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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어찌 보면 단순하다. 화가 났을 때 짜증날 때 스트레스 받을 때 그것을 여자들의 경우처럼 수다와 쇼핑 같은 수단이 아닌, 보기에는 비생산적인 방법일수도 있는 술 한 잔으로 회포를 풀며 당시의 감정을 심하게 날려 버리기도 한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나의 가슴속 해결하지 못하는 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 선배 한사람의 넋두리와 동행이 되어 막걸리 한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것이 어느새 늦은 밤이 되었다. 그래도 비싼 택시비를 물지 않고 마지막 전철 꽁무니에 무사히 탑승한 것에 못내 행복한 마음으로 집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런. 술을 먹어서 그런가. 평소 눈에 뜨이지 않던 먼지들이 보이기 시작하여 건넌방에 있던 청소기를 끄집어내었다.
“승호씨. 이 시간에 무슨 청소를 하려고 해요. 그냥 자요.”
“조금만 할께. 방바닥이 찝찝해서 그냥 잠자리에 들기가 그래서 그래.”
나는 나의 고집으로 기어코 그 새벽에 청소기를 돌렸다. 아주 쪼금만.
행위를 이루었음에 기분 좋은 자족감으로 세면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초인종 벨을 누군가 누른다. 누구지?
인터폰 화면을 보니 아래층 그 여자다. 어쩐다.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와서 처음 집들이를 하던 날이었다. 사람들을 초대 하다 보니 여러 대화와 아이들이 뛰어 다니는 소리가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그래도 집들이니까 어쩔 수 없었고 이제까지 살면서도 한 번도 클레임이 제기된 적이 없었기에, 주위 분들에게 미안한 감은 있었지만 낭창하게 식사를 하고 있던 차 그녀가 들이 닥쳤다.
“아래층에 살고 있는 사람인데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싸늘한 표정에 눈에 쌍심지를 치켜든 그녀. 30대 초반은 되었을까. 신혼의 단꿈을 꾸고 있는 처지인 것 같았다.
“아, 예. 죄송합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질 않아 손님들을 초대해 집들이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내심 양해를 구하면 조금은 수그러들 줄 알았으나 그녀는 그렇질 않았다.
“누구는 집들이 해보질 않았나요. 그래도 그렇지. 아파트 전세 내셨어요. 제가 참다 참다 못해 올라왔는데 기본적인 에티켓이 있잖아요. 혼자 사는 곳도 아닌데. 의자 움직이는 소리가 계속 나고 아이들이 뛰어 다니고…….”
조금은 민감한 스타일인 상대방 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깨갱하는 수밖에. 확실히 서울은 무서운 동네구나. 경기도에 살 때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손님들을 보내고 그녀가 또 쫓아 올라올 것 같아 조심스럽게 뒷정리를 하고 있던 차 마눌님이 서러운지 말을 건넨다.
“승호씨. 우리 내일 쇼핑센터에 가서 가구 모서리에 씌우는 천을 사가지고 오자.”
우리는 다음날 의자 및 책상 등 소리가 날만한 모든 부문마다 두꺼운 천을 씌우는 응급조치의 작업을 하였다. 내참 더러워서라도 빨리 집을 사든지 해야지.
1년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이 인간이 웬일이람. 분명히 청소기 돌린 것 가지고 트집 잡으려 올라 왔을텐테. 자는 체를 할까. 아니야, 불이 켜져 있으니 그럴 수도 없을 것 같고. 어쩔 수 없었다. 문을 열어줄 수밖에.
“안녕하세요. 조금 소음이 났던 모양입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먼저 고백을 하였다.
“지금 시간이 몇 시예요?”
의도적으로 시비를 거는 그녀.
“아, 예. 집에 들어오니 안방이 조금 어질러져 있어 아주 잠시만 청소기를 가동 하였습니다. 실례인건 알지만 치우고 자야 되겠기에…….”
내역을 설명 하였다. 최대한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그걸 아시는 양반이 청소기를 돌려요. 작년에도 그러더니만.”
작년? 그랬다. 그녀는 아직도 그때의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이씨. 그 후로 우리가 얼마나 조심을 하며 지내었었는데.
“네. 죄송합니다. 잠시 움직인다는 것이 소음으로 났던 모양이군요.”
할 수 없었다. 내가 잘못 하였으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어찌되었든 꼬리를 내려야 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행동 하세요. 말이 나왔으니 하는 이야기인데 너무 하신 것 아니에요. 애기를 출산하고 해서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한 상태인데 오밤중에 소음을 내시고…….”
격해지는 그녀의 목소리가 옆집까지 들릴까 보아 민망하다. 일단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날씨도 쌀쌀한데 문밖에서 이러실 게 아니라 들어오셔서 이야기 나누시죠.”
현관에 들어서서도 그녀의 악담은 계속 되었다. 작년 집들이 때의 상황 리액션의 재연을 필두로 낮에도 소음이 들린다는 등 묵혀 놓았던 감정들이 줄줄이 터져 나왔다. 시간이 계속되자 일차적인 잘못에 침잠 해있던 나의 속마음이 들끓기 시작 하였다. 그래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듬과 동시에 서서히 열이 받기 시작한 것이다. 술도 한잔 걸친 입장이라 참다못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금일 건은 제가 잘못했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저희는 맞벌이 부부이기 때문에 낮에는 집에 사람이 없어요. 그러니 소음을 낼만한 것이 없거든요. 그건 잘못 들으신 것 같네요.”
나의 반격이 시작 되었다. 그래도 그녀는 부득불 우긴다. 열이 치받아 오른다. 이 여자가 진짜. 그렇다고 소모적인 공방을 계속 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시간도 그러하니 돌아가시죠. 저희도 자야 되니까요.”
나의 이말에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녀는 끝가지 나가지 않고 했던 이야기를 다시금 되풀이 한다. 참말로 대단한 여자네. 하기야 그러니 이 새벽에 남의 집에 남편을 보내지 않고 본인이 직접 찾아와서 이런 싸가지 없는 행동을 하지. 그래도 안 되겠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에게 이런 험담을 계속 들어야 하나. 억누르고 있던 나의 감정이 폭발 하였다.
“알겠다고 몇 번을 이야기 했나요. 그만 하시고 나가세요.”
내 목소리에도 아랑곳없이 그녀는 꼿꼿하게 눈썹을 치켜든다. 우와 미치겠네. 무슨 이런 여자가 다있나.
“성당 다니시는 입장에서 같은 교우로써 이렇게까지 이야기 했으면 웬만하면 넘어 가실법도 한데……. 나가세요. 나가시란 말이에요.”
그녀를 우격다짐으로 대문 밖으로 내보내었다. 해서는 안 될 이야기일수 있겠지만 그러했다. 그녀는 같은 성당 교우였다. 아마도 나의 입장에서는 그러기에 조금 더 양보를 할 수 있지 않나하는 나름의 기대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건 모르는 사람보다 더하니. 그녀도 그녀지만 나도 감정이 정리가 되질 않았다. 지독한 여자네. 내가 수많은 아줌마들을 만나 봤지만 진짜 별종이네.
“승호씨. 그래서 내가 청소기 돌리지 말라고 그랬잖아. 그리고 그렇게 이야기 하면 어떡해. 우리가 잘못 했는데.”
“나도 알아. 그래서 사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가 작년 일부터 시작해서 평소 낮에도 소리가 쿵쾅 거린다는 등 쓸데없는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잖아.”
우리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안방에서 문을 잠군채 사태를 파악하고 있던 마눌님은 볼멘소리를 한다.
“내가 못살아. 앞으로 성당이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어떡하려고 그래.”
“마주치면 마주치라지. 아무리 우리가 잘못했지만 웬만하면 내가 그렇게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했으면 대충 알아들어야지. 끝까지 대들기는. 그리고 정히 마주칠 것 같으면 계단으로 걸어 다니면 되지.”
다음날 일어나 어제 저녁 상황을 되새김질 해보니 한편의 코미디였다. 이게 무슨 꼴이람. 그래도 수긍이 힘들었다.
상종을 못할 여자.
그 이후 그녀를 만나기가 겁이 나는지 엘리베이터를 탈 때는 일단 눈치를 살핀다. 혹시나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얼마나 민망할까. 그래도 대범한 남자(?)인 내가 먼저 방긋 웃으며 다음과 같은 인사를 해야 되겠지.
“그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씨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