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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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사랑의 힘을 기적이라 불렀다
세상에 기적은 없다.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일광욕을 다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몸은 전쟁터 패잔병의 모습처럼 온몸이 만진창이 되었지만 따뜻한 태양 아래 누워있자니 정신이 들었다. 엔지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엔지의 지극한 간호가 없이 내가 일어났다면 그건 기적이다. 하지만 엔지는 자신의 시간과 수고는 모두 잊은 모양이다. ‘사랑의 힘’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엔지, 들려오는 새소리, 따뜻한 햇살, 모든 것이 힘이 돼요. 특히 사랑이 그래요. 사랑은 모든 것을 극복하니까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마음을 전했다. 그녀는 내가 전하는 마음을 알아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아있는 생명체에게는 고통과 시련과 슬픔이 지나간다. 나는 지금 그 시간을 지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슬프면 눈물을 흘린다. 또한 기쁠 때는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이가 드러나게 웃는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매력이라고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로 자신만만했던 것은 역시 내 꼬리였다. 나는 그 하나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매력 모두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사고 이후 내 꼬리는 개울물을 건너는 여고생 교복 치맛자락처럼 가랑이 사이에 끼여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엔지를 안심시키려 꼬리를 안테나처럼 세우고 당당하게 걸으며 흔들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람들이 슬픔에도 애써 웃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냥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받아들임과 동시에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왜? 왜? 왜? 라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물음의 심적 고통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상처의 치유만이 남아있었다. 찢어지고 곪은 상처는 시간이 해결할 수 있지만,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만은 시간이 갈수록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은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머리를 탁 치기도 하고, 잊고 싶을 때는 머리를 흔들기도 했다. 때로 가슴이 답답하면 가슴을 쓸어 내리며 숨을 토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 그런 행동들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엔지가 곁에 있어 외롭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아픔보다 늙음보다 외로움이었다. 아플 때 나를 진심으로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것에 외로워했고, 나이가 들어가며 모든 것에서 멀어져 혼자 남게 되는 외로움을 두려워했다. 생이 길고 짧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얼만큼 깊이 사랑하고 이해 받고 살다 죽느냐가 중요했다. 돈으로도 명예로도 살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나는 이 시간 정말 진정한 사랑이 무언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말 못하고 곪아 들어가는 살의 가려움까지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상처는 혀로 핥을 수 없는 곳이었다. 그녀는 그것까지 알아차리고 내내 입을 오므려 호호 불어주었다. 그것만으로 가려움을 이기기 어려웠지만 그녀의 관심과 사랑으로 참아 낼 수는 있었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했다.
발랄했던 방울이가 나와 함께 힘을 잃어갔다. 내 곁으로 다가와 킁킁 냄새를 맡고 나면 이내 제자리에 두 발에 턱을 괴고 웅크리고 앉았다. 낮에는 내 옆을 지키고 같이 자다가도 밤이 되면 슬며시 일어나 거실에 가서 혼자 잠을 잤다. 엔지가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았다. 3년을 같이 살았지만, 방울이가 혼자 거실에서 잠을 잔 일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내가 몸 상태가 조금 좋은 날이면 부르지 않아도 어김없이 밤에도 내 옆에서 궁둥이를 살며시 붙이고 잠을 잤다. 그녀는 내 몸의 컨디션을 빠르게 감지하고 그것에 따라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조절을 해나갔다. 내 상처 부위를 곁에 앉아 나 대신 혓바닥으로 핥아주었다.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혼자임을 두려워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말 없이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는 또 다른 사랑이었다.
엔지가 마당에서 돌을 골라내며 밭을 가꿀 준비를 하다 사고가 났었다. 그리고 그녀는 호미자루를 다시 잡지 않았다. ‘텃밭에서 푸성귀 길러 먹으려다 너를 다치게 했다며 그까짓 푸성귀가 사다 먹으면 얼마나 하고 몸에 좋아 봤자 얼마나 좋다고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다’며 목을 놓고 울던 그녀였다. 그런 엔지가 다시 호미자루를 쥐었다. 그녀의 슬픔을 시간이 엷게 만든 것도 아니고, 건강을 위해 푸성귀를 길러먹을 욕심도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한 곳에 응시된 채 같은 곳을 파고 있었다. 엔지는 분명 그날 일을 생각하며 자신의 가슴에 호미질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지는 나와 마당에서 행복했던 추억을 다시 맛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나 역시 다시는 마당에 나가지 못 할거라 생각했었다. 대문 앞의 길을 보면 다시 그 아픈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다. 그랬던 나도 지금 마당에 흙을 밟고 서있다. 봄이 온 마당의 흙은 따듯했고 햇볕에 부푼 고운 흙에 발가락 사이가 간지러웠다. 자주색 할미꽃도 피어나고 메발톱 꽃에도 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몸은 말을 듣지 않지만 마음은 달리고 있었다. 뒷발로 흙을 차며 흙먼지를 내며 달리는 내 모습을 그리며 엔지와 나는 마당에서 같은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서 하늘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