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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내가 있었다.
87년. 새내기로 입학하여 낭만의 대학문화를 익히기도 전에 시국의 난제에 휩쓸렸다.
독재 타도, 호헌 철폐.
처음에는 그것이 무슨 말인지조차 몰랐지만 이한열 열사, 박종철 열사와 같은 또래의 젊은이들의 피 끓는 죽음에 나도 동시대의 학우로써 동참을 하게 되었다.
시대의 도도한 물결은 주체인 학생들을 넘어서 도시의 무관심과 적막을 흔들고 있었다.
내려쬐는 따가운 햇살과 쏟아지는 장대비의 장애물들도 걸림돌은 되질 못했다.
작은 샘에서 이어진 그것은 장강의 흐름을 타고 모두를 서울로 집결시켰다.
말로만 듣던 TV에서만 보던 광화문 거리를 처음 만나는 형제, 누이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어깨동무를 하고 행진을 시작 하였다.
넓디넓은 대로를 우리의 소원과 아리랑을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자 그것은 세찬 파도가 되고 너울의 파장을 일으킨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사옥을 지나노라니 일사불란하게 조직된 같은 젊은이의 상대편 그룹에서 SY44와 무차별적인 지랄탄의 총성이 쏟아졌다.
짱돌과 화염병의 세력이 나약하게 무너지는 가운데 매캐한 연기와 속을 환장하게 하는 그 무엇이 삽시간에 사람들을 혼돈의 도가니로 몰려들게 하고 분열을 유도한다. 동료의 손을 놓으면 안 되는데 흩어지면 안 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구역질이 나고 눈물 콧물이 사정없이 흘러 나왔다. 죽고 싶지 않기에 살고 싶다는 본능적인 욕구로 무조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빨간 헬멧을 쓴 사복 경찰이 방망이를 들고 쫓아왔다. 달려야 한다. 앞에 있던 여학생이 넘어졌다. 곱게 빚어 넘긴 머리채가 우악스런 사내의 손아귀에 잡히며 개끌 듯이 끌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도와주어야 하나.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안의 비겁한 마음은 외쳤다. 살아야 돼.
그곳에 내가 있었다.
말끔히 정비된 이곳은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이 신화적인 부적처럼 우뚝 서서 차량과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한낮의 물질적인 햇살을 넘쳐나게 받으며 대한민국의 중심의 위용을 자랑하듯 사람들은 휘적휘적 개인적인 걸음을 내디딘다. 연인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 점심식사 시간 산책을 나온 직장인들의 행보, 아이스크림과 솜사탕을 맛나게 먹으며 길거리를 활보하는 선남선녀들,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한껏 멋을 내며 걸어가는 미시 여인. 그때의 함성, 그때의 투쟁, 자유를 외치던 핏빛 물결은 어느새 TV 속에 아이리스 장면의 하나로 인식되는 구경꾼들의 한가로운 젖음으로 묻힌다.
똑같은 거리이고 똑같은 광장이지만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등의 불빛이 파란색으로 깜박이듯 사람들은 바뀌었고 세상도 변하였다.
그래서인가 이곳엔 풍요로움이 가득하다. 살아야 돼 라는 절규를 외칠 이유도 없어졌다. 하지만 그들의 속마음도 그러할까.
그곳에 내가 있었다.
어느 작곡가의 삶을 회화한 광화문 연가의 공연에서는 여러 노래들과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퍼포먼스들이 펼쳐졌다.
덕수궁 돌담길을 술래잡기 하듯 흐르는 남녀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
직선쟁취를 외치던 여리디 여린 젊은 여대생의 투신자살을 통한 당시의 역한 기운의 펼침.
애잔한 선율과 함께 감성을 자극하는 밝고 경쾌한 혹은 말랑말랑한 멜랑콜리의 가사들에 젖어있는 사람들.
그랬었지. 그때는 그랬었지. 나도 여기에 있었었지.
그런데 궁금하다. 관객으로 참석한 이십대 현재의 청춘들은 저 광경을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이고 있을까. 내가 느꼈던 것처럼 감정과 가사의 마디마디는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을까.
깜깜한 극장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대한 늬우스만 나오면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대통령의 얼굴에 학습이 되듯 그들도 익숙한 습관으로 다른 이들과 그렇고 그런 척 하는 건 아닌지.
그곳에 내가 있었다.
이십대의 젊음으로 이제는 사십대의 중년으로 그리고 앞으로는 또 다른 시대의 변화된 모습으로 나는 이곳에 자리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또 그러하겠지. 그때가 되면 또 지금이 그리워지겠지. 그리고 가슴을 저미는 내안의 목소리에 젖어들겠지. 이곳에 내가 있었다고. 그때는 또 내옆에 누가 있을까. 지금 함께하는 그 사람이 아직도 나의 손을 잡고 있을까. 그리고 그때도 지금처럼 따뜻한 여운을 함께 나눌 수 있을까. 그때도 지금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러겠지. 그러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