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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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 마른 풀밭위에 누비이불처럼 깔린 눈이 절 입구까지 이어져 있었다. 일주문을 지나니 차례로 9층, 7층, 7층 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일찍이 절을 찾은 관광객들이 석탑이며 석불군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꼭두새벽의 서울이 한겨울이었다면 운주사 너른 경내는 봄이 머지 않은 雪國의 궁궐을 연상시켰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이곳을 찾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났다. 이 곳은 나에게 사찰이라기보다는 놀이터였다. 법주스님부터 젊은 사미스님까지 모두가 친구였다. 30년 만의 귀향이 되었다.
“저 할매 앞에서 한장 찍어요. 우리.”
그녀가 바위에 나란히 기대어 있는 네 개의 석불군 중 하나를 가리킨다. 지나가던 관람객에게 카메라를 맡긴 그녀는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고 ‘할매’ 앞으로 나를 이끌었다.
“눈에 힘 좀 주세요.”
그녀는 링 사이드로 복귀한 복서에게 트레이너가 기를 불어넣듯 내 양 어깨를 툭툭 쳤다.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빛을 피하다 목덜미에 시선이 머물렀다. 긴 머리가 어느새 당고머리로 말아올려져 등산모자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치즈.”
“치즈.”
그녀의 선창을 나도 어색하게 따라 했다. 그녀가 앞서고 나는 뒤를 따라 대웅전을 거쳐 공사바위에 이르렀다.
“여기서 잠깐 쉬었다 가요.”
그녀는 도선국사가 천불 천탑의 공사를 감독했다던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녀의 옆에 파인 곳을 찾아 앉았다.
“운주사는 처음이 아닌가봐요?”
“처음인데 참 편하네요. 뭔가가 나를 인도하는 기분이에요. 히히.”
“분례씨는 고향이 어디에요?.”
“글쎄요… 오래 전이라 잘 떠오르질 않네요.”
“…여기가 제 고향입니다.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번지.”
“그럼 부처님이 아버님이세요?”
“그런 셈이죠.”
“두 개의 눈과 다섯 개의 구멍.”
얼굴만으로 이루어진 불상을 바라보던 그녀는 내 말에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는 듯 했다.
“이 불상을 아세요?”
“어렸을 때 호형호제하던 사미스님한테 이야기를 들었죠.”
“재밌겠는데요. 하하.”
“도선국사가 이 절을 지을 때 각지에서 인부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물론 별별 사람들이 다 있었겠죠. 국사의 지도로 절은 놀랍도록 빨리 지어졌습니다. 현재의 건축기술로도 그 속도를 따라 잡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완공을 얼마 남기지 않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인부들이 하나 둘씩 죽어갔습니다. 죽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목에 물린 상처가 있었다고 합니다. 보다 못한 국사가 삼천배를 올렸습니다. 삼천배가 끝나갈 무렵에는 땀을 비오듯 흘리며 탈진할 지경이 됐습니다. 그 때 부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어린아이가 부처가 될 수 있느냐?” “네” “여자가 부처가 될 수 있느냐?” “네” “사람의 피를 먹는 사람은?” “…” “대웅전 뒤로 가 보거라.” 밖은 아직 어두웠습니다. 대웅전을 돌아 바위산에 이르니 무언가가 땅에 웅크려 킁킁거리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국사는 속으로 ‘관세음보살’을 외며 조심조심 다가갔습니다. 지팡이 넉 장 거리가 됐을까. 물체 위에 올라탄 짐승과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짐승이 아니었습니다. 그 눈은 인간의 분노를 담고 있었습니다. 방금 빨아들인 피의 온기가 입술을 타고 허연 입김으로 증발되고 있었습니다. 옅은 피비린내가 전해진 것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요물아, 썩 물렀거라.” 요물은 목을 좌우로 틀며 코를 킁킁거렸습니다. 인부 행색을 한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국사를 요모조모 살폈습니다. 마음이 어지러워진 국사는 눈을 감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수도 없이 읊조렸습니다. 서늘한 기운이 다가온다 싶더니 요물로부터 새어 나오는 거친 숨소리와 피 냄새에 안면근육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놈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국사의 목덜미를 찬찬히 훑어보는 듯 했습니다. 어느 순간 콧바람이 탱탱하게 긴장된 경동맥에 전해졌습니다.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그 때 꼬끼오, 닭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서늘한 미풍이 귓전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눈을 떴습니다. 제물이 된 인부의 멍한 시선이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 얘기하고 이 불상이 무슨 관계죠?”
그녀는 깍지긴 두 손을 콧등에 대고 머뭇거리며 물었다.
“무서우세요. 하하. ”
“그런 게 아니고… 그래서요?”
“죽다 살아난 국사는 그날 아침 바로 스님들을 소집했습니다. “인부 중에 흡혈귀가 있다. 어찌 했으면 좋겠냐?” 그런 걸 의논했겠죠. 근데 아니었습니다. 국사는 공사 중단을 명했습니다. 그리고 스님들을 모두 대웅전으로 모이라 하고 다 함께 삼천배를 올렸습니다. 부처님의 뜻을 구하기 위해서였죠. 절을 하다 쓰러진 일부 스님들을 독려해서 기어이 삼천배를 마쳤습니다. 해가 서산 너머로 지고 있었습니다. 국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습니다. “인부들을 모두 한 처소로 모으고 스님들이 지키라. 오경까지는 나 홀로 대웅전에 있을 터이니 이를 인부들에게 흘려라.” 이윽고 해가 졌습니다. 국사는 대웅전에 정좌해 염불을 외웠습니다. 자시 무렵 문이 활짝 열리며 대웅전에 켜둔 촛불이 일시에 꺼졌습니다. 지난 밤의 서늘한 기운이 목덜미에 와 있었습니다. “피는 갈증을 부추길 뿐이네.“ 곧게 편 국사의 오른손이 순식간에 요물의 인중을 타격했습니다. 저만치 나가떨어진 요물이 얼굴을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습니다. 국사가 나직이 말했습니다. “배속에서는 피를 원하겠지만 이제 피냄새를 맡지도 맛보지도 못할 걸세. 무엇을 죽여도 시원찮을 것이네. 부디 성불하시게.” 요물은 바로 자리를 떴고 그 후로 인부들이 상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국사는 부처님의 뜻을 기려 천불 중 하나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섯 개의 구멍은 五感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눈은요?”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는 눈. 마음의 눈인거죠.”
“감각의 세상이 마음의 눈을 거쳐 숙성되면 부처가 되는 건가요?”
“생각보다 노숙하시네요. 헤헤.”
와불로 가는 가파른 계단에 이르렀다. 그녀는 성큼성큼 잘도 걸었다. 가이드인 듯한 남자가 일행 앞에서 와불의 전설을 설명하는 걸 듣고 있는데 그녀의 시선이 자주 언덕 너머로 향한다. 시선을 흘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씩 웃었다. 꾸불꾸불 이어진 길을 걸어 언덕 정상에 올랐다. 와불을 흉내내는 듯 사파리 등산모를 쓴 중년 남자의 팔다리며 배를 베고 너덧 명이 누워 하늘을 보고 있었다. 깔깔거리는 그들의 웃음소리가 빈 하늘에 분수처럼 뿌려졌다. 그녀의 눈이 능선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 나는 그녀의 시선이 남긴 미세한 티끌들을 차곡차곡 모아갔다. 희미하게 그녀가 그려졌다. “언젠가 이런 능선 위를 달렸던 것 같아요.” 그녀가 독백처럼 말했다.
운주사 관람을 마치고 색동두부가 유명한 근처 음식점에 들렀다. 아침을 거른데다 점심이 늦어 식욕이 당겼다. 하지만 그녀는 입맛이 없다며 2인분 찬거리를 예사로 지켜 보기만 했다.
“아저씨는 많이 드셔야겠어요.”
“왜요?”
“빈혈이 있지 않으세요?”
“그걸 어떻게…”
“오래 사셔야죠. 히히.”
귀경 버스 안에서, 그러니까 구제역 방역 초소를 지날 때쯤 과묵한 그녀가 자신의 어릴 적 얘기를 꺼냈던 것 같다. 섭섭이, 할머니, 마포 나루터, 복사꽃…그런데 단어들만 띄엄띄엄 기억날 뿐 이야기가 이어지지를 않는다. 식곤증 때문인지 졸음이 몰려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시 반포터미널에 와 있었다. 바래다 주겠 다는 청을 마다하고 그녀는 편의점 앞에서 짧은 미소로 작별 인사를 대신했다. 늦은 밤 그녀는 언덕길을 또박또박 걸어 올라갔다. 길이 꺾여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그녀가 돌아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눈 뜨지 말고 자요. 잠꾸러기 아저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