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연구원

칼럼

연구원들이

  • 신진철
  • 조회 수 2669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1년 2월 17일 13시 35분 등록

구담마을 2.2km.

어느 덧 천담이었다. 생각없이 걸었던 탓일까. 문득 길을 가로막고 선 이정표의 긴 소매자락에 적힌 구담마을은 이제 반시간 걸음뿐이었다. 다리 건너로 717번 지방도를 따라 이따금씩 차가 지나는 소리를 빼곤 아무도 없었다. 다리를 건너오는 걸음도 없고, 동네 문 열고 얼굴 내미는 이조차도 없다. 막걸리 한 사발에 혹여 두부김치라도 요기를 할까 싶어 ‘섬진강 슈퍼’를 두어 번 서성거려봤지만, 열리지 않았다. 자물쇠가 꽉 채워진 가게 문뿐이었다.

불러도 대답 없고, 계곡을 따라 울려 돌아오는 제 목소리에 처마 끝 눈들이 화들짝 놀란다. 괜시리 헛물만 켰다 싶어, 정자나무 아래에 맥 풀린 배낭을 내려놓았다. 반듯한 검은 비석 하나가 눈을 끈다.

부엉이 우는 긴긴 겨울 다 보내고
용골산 소쩍새 우는 농사철이 오면
흘러가는 저 강물 눈앞에 두고
물길을 찾아 헤메던 타는 가슴에
그대들은 여기저기 물길을 내어
논과 밭과 온갖 곡식들을 적셔주었습니다
......

시인은 천상 농사꾼의 자식이었다. 애향비愛鄕碑에 적힌 타는 가슴들.. 강물을 눈앞에 두고도 물길을 찾아 헤메던 이들.. 가까이 두고도 가지지 못하고, 떠나보내지도 못하고 사는 삶이라니. 그들이 농사를 지을 때, 그는 시를 지었다. 땅을 일구고 곡식을 키워내던 아비의 손에서 자란 팔자는 가슴을 일구어 사랑을 키워내는 일을 했다. 투박한 손으로 놓은 징검다리를 딛고, 자식들은 세상 밖으로 섬진강의 품을 떠났다. 전주로.. 서울로.. 산도 깊고, 물도 굽은 이곳에 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길손을 반기던 껍데기 같은 노모의 시름만 깊다. 죽으면 돌아갈 곳, 아니 돌아가시기 전에 꼭 돌아가고 싶은 여인의 품. 마른 젖무덤을 더듬어 젖을 빨고, 응석도 부려보고 싶은 곳. 어머니.. 당신이 계시는 고향..

갑순이 이야기

오직 강을 따라
걸어본 사람만이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수양버들 춤추는 길을 따라
아홉 살 시집가던
갑순이의 눈물도 

굳이 들어가라는 만류에도
끝내 동구 밖까지 따라나서던
어머니의 바람도

산등너머로 노을이 붉어지면
돌아올 식구들을 위해
지피던 아궁이의 연기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꼬리를 흔들며
반겨 맞던
멍멍이의 모습도

오직 강을 따라
흘러본 사람만이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막힐수록 감싸 안아 돌고
막아서면 가득 채워 넘고
흘러간다는 것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바람은 언제나
물길을 따라 흐른다는 것도

물길을 따라
설레이던 사랑들이 왔고
또 다시
그 길을 따라
깊어지던 아픔들이 남고

기언시
쪽빛파란 가을날 오후
만장이 펄럭입니다

아홉 살 꽃가마 타고
왔던 길
아흔 살 꽃가마 타고
갑니다
시집을 갑니다

강이 내돌아 제 어미 치마 주름 같은 산자락을 감아 돌던 길을 따라 매화가 물오르기 시작했다. 길을 벗어나 아직은 마른 달뿌리풀만 흔들거리는 강가에 주저앉아 그리운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세차게 내달아 흐르는 여울이 제가 흘러온 골짜기에 눈 녹던 사연을 전한다. 더는 재잘거리던 가시내의 수다가 아니다. 어느 덧 처녀티도 나고, 얼마쯤이면 젖봉오리가 붉어질 것이고, 빨간 꽃도 보게 되겠지. 제게 버거운 바위도 만나 굽어 돌기도 하고, 바닥 깊게 패이는 상처도 알게 되고 또 그렇게 몇 골짜기를 굽어 돌다보면 더 깊어지겠지. 강을 따라 걷던 제 아비의 삶도 기억하게 되겠지.

DSC_0551.JPG

DSC_0556-1.jpg

입춘 끝이라지만, 이미 절반을 한참 넘긴 햇빛이 산등성이에 가까워지면서 금새 시들해지고 만다. 강길 따라 걷던 길도 더는 끊어지고 마는 곳. 구담마을이다. 섬진강 오백리길 중에서도 가장 오지라는 곳. 해가 짧은 산골이 아니랄까. 느티나무 언덕에 나무 그림자가 짙어지더니, 강 건너 어느 집 굴뚝에서 연기가 오른다. 불쑥 어디선가 귀익은 목소리가 들릴 것 같다. 아니면 짜증난 누이동생의 밥 먹으라는 소리가 뒷목을 잡아챌지도 모른다. 썰매도 타고, 팽이도 돌다 지치면 주섬주섬 나뭇가지를 주워다 우리도 불을 피웠다. 젖은 양말을 말린답시고 불가에 둘러서서 연신 왼발 오른발을 바꾸다 보면, 질기다던 나일론 양말도 더는 발가락을 감추지 못했다. 그 구멍난 사이로 꼼지락 거리던 발가락들. 왜 그랬을까. 불을 피우고 나면 오줌이 마려웠다. 제법 사내들이라고, 불가에 빙 둘러서서 너나없이 이미 번데기가 되어버린 자라목을 꺼냈다. 활처럼 굽은 허리들을 하고서 이제 연기대신 김이 오르는 하루를 마무리했다. 너무도 짧던 겨울 해를 원망하면서, 굴뚝 연기 밥 냄새를 쫓아 저마다 집으로 찾아 들었다. 이불 덮인 아랫목에 손 넣고, 발도 넣고 구멍 난 양말을 숨겨도 보지만, 얄궂은 누이동생의 고자질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겨울 내내 얼었다 녹았다 하던 발은 봄이 다가오는 소리에 더 조바심 나게 근질거리곤 했다.

DSC_0580-1.jpg

자라가 많이 난다고 해서, 구담이다. 다자고자 아직 개장도 안한 마을 회관을 찾아 들었다. 낯선 젊은 사내를 측은한 눈길로 맞기도 하고, 사과 한 조각 건네기도 했다. 아침에 한 번, 이른 오후에 또 한 번 버스가 들어올 뿐이었지만 구담마을은 더는 세상의 오지가 아니었다. 이제 곧 얼어붙은 강물도 풀리고, 길 따라 심겨진 매화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부를 것이다. 저녁이 늦어서야 마을 이장님의 허락을 받아, 마을 회관에 몸을 뉠 수 있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눕자, 잊었던 강물소리가 다시 안겨 들었다. 꿈을 꾸고 싶다. 해질 녘 얼핏 보았던 마을 앞 징검다리를 건너, 저 강물이 굽어져 사라진 곳을 따라 가고 싶다. 밤새 그 품에서 오백리五百里 긴 꿈을 꾸고 싶다.

 

IP *.105.115.207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천담에서 구담가는 길 (3) file 신진철 2011.02.17 2669
2211 천담에서 구담가는 길 (2) file [2] 신진철 2011.02.17 2659
2210 작가로서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3] 맑은 김인건 2011.02.15 2451
2209 < 자신의 인생을 지휘하고 싶은 아이 > 김연주 2011.02.14 2364
2208 [Tip 2] 마음을 결정하기 전에 꼭 확인해야 할 것 [3] 이선형 2011.02.14 2428
2207 [호랑이 실험 1- Case Studies 실험 키트] file [1] 수희향 2011.02.14 2157
2206 <소설> 우리 동네 담배가게 아저씨 나폴레옹(9) [5] 박상현 2011.02.14 2367
2205 [컬럼] 상처회복 메뉴얼 [6] 최우성 2011.02.14 2495
2204 종합 영양제 [5] 이은주 2011.02.14 2375
2203 목차 수정-ver11 박경숙 2011.02.14 2229
2202 칼럼-인지의 전환을 하라 박경숙 2011.02.14 2447
2201 라뽀(rapport) 41 - 살아 남은자의 슬픔 [1] 書元 2011.02.13 2238
2200 단상(斷想) 50 - 행복 마켓 file 書元 2011.02.13 2239
2199 천담에서 구담가는 길 (1) file [5] 신진철 2011.02.13 3101
2198 장보기 1탄 - 나의 보물창고 '동대문 종합시장' file [10] [2] 불확 2011.02.11 4485
2197 호랑이 프로젝트 - 표범과 호랑이 [1] crepio 2011.02.09 2400
2196 응애 55 - 외로운 글쓰기 [8] 범해 좌경숙 2011.02.08 2524
2195 <소설> 우리 동네 담배가게 아저씨 나폴레옹(1~8) [3] 박상현 2011.02.07 2366
2194 프롤로그 - 혹시 당신의 아이, 사랑한다면서 원수처럼? [4] 김연주 2011.02.07 2297
2193 [칼럼]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 [7] 이선형 2011.02.07 2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