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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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한 경사를 피해 구불구불 굽은 오솔길을 속보로 걸었다. 온몸이 땀에 절었고 한나절 거리를 반나절 만에 주파하느라 체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정상의 봉우리가 보이는 지점부터는 완만하게 이어진 등산로가 자취를 감추고 거친 자갈들로 이루어진 직선로가 나타났다. 해발 2천 미터 고산지대에는 나무는 없고 자갈과 이름 모를 잡초들이 성기게 보였다. 경사 때문에 직립보행을 포기하고 이제는 손을 땅에 짚고 기는 자세가 되었다. 악명 높은 깔딱고개가 시작되었다. 오른쪽 발을 내딛는 순간 발을 헛디뎌 맥 없이 한참을 미끄러졌다. 얼굴이 쓸렸는지 따가왔다. 그대로 얼굴을 땅에 묻은 채 가뿐 숨을 골랐다. 쉬고 싶었다. 이대로 잠들었으면. 입안이 껄끄럽고 조갈증 때문에 잔기침이 났다. 그녀는 산을 빠져나갔을까. 집시처럼 떠돌았을 삶. 배역의 삶에서 그녀가 실마리를 찾았다면 나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은 가난한 유랑극단의 배우 같은 것인지 모른다. 1막에 출연한 아버지가 2막에서는 엄마로 3막에서는 아들로. 인생이 유전하는 건 역할에 몰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다를 뿐. 생은 후회 뒤에 왔고 나는 격정이 빠져나간 허물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컹 컹 컹. 자갈길을 거쳐 거대한 암벽의 꼭지점에 다다랐을 때 정상 정복을 축하하는 듯 개들의 팡파르가 메아리쳤다. 추적자들의 눈매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뛰쳐나가려는 개들을 경관들이 개줄을 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경관 한 명이 휴대용 스피커를 들고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개들의 기세에 눌려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개 세 마리에 여섯 명이 달라붙고서야 간신히 개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 중 선임자로 보이는 한 명이 스피커에 대고 외쳤다. "투항해라."
중천에 뜬 태양을 바라봤다. 시간은 충분했다. 그녀는 이제 자유다. 두 손을 머리 뒤로 올려 깍지를 꼈다. “여자는 어딨나?” ‘스피커’가 물었다. 어디에 있냐구. 성공의 예감이 피로와 함께 몰려와 씩 하니 웃고 말았다. 개들을 앞세운 채 경관들이 총을 겨누고 한걸음씩 다가왔다. 해발 2천 미터 정상에서 지상을 내려다봤다. 구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름 그대로 구름 위의 산이었다. 모처럼 홀가분함에 젖어 어깨를 누른 배낭끈을 천천히 벗었다. 압박이 풀리자 배낭끈에 눌린 부위가 뻐근했다.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고개를 드는 순간 사냥개들이 방심한 경관들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들었다. 분례의 체취가 놈들을 참을 수 없게 자극한 게 분명했다. 세 마리 개에 밀려 몸이 뒷걸음을 쳤다. 절벽으로 몰리지 않으려고 기를 썼지만 이성을 잃은 사냥개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한 놈은 팔을, 두 놈은 다리를 물고 턱을 좌우로 흔들었다. 통증을 견디다 못해 다리를 문 놈에게 주먹을 날렸다. 아래턱을 정확히 가격당한 녀석은 고개가 돌아가고도 다리를 놓지 않았다. 동료의 불행을 본 놈들은 더욱 기세 좋게 사냥감을 몰아붙였다. 뒤늦게 도착해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냥개 한 마리가 카운터펀치를 먹이려는 듯 몸을 날렸다. 놈을 피하려다가 몸이 휘청 기울었다.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문이 막힌 경관들의 표정에서 낭패라는 두 글자가 읽혔다. 나는 구름 위에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등을 둥그렇게 말고 다이빙 포즈로 입수를 마친 상태였다. 발바닥을 누르던 중력이 사라졌을 때는 손바닥에 땀이 밸 정도였지만 구름 사이로 지상의 풍경이 비치자 이내 고요가 찾아왔다. 가장 악랄한 적은 실체가 가려진 두려움이다. 해운산 정상에서 배운 최후의 레슨이었다.
갈까마귀 한 마리가 정상 주위를 커다란 원으로 선회하다가 구름속으로 사라졌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