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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 해가 바뀌어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이 조금씩 부담이 된다.
그만큼 지고 가야할 짐들이 하나씩 늘어나는 것 같다.
할 수만 있으면 내려놓고 싶고 누군가 나의 몫을 대신 짊어지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 들곤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나의 무게는 더욱 배가가 된다.
이 천 년 전 누군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갔다는 이야기는 동화책 속의 전설로 남아 일요일 딱한 번 나의 귓가를 그냥 지나간다.
어릴 적 바바 하라다스의 <성자가 된 청소부>를 읽었었다.
책제목을 그대로 받아들인 나는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청소부가 되어야 하는 줄 알았던 조금은 순진한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용감하게 청소부가 되기를 염원하고 실제로 지원을 하자 당시 면접관은 그런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대학 나오고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무엇 아쉬워 그럴까 하는 의심의 눈길 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청소부도 아무나 되는 건 아닌 모양이라고.
출근길 그들을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쳤다. 예전 주황색 계열에서 복장만 바뀐 채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들을.
전날 사람들의 먹고 뱉은 오물과 사용 하다가 남은 배설물들을 차에 하나둘 실은 것이 어느새 한 가득이다.
그것이 바깥으로 넘치지 않게 끈을 매고 부둥켜안고 안간힘을 쓴다.
삶의 몫을 더욱 부여잡듯 손아귀와 어깨의 힘으로 종내 버텨낸다.
자신에게 주어진 아픔과 고뇌도 버거울 터인데 그들은 타인의 무게와 짐까지 이고 지고해서 또 다른 어딘가의 장소로 이동을 시킨다.
하루를 보낸 찌꺼기 그것에서 뱉어진 악취를 감내하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도 오늘도 그들은 자신의 일을 소리 없이 해나간다.
묵언수행을 하고 있는 건 아닐 터이고 남들이 알아주는 온갖 화려한 직업이 있음에도 왜 그들은 이 일을 선택 했을까.
사명감 때문에 한다고 하면 너무 미화한 말이겠지.
아무래도 생계 문제로 혹은 살아갈 방도를 찾다가 선택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돈벌이로만 여긴다면 너무나 이일은 해나가는데 부칠 것 같다.
남들의 따가운 이목을 뒤로하고 땀으로 범벅이 되고 세상의 때로 범벅이 되어 작업을 마친 후 샤워를 할 때의 그들의 느낌은 어떠할까.
시원함일까. 만족감일까. 아쉬움일까. 보람일까. 오늘 하루도 드디어 지나갔다는 한숨의 순간일까.
아니면 삶의 뒤안길을 온몸으로 느끼고 온 착잡함일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맡겨진 소임지에서 어느 누가 뭐라고 하던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아들의 모습인 그들이 전날 세상사의 풍경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각자 짐들의 무게가 넘쳐나 포화상태가 되고 그 포화는 예기치 않은 돌발 상황을 일으킨다.
돌아가는 체인벨트에 적절한 기름이 쳐지고 아귀가 떨어져야 하는데 또 다른 사단이 일어난다.
기억 했으면 좋겠다. 어떤 일이든 어떻게 하는 일이든 나에게 주어진 소명 그것이 멈춰 버리면 연계된 또 다른 무엇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감사 했으면 좋겠다.
신문을 돌리는 이들로 인해 전날의 세상 소식을 알 수 있듯이
우유를 배달하는 분들로 인해 건강을 지킬 수 있음을
밤새 제설작업을 했던 분들로 인해 출근길 안전운전을 할 수 있음에
구두를 닦아주는 그들로 인해 매너 있는 신사의 모습을 연출할 수 있음에
낮과 밤의 이중적인 세상의 오물을 제거하는 그들이 있었기에 아침의 또 다른 상쾌함과 기분 좋음을 맛볼 수 있음에
단지 그것을 밥벌이로 오늘 일을 나가지 않으면 끼니를 걱정해야 하기에 라는 심정으로 치부 해 버린다면 너무 세상은 살아가기에 서글프고 서러운 것 같다.
고달픈 세상 힘든 세상 그 가운데에서도 아무도 모르는 성자의 모습으로 묵묵히 존재하는 이들이 있기에 그래도 조금은 짊어진 짐이 덜어진다.
나는 성자일까 청소부일까.
아니 어느 쪽을 지향하며 지금을 살아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