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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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해가 지려한다
자꾸만 지려고 한다
하루 왼종일을
계곡에 눈녹아 흐르는
물소리만을 들었는데
아직 걸터 앉았던
바위의 온기조차 식지 않았는데
벌써 해는 지려고 한다
자꾸만 산등성이 너머로
숨으려고만 한다
경칩이 엊그제
낮으로 녹고
밤이면 다시 얼어붙는
덕유산 원추리의
봄은 아늑하게 멀기만 하다
여기서 금강이 천리길이다. 봉황이 떴다는 뜬 구름같은 이야기가 담긴 샘은 오늘도 숨죽여 울음만 쏟아내고 있다. 뜬봉샘 늦은 산그림자 너머로 짙어지는 경계. 물조차 나뉜다는 수분리水分里. 저 너머로 흘러가는 것들은 다른 이름을 갖는다. 섬진강이다. 산과 산 사이, 산과 바다 사이를 강이 흐른다. 먼 하늘에서 부서져 내렸지만, 대지의 육체 그 굴곡진 틈을 따라 흐른다. 더 낮고, 더 깊은 곳을 향해서.. 저 대지 깊숙한 곳으로부터 당겨 오는 힘에 이끌려 간다. 그것이 그들의 삶이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만 들린다.
어제 오늘은 하루 온 종일 계곡의 물소리만을 들었다. 늦은 해가 뜨고, 이따금씩 바람이 골짜기를 따라 거슬러 오건만 사람 그림자 하나 없다. 산비탈 굽어지는 길을 따라 눈길이 머물러도 보지만, 그길 돌아 반겨드는 이도 없다. 아침에 잠깐 울던 새도 오후 햇볕에 시들해졌는지 통 들리질 않는다.
무엇이 여기까지 부른 것일까.
내 그림자는 왜 여기 서 있는 걸까.
칠연계곡으로 이어지는 굽이 굽은 길을 따라 망설이던 걸음을 멈추었다. 구름조차 바람의 시샘에 잠시 머물기 꺼려하는 이곳에 앉았다. 이따금씩 얼음장 주저앉는 소리에 마음도 무너져 내리곤 하지만 그 때 뿐이다. 미끄러지듯 바위 위를 흘러 깊은 진녹색 소에서 두어 번 용을 쓰다 이내 사라져버리고 만다. 다시 세찬 물줄기만 여전히 귓전에 머문다. 나는 다만 오늘도 흘러가는 것들만 듣고 있다.
딱 이맘 때 쯤이었다. 산수유 빛깔에 취해 지리산 자락을 베고 누웠던 일이 있었다. 한 시인과의 짧은 인연을 떠올렸다. 쌈지자락 같은 주머니에서 꺼낸 만년필로 제 몸 쥐어 짜내어 쓰듯 적어준 글귀가 비쳐든다.
“강물이 흘러가는 길이 곧 순리다. 삶이 순리를 지키기만 한다면야 어찌...”
얼핏 강물 위로 그의 얼굴이 스쳐간다. 물오른 버들강아지 같은 웃음이다. 간지럼을 타는 것이 봄이 멀지 않았나 보다. 하기사 벌써 경칩도 지났다는데. 그렇지만 석 달 열흘보다 더 길었던 겨울 덕유산... 원추리가 피려는 유월까지는 아직 석 달 열흘이 더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