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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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좋아하세요?”
“왜요.”
“아가씨를 닮은 산을 알고 있습니다. 헤헤.”
벌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치달아 올라온다. 그것은 나의 사전에서 오래 전에 폐기한 격정이었다.
“생각해 보고요.”
여자는 한 마디를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졌다. 정적이 다시 찾아왔다.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워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주었다. 지평선에 걸린 태양에서 낮은 고도로 발산되는 석양빛이 바닥 여기저기에 그림자를 널어놓았다. 진열대 사이에 걸쳐진 중년 남자의 그림자를 보고 있자니 방금 전의 소동이 아득한 옛일로 느껴졌다. 어지러운 기운이 몰려왔다. 늘어진 그림자를 향해 “김치” 하며 V자를 그렸다. 명멸하는 존재의 아쉬움 같은 것이었을까. 굳어진 볼 근육을 있는 힘껏 좌우로 당기며 나는 이것이 19세기의 그림자를 불러온 시간에게 예우를 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의 주관자에게 경례. “제기랄.”
“똑 똑” 꿈결이다.
“똑 똑 똑” 생신가?
“똑똑 똑똑똑 똑똑똑 똑똑” 꿈이라면 악몽이다. 침대에서 화들짝 일어나 창가로 갔다. 불투명 창문을 열어 젖혔다. 서리 낀 투명 창문에 뭔가 써 있다.
토요일
반포터미널 호남선 매표소앞
분례
분례? 호남선 매표소? 손을 더듬어 탁상시계를 찾았다. 시침이
긴가민가 하며 집을 나섰다. 매표창구가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몇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숨죽이고 매표창구로 걸음을 옮겼다. 아줌마 아저씨는 있는데 그녀는 없다. 호호 웃는 아가씨 몇 명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히히 웃는 그녀는 없다.
“거기 가요 우리”
뒤를 돌아봤다. 여자는 왼쪽 입술이 말린 채 웃고 있었다.
“
“숨어서 지켜봤어요. 행선지를 맞춰 보려구. 히히”
“가려던 데는 아니지만 오늘은 저기가 어울릴 것 같네요. 헤헤”
고속도로에 진입한 버스는 이내 시속 100km내외로 속도를 높였다. 천안논산고속도로를 따라 남하하다가 휴게소에 도착할 무렵 해가 밝기 시작했다. 두 시간여를 달리는 내내 그녀는 잠에 빠져 있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생머리가 창문에 기댄 얼굴을 덮어서 머리카락 사이로 삐져나온 콧날이 더듬이처럼 도드라졌다. 어둠에 포섭되는 빛의 양에 비례해서 그녀의 상체가 서서히 내 쪽으로 뒤틀어졌다. 어둠이 농담의 질량에 따라 분화되며 그녀의 얼굴에서 명암의 향연을 벌였다. 볼가진 이마와 코가 만든 오롯한 그늘에 덮여, 눈은 떠 있지 않아도 정적의 볼륨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었다. 입술은 빈틈없이 일직선을 그리며 야무진 모양새를 만들어냈다. 웃을 때의 어설픈 느낌과는 딴판이었다. 잠에 빠지면 풀어진 모습을 보일 만도 하건만 그녀에게서 완고함이 살짝 묻어났다. 베일에 싸인 눈과 말랑말랑한 질감의 코, 흐트러짐없는 도톰한 입술. 生氣는 긴장으로 무장한 채 두툼한 등산복안의 속살을 타고 흘러 봉오리 한가운데 탐스러운 씨방을 피워 놓았을 터였다. 그녀는 내가 바라던 세상과 닮았다. 그 날이 오면 춘풍에 눈이 녹 듯 나란 이가 사라져도 좋다고 생각했었지.
“어디쯤 왔어요?”
그녀가 길게 기지개를 켜고는 하품을 하며 물었다.
“여기쯤 왔죠.”
내 가슴팍을 가리키며 씩 하니 웃었다. 영문을 아는 지 모르는 지 그녀가 새초롬히 웃었다.
“무슨 잠이 그리 많으세요.”
“제가 좀 야행성이라서요.”
“날개가 있나 봐요, 겨드랑이에. 헤헤”
“분례 씨 맞죠? 2층 창문에는 어떻게…”
“어떻게 했을까요. 알아 맞춰 보세요. 히히”
그녀가 웃는다. 웃는 게 예쁘다. 그녀의 미소에서는 살롱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는 가식을 뼛속 깊이 이식하는 교양교육이라고는 받아본 적이 없을 것이다. 새벽의 창문 사건을 묻고 싶었던 마음을 접었다. 그녀를 그녀대로 살게 두자. 공포와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살가운 미소를 지닌 평민의 자식이다.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알고 보니 내가 지도의 경계를 넓히기 위해 변방을 헤매는 동안 진정한 땅 따먹기는 내면에서 벌어졌다. 내게 세상은 야망의 도구였다. 하지만 맞배지기를 당해 내가 세상의 산 제물로 바쳐졌음을 21세기에 유배된 후에야 알았다. 영사기의 발명자에게 영광을. 영화관이란 곳을 갔다. 멋 모르고 스크린 앞에서 어슬렁대다가 야유를 받았다. 빛 너머로 실루엣만 보이는 영사기사가 보였다. 내가 바로 그였다. 내 머리 속에서 탄생한 위대함을 세상 곳곳에서 실현하는 게 나의 꿈이었다. 세상은 나에게 스크린이었다. 하지만 놓친 게 있다. 내 몸은 또한 세상의 것이었다. 다른 인간들처럼 불완전함이 나의 숙명이었다. 불안은 필름을 잠식했고, 시간은 영사기를 망가뜨렸다.
“아저씨, 도착했어요. 다 큰 어른이 무슨 잠이 그리 많아요.”
‘그녀가 자고 있었는데…이런 또 되치기를 당했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