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연주
- 조회 수 222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프롤로그 - 혹시 아이를 사랑한다면서 원수처럼?
‘꿈이 교사였니?’라는 선배의 물음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 채로 사범대생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고3시절 단지 학교를 벗어나 자유로울 것 같은 대학생이 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사범대생으로 3년을 지내는 동안 교사의 역할이 나와는 어울리지 않고 교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나는 자격이 미달이며 온갖 핑계를 대면서 교사를 내 미래의 꿈으로 그려 넣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3학년 전공수업 시간에 만난 ‘나무 심는 곽탁타 이야기’는 내가 교사의 꿈에 한 발짝 다가 설 수 있게 했다.
“ 나는 나무를 오래 살게 하거나 열매가 많이 열게 할 능력이 없다. 나무의 천성을 따라서 그 본성이 잘 발휘되게 할 뿐이다. 무릇 나무의 본성이란 그 뿌리는 펴지기를 원하며, 평평하게 흙을 북돋아주기를 원하며, 원래의 흙을 원하며, 단단하게 다져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심고 난 후에는 움직이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 일이다. 가고 난 다음 다시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심기는 자식처럼 하고 두기는 버린 듯이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나무의 천성이 온전하게 되고 그 본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성장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자라게 하거나 무성하게 할 수가 없다. 그 결실을 방해하지 않을 뿐이며 감히 일찍 열매 맺고 많이 열리게 할 수가 없다.
다른 식목자는 그렇지 않다. 뿌리는 접히게 하고 흙은 바꾼다. 흙 북돋우기도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한다. 비록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이 지나치고 그 근심이 너무 심하여, 아침에 와서 보고는 저녁에 와서 또 만지는가 하면 갔다가는 다시 돌아와서 살핀다. 심한 사람은 손톱으로 껍질을 찍어보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조사하는가 하면 뿌리를 흔들어보고 잘 다져졌는지 아닌지 알아본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나무는 차츰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다. 달리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 유종원(柳宗元)의 <종수곽탁타전種樹郭橐駝傳>
나무 심는 것에 빗대어 이렇게 명쾌하게 교육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던 옛사람의 글재주에 감탄하며 내가 교사가 된다면 아이들의 주어진 천성을 거스르지 않고 본성이 발휘되도록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이제까지 교사의 역할을 거부하며 가르친다는 것에 자신감이 없었던 것은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하는지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이었나 보다. 낙탁타의 나무를 기르는 노하우를 들으며 왠지 나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가끔씩 왜 교사가 되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내가 만난 선생님들을 떠올린다. 성장하는 시기에 적절한 지원을 해주시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신 고마운 그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기억에 남는 선생님하면 학창시절의 지긋지긋했던 공부와 함께 끔찍한 기억의 일부로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나는 운 좋게도 각 시기마다 따뜻하게 이끌어주셨던 선생님과 유쾌했던 친구들과의 추억들이 더해져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특히나 지금 교사의 삶을 살아가는 나에게 훌륭한 자산이 되고 있다.
어린 시절 나는 또래아이들에 비해 모든 것이 느렸다. 말과 행동,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에 한글을 배우는 것까지도. 우리 부모님은 곧 초등학생이 될 첫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할 때가 되어서도 한글을 제대로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것에 적잖이 걱정을 하셨다. 남들이 보기에 여러모로 능력이 부족해 자칫 보자라 보이기까지 하는 나에게 유치원 선생님은 졸업기념 학예회에서 솔로몬의 지혜란 연극에서 시녀역할과 동화낭독을 맡겨주셨다. 하나는 솔로몬임금의 지혜에 대한 연극을 하는데 무대에서 왕의 옆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키는 궁녀역할이었다. 지나치게 내성적이었던 내가 친구들과 연극에 참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인 무대에 서서 발표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못 하겠다고 한동안 툴툴거렸지만 선생님은 다그치지 않고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격려하며 기회를 주셨다.
사실 무대 위에서 아무 대사 없이 왕 옆을 지키는 시녀역할을 하는 것은 그래도 할만 했다. 문제는 동화낭독이었다. 2페이지 분량의 짧은 동화를 남자아이와 함께 절반씩 읽으면 되는 데 나는 2달 뒤에 초등학교에 입학해야하는 데도 한글을 읽고 쓰는 데 무척 서툴렀다. 나서기 부끄러워하는 성격에 글까지 읽을 줄 모르니 학예회에 역할을 맡는 것은 내 생각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끝까지 나를 믿고 역할을 맡기셨고 기다려주셨다. 엄마는 읽기 능력이 약한 나를 위해 특단의 조치로 발표문 1장을 다 외우도록 도와주었다. 엄마가 불러주는 내용을 외우다보니 어느새 발표날 내가 낭독해야 하는 분량의 동화속의 한글에 익숙해졌고 다른 글도 덩달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었다. 유치원 선생님이 재주가 없다고 탓하지 않고 발표할 기회를 주고 너는 해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셨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고 그것이 지금의 나로 성장하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
지식 습득 능력이 유난히 느렸던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받아쓰기에 서툴고 구구단을 모두 외우지 못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기초학력의 중요함을 강조하던 분이셨는데 새학기에 처음 본 시험에서 기준미달의 성적인 아이들에게 나머지 공부를 시키셨다. 선생님은 9단까지 외울 수 있을 때까지 방과후에 남아서 공부하도록 지도하셨고 5단까지는 알고 있던 나는 몇 주 뒤 9단까지 술술 말하게 되었다. 그때 기억을 떠올려보면 나머지 공부를 하는 동안 내가 구구단을 잘 모른다고 선생님이 나를 다그치거나 때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남아서 공부를 하는 것이 부끄럽고 상처로 기억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구구단을 외우는 내내 그날 공부할 분량을 마치면 칭찬해주셨고 9단을 모두 외우게 되자 선생님은 정말 잘했다며 업어주셨다. 나도 하면 되는 구나하는 자신감과 선생님께 인정받았다는 자존감에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소극적이고 수줍음이 많아 관계맺기에 서툴렀던 나에게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은 구세주였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친근하게 지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셨는데 지금까지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마니또 행사다. 그 행사는 1학기 동안 매주 진행되었는데 그때 학교 다니는 것이 특히 설레고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니또를 뽑으면 자신의 마니또가 모르게 선행을 베풀고 마니또를 발표하는 날이 되면 친구를 위한 작은 선물과 정성어린 편지를 준비해서 전했다. 마니또 기간 동안 나를 뽑은 친구가 누구일지 상상하면서 즐거워했고 내가 뽑은 친구에게 어떻게 하면 잘 해줄 수 있을까하며 친구를 위한 이벤트를 준비하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선생님을 마니또로 뽑았는데 어떻게 하면 선생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생각을 하다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매달 보는 시험에서 내가 처음으로 1등을 했다. 선생님을 나에게 학교생활이 재미있다는 것과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셨다. 무엇보다 상대방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다양하며 내가 작은 관심과 배려를 표현하면 상대방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끔 선생님의 관계맺기 방법을 써먹기도 한다.
우리반 지각대장이었던 나의 엉덩이를 1년 내내 얼얼하게 했던 야구방망이를 추억하면 중3 담임선생님이 떠오른다. 체육 선생님이셨던 담임선생님은 한눈에 보기에도 맞으면 정말 아플 것 같은 단단한 몽둥이 하나를 항상 들고 다니셨다. 우리반 아이들이 성적이 떨어지거나 친구들과 싸우거나 하면 그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곤 했는데 나는 그 몽둥이로 맞아본 일이 거의 없다. 대신 지각생 전용 회초리인 야구방망이가 매일 내 차지였다. 선생님은 기초 생활습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고 그것이 학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하시는 분이셨다. 나는 학교에서 성실한 축에 속했지만 문제는 학교에 오기까지였는데 중학교 3학년 1년 동안을 하루도 빠짐없이 거의 매일 지각을 했다. 학교에서 생활지도 담당이셨던 담임선생님께서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지각생을 관리하셨고 지각을 하면 예외 없이 야구방망이로 3대를 맞았다. 나는 1년 내내 매일 등교와 함께 야구방망이 엉덩이 찜질로 학교에서의 하루를 시작을 했다.
혹시 담임선생님이 여자라고 봐주셔서 살살 때리셨냐고? 여중이라 여자라고 봐주는 것은 안 통했다. 사실 나도 맞을 때 마다 너무 아파서 내일은 절대 지각하지 말아야지 하며 다짐했지만 작심삼일에 미치지도 못하고 다음날 어김없이 지각을 했다. 어느 날은 너무 맞는 것이 싫어서 복도에 계신 선생님이 다른 친구를 지도하는 사이 다른 교실로 들어가 베란다를 통해 선생님 몰래 살금살금 우리반에 숨어들어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맞는 것이 싫고 아프면서도 담임선생님이 지각 때문에 체벌하시는 것에 대해 원망을 한 적이 없다. 내 기억에 선생님은 감정적으로 체벌을 하시지 않았다. 학교와 학급에서 정한 규칙에 어긋나는 경우에 대해서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셨다. 이 녀석은 아무리 가르쳐도 바뀌지 않는구나하며 포기하지 않고 나의 지각하는 버릇을 고쳐주시려는 선생님의 진심어린 마음이 느껴졌다. 비록 중학교 시절에는 지각대장이었지만 선생님덕분에 지각이 바람직하지 않은 습관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 불편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고등학교에서는 중학교 때보다 멀어졌지만 거의 지각하지 않게 되었는데 특히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제일 일찍 등교하는 학생 중 하나였다.
전형적인 문과기질이라며 수학과 과학 보기를 돌같이 하던 나에게 고3 담임선생님이 물리선생님이라는 발표는 청천벽력이었다. 2학년 물리시간에 매일 앞에서 재미없고 어렵다면 잠만 자던 나를 떠올려보면 괘씸한 제자일 테니 1년 동안 선생님 눈 밖에 났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물리라는 과목이 너무 어려워서 맨 앞에 앉아 졸면서 수업듣기를 자체 거부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를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은 나의 기우에 불과했다. 선생님은 나를 비롯해 우리반 아이들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애정을 보여주셨다. 선생님은 수업이 비는 시간이면 종종 우리반 아이들이 수업 받는 모습을 바라보곤 하셨는데 어찌 생각하면 선생님이 우리를 감시한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우리반 아이들 대부분은 우리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받아들여 고마워했다. 지금이야 일상처럼 하지만 벌써 15년 전에 우리반이 활동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을 하여 1년이 지났을 때 영상을 보여주시기도 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반 아이들이 생일을 맞이하면 따로 교무실로 불러 책을 선물로 주셨던 일이다. 선생님은 그 아이와 어울리는 책을 고르시고 짧은 글을 책 뒷장에 정성스럽게 적어 주셨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친구들을 위해 이번엔 어떤 책을 골라오셨을까 어떤 글을 적어주셨을까 궁금해 하며 생일인 친구가 교무실을 나오자마자 둘러싸서 보여 달라곤 했다. 나는 그때 이후 가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이 선물로 주신 책을 펼쳐보게 되었다. 사실 책의 내용보다 책의 마지막 장에 적어주신 선생님의 글을 보면서 힘을 얻곤 한다.
“ 연주야!
고달프고 힘이 들 때는 파란 하늘을 보렴.
푸른 하늘처럼 넓고 깊고
푸른 마음으로 노력한다면
좋은 결과 있으리라 믿는다.
95.8 서재정 ”
소극적이고 표현력이 부족했던 나는 선생님을 통해서 작은 정성으로 애정 어린 마음을 표현하면 상대방을 기쁘게 할 수 있음을 배웠다. 특히 구성원 모두에게 공평하고 한결같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셔서 교사가 된 이후로 선생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었다.
내가 교사의 역할을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망설이던 대학교 4학년 때 예비교사로 경험한 교생실습은 교사가 된 결정적 계기였다. 나는 모교로 교생실습을 나가고 싶어서 신청을 했는데 다행히 1달을 모교의 2학년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다. 당시 아이들이 나를 잘 따라주어 즐겁게 생활을 했고 무엇보다 교생담당 선생님의 관심과 배려는 지금까지도 고마움으로 기억된다. 교생실습을 나간 첫날 선생님께서는 만나서 반갑다고 악수를 청하시며 “나는 선생님을 학생이 아니라 동지로 생각합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데 감동이었다. 내가 마냥 어린 학생이 아니라 선생님의 역할을 해야 하는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료로 인정해주는 선생님이 고마웠다.
본교무실 한 구석에 교생들을 위한 책상이 있었음에도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교무실이 조용해 공부하기 좋다며 교생실습 내내 나를 위해 자신의 옆자리에 책상을 마련해 주셨다. 교사가 되려면 무엇보다 실력이 있어야 한다며 전공과목을 공부하도록 배려해주시고 교육과정해설서 특강도 해주셨다. 그리고 동료간의 소통이 중요하다며 실습기간 동안 자주 나를 위해 같은 교과 선생님과 함께 회식자리를 마련해주시며 교사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다. 함께 교생실습 나온 친구들이 부러워하며 번번이 나를 따라 나서곤 했다. 흔히 사범대생은 교생실습을 계기로 교사의 길을 선택하거나 포기한다고 하는데 나는 전자의 경우다. 교생실습을 나가기 전까지는 교사의 길을 내가 가야한다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교생실습을 하는 동안 담당했던 아이들과의 즐거운 추억과 교생담당 선생님의 관심과 배려 덕분에 교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더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 학교에 있음을 발견했다.
내 기억 속에 강력하게 남아있는 6분의 선생님을 떠올리면 그분들 덕분에 내가 이렇게 성장을 해왔다는 것에 마음이 따뜻해지고 교사로 생활하는 속에서 힘을 얻곤 한다. 그 선생님들의 공통점은 세상엔 다양한 삶의 방법이 있음을 몸소 알려주시고 느리고 겁 많은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며 지켜봐주셨다는 점이다. 각각의 선생님이 원하는 학생상이 있었을 테지만 나에게 그것을 강요하지는 않으셨다. 내 걸음걸이에 맞게 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시되 다그치지는 않으셨던 것이다.
나에겐 이렇게 좋은 선생님들을 만난 행운이 있었는데 나를 만난 아이들도 그렇게 느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매 학기가 시작되면 아이들에게 김연주라는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한 번의 기회이기 때문에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려고 노력을 했다. 그런데 나의 10년 교사생활을 돌아보니 내가 학창시절 선생님께 배운 것들을 내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적용하고 있었다.
유치원 선생님처럼 능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하는 아이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주려고 노력했고,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처럼 기초학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이른 아침이나 방과후에 보충수업을 해주며 못 한다고 다그치지 않고 작은 성과에도 칭찬을 해주려 노력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처럼 마니또처럼 함께 하는 활동을 통해 학교가 즐겁고 신나는 곳이 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고, 습관적으로 지각하는 아이들에게 기초생활습관이 삶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임을 알려주려고 했다. 때론 직접 만든 케이크나 선물로 아이들의 생일을 축하하며 기쁨은 함께 나눌 때 더욱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아이들에게 자신이 이미 창조의 씨앗을 품은 존재임을 알려주기 위해 모닝페이지반을 만들어 운영하여 아이들이 이미 타고난 재능과 강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키워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이 책에서 나는 10년 동안 교사를 하면서 만난 창조의 씨앗을 품고 있는 창조적인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자신에게 있는 창조의 씨앗을 인정하지 않고 발견하지 못해 아직 기다림을 견디는 아이들도 있고, 이미 창조의 씨앗을 찾아내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으려는 아이들도 있다. 그 아이들은 만난 나는 우리나라 공교육 속의 평범한 교사였지만 아이들이 품고 있는 창조의 씨앗을 발견하면서 나도 창조적인 교사가 되어 갔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아이들이 모두가 이미 갖고 있는 창조의 씨앗을 발견하는 것보다 그것이 세상 밖으로 고개를 밀고 나와 싹을 틔울 수 있도록 든든한 지원과 적절한 조치를 해줄 삶의 멘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 다니는 평범한 아이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을 보이면서 삶의 멘토가 되어 줄 사람은 학교에서 만나게 되는 교사나 가정에서 함께 생활하는 부모님이 적격이다. 그 둘이 함께 아이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낸다면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에 든든한 힘이 실릴 것이다. 삶의 멘토는 아이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아이들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다. 만약 멘토를 자처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대로 아이들이 디자인되기를 바란다면 곽탁타의 말처럼 ‘비록 사랑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해치는 일이며, 비록 나무를 염려해서 하는 일이지만 그것은 나무를 원수로 대하는’ 격이 될 수 도 있다. 선택과 실천은 온전히 아이들의 몫이고 우리가 믿음의 끈을 놓지만 않는다면 아이들은 자신의 본성에 부합하는 스스로가 선택한 길을 용기를 내어 당당하게 걸어갈 것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