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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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시간을, 오랜 시간을 내 안에 갇혀 있었다.
내 안에서 묻고 답하고, 스스로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깨침을 원하는 바램은 새로운 껍질로 나를 가뒀다.
안으로도 바깥으로도 새로울 것 없던 자리에 만남이 있다. 경주로 간다.
[1] 랩소디가 빚어내는 절묘한 화음처럼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여럿 앞에 드러내지 않거나 혹은 드러나지 않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의식하여 꼭꼭 감추어둔 비밀과 같이 빗장 걸린 부분도 있고, 의식하지 않지만 본능적으로 드러남에 불리를 느껴 절로 은밀해진 부분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그것이 많은 사람 앞에 드러나면 스스로 낭패감에 빠질 가능이 많다는 점에서 별 차이는 없는 듯하다. 그런 것을 감안하여 생각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내비치어 주고 받는 소통이라는 것은 결국 많은 한계와 자의적인 범주를 태생처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비밀스럽고 은밀한 자신의 불리는 가려져 있고 드러나 보이는 페르소나는 결국 우리의 일부분 혹은 약간 비틀려져 있는 어떤 모습일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불이 꺼졌다. 비바체로 흐르던 음악이 멈춘 후 정적이 흐르듯, 모든 움직임이 멈추고 한곳을 응시한다.
우리가 죽을 자리이다. 촛불이 둥글게 감싸 안은 자리에서, 그 소박한 자리에서 불꽃이 흔들리고, 우리들 마음도 너울거린다. 두고 떠나는 사랑에 마음 아려하고, 가지고 가지 못한 추억을 놓아야 했으며, 주고 싶은 사랑도 접어야 했다. 꿈꾸기만 하고 가보지 못한 삶이 각자의 가슴을 타고, 우리라는 가슴 속에 강이 되어 흐른다. 울지 않으리라 했지만 이성은 멈추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
각자의 삶이 흘리는 눈물이지만 같은 눈물이었다.
죽는 이의 삶이 슬퍼서 우는 눈물이 아니라 그들의 말을 통해서 내가 주체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이 울고 있었다. 모두가 그러했으리라.
홀로 맞이하는 죽음이었지만 그 길 끄트머리에서 손 흔들어 주며 어깨를 감싸는 고마운 영혼들이 있다.
그들의 영혼에는 향기가 있고, 함께 흘리는 눈물은 삶의 한 순간을 다시 피어나게 한다.
그 곳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과 공감이 그렇게 서로의 고독감을 다독이고 있었다.
자유로운 랩소디가 절묘한 화음으로 연주되는 순간이다.
어설픈 자아는 스스로의 무지가 물음으로 드러나는 것 때문에 물음을 망설이게 된다.
용케 그 야릇한 자존심을 버려도 얻고자 하는 대답은 결국 교훈이나 규범의 틀에 갇히고, 진실한 마음은 한 순간의 치기로 치부되고 만다. 지금껏 내가 인식하고 있는 소통의 한계는 이렇듯 나를 가두고 있다.
그날 저녁, 사람의 마음을 내어 보이는 것과 담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새로운 지평을 본다. 조건이나 자아의 의도적 제약 없이도 내보이거나 담을 수 있음을 안다.
삶을 흔히 길이라 하고, 한바탕의 꿈이라고도 한다. 나는 길의 끝을 알아야 걸었고, 납득할 수 있어야 꿈꿨다. 그리고 길이건 꿈이건 결국은 혼자서 하는 것이라는 치기 어린 미숙함이 나의 만남과 소통을 구획하고 있다. 나는 같이 가는 길 위에서 손을 잡을지 말지, 내밀지 거둘지를 생각하며 어떤 이유의 납득을 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경주에서 서울로 오는 늦은 밤길, 몇몇은 잠이 들고, 창 밖에는 간간히 빗방울이 스친다. 안으로 서려 있는 김을 손으로 비비니 어두운 저녁 풍경이 환하게 까맣다.
"혼자 가면 힘들지만 함께 하면 멀리 갈 수 있다"라는 스승님의 말씀이 함께한 시간위로 오버랩 된다.
머리에 있던 동행이 가슴으로 내려와 느껴진다.
화음의 기본이 가락의 섞임이듯, 동행의 기본은 우리 마음의 섞임이다.
나보다 어른스럽고, 재능이 있는 땡7이들과의 동행에 나의 마음을 싣는다.
초보적인 대인관념을 마음에 담는다.
[2] 강물에 종이배를 띄워 그것을 따라 뛰어가는 어린애처럼
4월 초순의 자연은 초록이 물오르기 전이다. 경주로 가는 길, 개나리는 넘실거리며 산에서 언덕에서 우리에게로 파도 친다. 겨울의 끝에서 봄을 맨 처음 맞이하였던 매화와 산수유는 연이은 개나리와 진달래에게 화려함의 자리를 내어 준다. 호미 곶에서의 유채꽃 향기는 바다 내음과 함께 우리의 여정을 달래고, 해가 뉘엿거리며 서쪽으로 성급할 때 토함산의 목련은 석양에 몸을 내어 주며 소색(素色)의 빛깔을 부끄럽게 물들인다.
인간이 젊음을 겪고 나서야 진실한 인생에 입문할 수 있듯이, 자연도 이같은 정열의 낭비를 통해서야 질서를 조정할 수 있는가 보다.
토함산 자락을 구비하며 내려가는 길에서 스승님께서는 살면서 문득 문득 추억할 수 있는 것이 많으면 잘 사는 인생이라고 하신다. 특별한 하루가 우리의 삶이니 그런 이야기를 가지라 하신다. 스승님의 '여러분은...할 것이다.'하는 명료한 어투가 삶의 모습을 봄 꽃처럼 확연히 드러나게 한다.
자정이 지난 시간. 산비탈의 논밭 한 켠에 위치한 진평왕릉은 고고하면서 소담스럽다. 형체들의 실루엣만이 공간과 존재를 구분할 수 있게 한다. 주위는 어둡고 고요하며 세월을 담은 나무의 정령들이 묘한 분위기로 왕릉을 보위하고 있다.
냉랭한 밤기운을 우리는 안동소주로 달래고 데운다. 기타의 선율을 따라 노래 가락이 흐르고, 스승은 진평왕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봉분의 꼭대기에 올라 원을 그리고 술을 따르고, 절을 하고, 그 위에 눕는다. 다들 어린애처럼 웃고 감탄한다.
마음이 담지 못하면 여느 곳과 다름없이 그냥 스쳐가는 거소일 뿐이지만 마음이 풀어져 나도 하나의 부분이 되니, 자연의 껍질에만 머물던 마음이 그들의 속살을 더듬는다. 사는 것도 매 한가지일것이다. 노상 쫓기듯이 주어지는 삶의 소소한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허락하는 까닭에 마음주어 머물러야 하는 곳에서는 무심하고 둔감하다. 삶을 껍질에만 묶어놓는다. 즐겁게 속살 더듬은 지혜는 언제쯤 생길런지. "잘 놀다 갑니다."하며 올리는 마지막 절이 자연과 역사라는 큰 어른 앞에서 흔쾌히 받아들여지는 어린애의 사랑스런 몸짓 같다.
인각사를 지나 우리는 강을 마주하고 스승을 대한다. 봄볕의 두께가 딱 맞는 두께의 담요 마냥 푸근하다. 깊고 오묘한 깨달음의 내용을 조리 있게 펼쳐 보이며 우리를 감동시키고 인도하는 것이 스승의 힘이구나 생각한다. 더불어 우리의 섞임에서 서로를 통해 감동하고 삶의 오의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앞으로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온전한 배움의 모습이구나 마음에 새긴다.
'만쇄(萬刷)'의 주문에 학소대 강물에 엉거주춤 발을 담근다. 주문을 외는 마법사는 까르르 웃는다. 그녀의 웃음이 참 좋다. 그녀의 마법이 같이 발 담근 물을 타고 나를 타고 흐르기를.
함께 한 시간들을 기억해라. 그 표정과 눈빛과 웃음을 기억해라.
좋은 말을 기억하고, 어깨에 얹혔던 손길을 기억해라. 함께 웃음과 감동을 만들어 가라.
배움만큼 기쁜 놀이가 없으며, 함께 사는 것 보다 웃음이 많은 것이 없다.
- 스승님의 학소대 가르침에서 -
모질게 불어대는 겨울 찬바람을 꿋꿋하게 견뎌낸 꽃 가지들이 그 끝에 연두를 매달고,
살랑살랑 봄바람은 벚꽃을 달래어 팝콘처럼 속살을 터트리게 한다.
함께하는 길에서 일상은 소스라치는 깨달음이었다.
깊고 큰 호흡으로 자연과 벗들이 보내는 삶의 향기를 가득 담는다.
그리고 봄 꽃처럼 다시 태어난다.

웃음과 추억을 만드는 놀라운 마법이지요.
즐거움의 시간이 끝나고 혼자 있는 시간이면 마법이 또 한가지의 얼굴을 드러냅니다.
나에게는 '불편한 부러움'입니다.
불편한 것은 내가 가지고 싶지만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적나라한 인식인 것이지요.
내 속에는 쓸데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선배는 참 경쾌합니다.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조금씩 버릴 생각입니다.
그래서 춤도 추고, 노래도 하고...
송년의 밤쯤이면 멋지게 스스로 만족하는 '변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마법사가 마법을 알려주는 것에 꺼려함이 있는 것은 아니죠?
사람 가려 받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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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멘토로서 대하는 마음을 가져가고 싶어요. 그래서 '묙선배'라는 호칭이 제일 편안하네요.
싸랑합니다. 묙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