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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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구멍을 벌름거리게 하는 것
벌렁벌렁 속살이 아른거리는 것
왁자지껄 년놈들의 수다가
청산도를 넘어 귓전을 맴도는 것
이 모두가 사랑이라면
나는 불륜에 빠진 위험한 중년이다
여행을 마치자 봄이 왔다. 3박4일의 일정이었다. 나는 일정의 딱 반 토막을 함께 하고 일행과 헤어져 귀경했다. 시작부터 끝을 의식하는 여행이 되었다. 後에 알았다. 그 이틀을 국물 한 방울 남김없이 탐닉하고 싶었다.
첫째 날
청주 교도소. 우리의 수료여행은 서른 다섯 살의 수감인을 면회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선생님과 일년에 몇 번 편지와 책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푸른 수형모 아래 검은 뿔테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누구랑 닮았는데…그래 ‘싸구려 커피’의
일행이 나눠 탄 세 대의 차는 봄기운에 취해 일직선으로 뻗은 국도를 구불구불 달려나갔다. 전주로 통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했을 때 연주의 질주본능이 폭발했다. 뒤에서 본 그녀는 이지 라이더였다. 그녀의 애마 검은색 스포티지는 빈틈이 조금이라도 보일라치면 차선을 바꿔 종적을 감추곤 했다. 1시간여를 달려 전주에 도착했다. 한옥마을을 가로질러 진철이의 자부심,
천담에 도착하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되었다.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 누군가 춤추고 싶다고 한 말이 첫째 날의 정규 프로그램이 되었다. 누가 얘기를 꺼냈건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인건이어야 했다. 선생님께서는 다음날 떠나는 인건이의 바람을 알고 계셨던 게다. 낯선 신작로에 차를 세우고 선생님은 통화자로부터 ‘자유’라는 키워드를 얻었다. 다음날 최고 80mm의 비가 내린다는데 하늘에는 밀키웨이가 쏟아지고 주변에서는 온갖 자연의 소리가 난무했다. 칠흑 같은 밤을 달려 광주에 도착했다. 마음을 좇으니 주변 배경이 은하계에서 태양계로 바뀌었다. 그 곳은 젊음이 도처에 깔린 향연의 자리였다. 춤이 노래가 되고 새벽녘을 맞았다. 하루 일정을 마감하고 곯아떨어져야 할 때 인건이는 떠났다. 남들에게는 위태로워 보일 지라도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키는 것이 그에게는 타협할 수 없는 도리였다.
둘째 날
Rainy day. 아침밥을 먹는데 빗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남도를 훤히 꿰신 선생님의 안내를 따라 장흥 보림사로 향했다. 보림사는 여느 절과는 사뭇 달랐다. 건축양식만 보면 향교를 떠올리게 했다. 단청 색깔도 튀지 않고 담백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고 6.25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된 절의 그림 중 十牛圖와 지옥도가 기억에 남는다. 특히 지옥도는 유치했지만 그 생생함으로 인해 충분히 경계의 마음을 불러 일으켰다. 시리즈로 그려진 지옥의 모습에서 다들 자기 그림자 하나씩을 확인하고 뜨끔해 하는 눈치였다. 절을 나서다가 진철이는 보림사 사천왕상을 지나치지 못하고 입을 놀려 씨방새가 되었다. 장흥 토요시장에 들러 병어, 키조개 등 저녁 찬거리를 마련하고 정남진으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바다를 보는 순간 숙박장소가 정남진으로 정해졌다. 바다에 홀린 사내와 아낙들이 차창을 열고 소리를 지르고 서로의 차에 하이빔을 쏴 댔다. 비 오는 도로에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 또한 비오는 날 꿈꾸는 로망 중의 하나였다. 당초 예정했던 횟집이 휴일이라 바다를 건너기로 했다. 3km 길이의 방조제를 활주로처럼 달렸다. 빗방울이 굵어졌고 물안개가 짙어졌다. 먹물로 하늘을 그리니 색이 번져 바다가 되었다. 비오는 날에 어울리는 집을 찾아냈다. 비닐하우스에 철판 슬레이트를 덧 댄 그 곳의 메뉴는 석화구이와 산낚지와 회였다. 솥뚜껑 같은 판에 석화와 키조개를 올리고 장작불로 지글지글 익혔다. 석화의 껍질을 열기 위해서는 연장이 필요했다. 다 같이 연장을 드는 순간 우리가 뼛속 깊이 길남파로 물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음성이 깔리고 말이 상스러워졌다. 그 와중에 선생님의 일분 강의가 이어졌다.
“너희들 광어와 도다리를 어떻게 구분하는 줄 아니?”
“…”
“광어는 왼쪽, 도다리는 오른쪽으로 눈이 몰린다. 광어와 왼쪽은 두 글자, 도다리와 오른쪽은 세 글자니까 기억하기 쉽지.”
소주가 일순 돌고 슬레이트 지붕을 치는 빗방울소리가 거세졌다. 미옥이가 소주병을 마이크 삼아 심수봉의 '사랑밖엔 나 몰라'를 불렀다. 꺾여진 가락을 따라 그녀가 거쳐온 지난 1년의 울돌목이 튀어 나왔다. 연구원과정을 회고하고 동기들이 나를 말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우성이형의 제안으로 전날 인건이에 이어 내 차례가 되었다. 기타와 함께 이어진 연구원 수료의 세리머니가 내면에서 묘한 화학작용을 일으켰다. 노래를 하다가 갑자기 목이 매였다. 그건 고된 훈련 끝에 금메달을 딴 감격의 눈물이 아니었다. 힘겨운 인생에 표하는 서러운 눈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저 깊은 내면에서 두꺼운 더께를 뚫고 터져나온 한줄기 외침 같은 것이었다.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을 때 올 것이 왔음을 알았다. 비는 더 세차게 지붕을 때렸고 나는 더욱 내면의 반응에 몰입했다. 섬광이 균열된 틈 사이로 자신을 드러내었다. 그 정체를 찬찬히 음미하고 싶었지만 균열이 오래지 않아 메워질 것도 알고 있었다. 빛의 노출시간을 늘리는 것이 내 인생의 과제가 될 것 같다. 균열은 연구원이 된 후 실금으로 시작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균열은 임계점을 넘은 것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인생의 변곡점이 이런 걸까. 지켜볼 일이다. 분명한 건 내가 느낀 것을 동료들도 느꼈다는 것이다.
‘지금 여기’, ‘옆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맨 얼굴’이 나의 생을 채우는 양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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