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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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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7일 10시 02분 등록

진뫼마을 징검다리

산이 깊어 진뫼마을일까. 아직은 바람 끝에 손이 시렸지만, 훈훈한 말 인심 탓인지 시인의 마을로 향하는 길이 수월했다. 벌써 손 이른 농심은 논에 로터리 쳐두는 일을 잊지 않았고, 몇 줌 되지도 않는 고랑 사이 잔설들이 오후 햇볕을 피해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연한 황토빛으로 포장된 제방 길이 제법 반듯했다. 얼마쯤 걷다보니, 포장길을 뚝하고 끊겨 있었다. 길 한쪽에 넘어진 공사안내판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덕치 천담주변 생태테마마을 조성사업.. 덕치면 물우리에서 천담마을 주변... 통행에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까 식당에서 나누던 사내들의 말이 이걸 두고 한 것이었나 싶다. 과연 시인의 고집대로 진뫼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포장되지 않은 채로 그대로였다.

‘결사반대! 진뫼마을 수원지에 양계장이 웬말이냐’ -진뫼마을 주민일동

마을 입구에 걸린 노란색 천에 붉은 글씨. 누군가 마을 뒷산 골짜기에 닭을 키울 모양인가보다. 으레껏 마을 입구 오래된 당산나무가 먼저 반길 줄 알았는데, 세상의 욕심이 이곳 오지마저도 내버려두질 않는다 싶다. 아마도 그들도 외지사람들인가 보다. 비싸 보이는 검정색 승용차 한 대와 지프차가 마을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발가벗은 당산나무 밑에서 얼쩡거리고 있다. 연신 줄담배를 피워가며,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속닥이다가는 이내 차를 집어타고 사라져 버렸다. 이곳까지 웬일들일까. 불안하다.

DSC_0489-1.jpg

소년은 개울가에서 소녀를 보자 곧 윤초시네 증손녀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소년은 개울둑에 앉아 버렸다. 소녀가 비키기를 기다리자는 것이다. 요행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소녀가 길을 비켜 주었다. 다음 날은 좀 늦게 개울가로 나왔다. 이 날은 소녀가 징검다리 한가운데 앉아 세수를 하고 있었다. 분홍 스웨터 소매를 걷어 올린 팔과 목덜미가 마냥 희었다. ... 그러다가 소녀가 물속에서 무엇을 하나 집어낸다. 하얀 조약돌이었다. 그리고는 훌쩍 일어나 팔짝팔짝 징검다리를 뛰어 건너간다. 다 건너가더니 홱 이리로 돌아서며,
“이 바보.”
조약돌이 날아왔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소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소년은 다시 주저앉아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그때 그 소녀가 던지고 간 조약돌을 더듬어 보지만, 없다. 이제 턱 밑에 수염이 제법 굼실한 소년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얀 연기가 인다. 이내 강바람에 쫓겨 단발머리처럼 나풀거리는 갈대 숲 사이로 어지럽게 흩어진다. 어디쯤까지 눈길이 쫓아 달려가지만 더 이상 길을 잃고 말았다. 이제 돌다리에는 다행히 아무도 없다. 아마도 저기쯤이었지. 소년은 징검다리 한가운데 쭈그리고 앉았다. 그때 마냥 얼굴을 비쳐본다. 여전히 검게 탄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싫었다. 그렇지만 그때처럼 물속의 얼굴을 움키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진짜로 저쪽 징검다리로 소녀가 건너오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도 어딘가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좁아진 징검다리 사이로 여울지며 지나는 강물이 속삭인다. “한번 흘러간 것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아..”

나는 더 이상 뛰지 않았다. 다시금 디딤돌을 헛짚고 싶지도, 저 차가운 강물 속에 발을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시인이 어린 시절 살았다던 장산마을 앞 징검다리를 다시 돌아 나오며 뜻없는 발걸음만 재촉한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개울 건너 작은 집에 살던 소녀가 더 이상은 아프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눈-먼 아이처럼, 귀-먼 아이처럼... 조오심... 조오오심.. 징검다리 건너던... 진뫼마을에서 천담으로 가는 길, 아직 산그늘 자락에 눈들이 녹아.. 길은 젖어 있었다.

천담가는 길 **

세월이 가면 / 길가에 피어나는 꽃따라 / 나도 피어나고
바람이 불면 / 바람에 흔들린 다음
세월이 가면 / 길가에 지는 꽃따라 / 나도 질라요
강물은 흐르고 / 물처럼 가버린 / 그 흔한 세월
내 지나온 자리 / 뒤돌아다보면
고운 바람결에 / 꽃 피고 지는 / 아름다운 강길에서
많이도 살았다 많이도 살았어
바람에 흔들리며 / 강물이 모르게 가만히
강물에 떨어져 / 나는 갈라요

 
* 황순원의 '소나기' 중에서
** 김용택의 시 '천담가는 길'

IP *.105.115.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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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8 09:01:14 *.10.44.47
 다시금 디딤돌을 헛짚고 싶지도, 저 차가운 강물 속에 발을 빠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따라오는지 뒤돌아 확인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아요.
걱정 마세요.
사람들은 결국 형이 낸 길을 따라가게 될테니까요. 
형은 그저 마음의 리듬을 타고 경쾌한 발걸음을 즐기심 될 것 같습니다.
신진철은 두려워하는 사내가 아니란 걸 우린 이미 알고 있거든요.  ^^

강을 피하려다간 정작 내 인생까지도 피해버릴 수 있다는 거.
오늘을 피하는 자에겐 오늘과 다른 '내일'은 영영 오지 않는다는 거.
머리론 다 알아도 몸을 보내지 못하는 건 
아직 살갗의 체감이 부족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형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자신에게로 흘러오는 강을 당당하게 치뤄낸 사내가 아직 살아있다.
그것도 남들보다 훨씬 싱싱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그냥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기획할 것도 의도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 '깊은 인생'을 독자에게, 그리고 형 자신에게 선물하세요. 
 
'너는 강으로 가라'를 읽고나면 사람들은 더 용감해질 겁니다.
더 당당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훨씬 더 자주 '살아있게' 될 것입니다.

작가가 할 수 있는 이보다 더 귀한 공헌이 있을까요?
제가 형을 마음깊이 부러워하는 이유입니다. ^^
프로필 이미지
2011.02.18 11:46:43 *.186.58.116
니 신랑 복받았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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