들어 사내들을 불러 모은다. 상황에 맞지 않는 살가운 제스처 때문인지 사내들의 표정에서 당황한 빛이 역력하다. 여섯 개의 발이 그녀 앞에 정렬했다. 여자는 사내들과 동그랗게 어깨동무를 하고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그리 보였다. 1분쯤 흘렀을까. 원의 형태가 일순 흩트려지며 사내들이 줄행랑을 쳤다.
쇼윈도 밖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여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뭐라고 하신 거에요. 그냥 내 얘기를 조금 했는데 믿기지가 않나 봐요. 히히히. 여자의 왼쪽 입술이 말려 올라간다. 무의식에는 대상에 반응하는 패턴이 있나 보다. 외할머니, 조세핀, 21세기 한국땅 여기. 나이를 먹어갈 뿐 젊어 질 수는 없는 것이다. 몸은 괜찮으세요. 네 덕분에. 감사했습니다. 어쩌다가 길 위에… 히히히. 곤란한 듯 쑥스러운 웃음으로 화답한 여자는 바삐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등산 좋아하세요?”
“왜요.”
“아가씨를 닮은 품 넓은 산을 알고 있습니다. 헤헤.”
벌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치달아 올라온다. 그것은 나의 사전에서 오래 전에 폐기한 격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