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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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기쁨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봄이 되니 한산했던 길에 사람들 냄새가 난다. 작년 가을 엔지와 텃밭을 가꾸며 이야기를 주고 받던 옆 텃밭 아주머니가 엔지를 보고 반색을 했다. 혹독한 추위의 겨울을 잘 지냈냐며 엔지와 서로의 안부를 주고 받았다. 서로 죽지 않고 살아 남은 것에 반가워할 만큼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었다.
아주머니는 엔지의 품에 안겨 있던 나를 보고는 “아이구, 소식 들었어. 오리오가 저 뒷집 개한테 물렸다며 어디 좀 봐. 몸댕이는 썩어도 얼굴은 깨둥깨둥하네 그려. 저 놈의 집구석 망할 놈의 개가 우리 집 감자 밭 비닐도 다 찢어 놓고, 쪽파도 다 밟아 뭉개 놨지 뭐야. 개 관리 잘 하라고 그렇게 이야기 했건만 끝내 사고가 났네.” 아주머니는 입 옆에 허연 침이 고이도록 숨을 끊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저놈의 여편네 귓구멍에 말뚝을 박았는지 말도 안 듣고 이야기 하면 알았다며 웃긴 왜 웃어 징그럽게….. 알긴 개 콧구멍을 알아 일을 이렇게 만들었냐?” 아주머니는 작업용 노란 고무 장갑을 낀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열을 올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작년 가을 아주머니 뒤꿈치를 따라 다니며 눈이 튀어나오게 짖었던 일이 슬그머니 미안해졌다 아주머니는 정말 열을 올리며 나의 사고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누군가 내 편이 된다는 일은 참으로 든든한 일이었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뒷 집 개 주인의 징그럽게 웃는 얼굴이 떠 오르며 나의 고통을 비웃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를 안고 있는 엔지를 손으로 불렀다. 엔지는 낮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몸을 아주머니 쪽으로 기울였다. 아주머니는 주위를 두리 번 거리더니 흙 묻은 장갑으로 입을 가리고 엔지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진돌인가 흰돌이가 하는 녀석을 동네에서 없애버리려고 쥐약을 놨어. 그러니까 비밀 꼭 지켜”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비밀은 누설 된 것이다. 하긴 내가 다친걸 엔지도 이야기 하지 않았는데 이미 알고 안부를 전하는 아주머니 아니었던가! 갑자기 내 편이라고 생각했던 아주머니의 입에서 쥐약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세상에 믿을 만한 사람은 엔지뿐이 없다고 새삼 느껴졌다. 결국 자신의 감자 싹보다도 못한 존재가 아주머니에게는 개들이었다. 사람의 마음으로 개들의 행동을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들은 감자 밭이 뭔지도 모른다. 단지 개들에는 비닐을 뒤집어 쓰고 있는 땅인 것뿐이다. 몽둥이로 살아있는 개들을 두들겨 패서 털을 그슬려 솥에 과먹는 것이 인간이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인생도 견생도 다 피해갈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감사하는 것뿐이 없었다. 나는 코를 엔지의 겨드랑이 묻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는 계속 해서 들려왔다. 귀를 틀어 막고 싶었지만, 개들이 할 수 없는 일중의 하나였다.
마당 툇마루에 엔지는 아주머니가 주고 간 쪽파를 까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서 목을 있는 대로 빼돌리고 진물이 흐르는 옆구리를 핥고 있었다. 엔지가 나를 흘끗 쳐다 보더니 “오리오, 세상은 참 공평해.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그렇지?” 나는 처음에는 엔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이런 말을 꺼냈나 궁금했다. 엔지는 말만 꺼내 놓고는 계속 쪽파만 까고 있었다. 갑자기 쪽파가 담긴 바가지를 휙 밀어 치우고 나를 안았다. 토닥토닥 엉덩이를 두드리며 입을 동그랗게 모아 호호 내 옆구리를 불다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아파트에 살 때 늘 밖을 그리워했어. 흙 냄새가 나고 언제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을 그리워했지. 그것이 이루어지면 아무 걱정도 없이 행복할 줄 알았어. 책에서 보던 사진들이 우리의 삶이라 생각을 했지. 야채와 꽃을 마당에서 가꾸고 그 뒤에 너희들이 지키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그 뒤에 일들은 생각하지 못 했어. 그런데 나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바보였다. 방치되어 목줄을 끌고 돌아다니는 무서운 개들이 동네를 장악하고 있고 쥐약이 쥐를 위한 것이 아니고 개를 위해 놓인 곳이 사방이 아름답다는 자연, 시골의 현실이라는 것을…… 사실 아까 쥐약 이야기를 듣고 아무것도 모르는 너와 방울이가 쥐약을 주워 먹으면 어쩌나! 눈 앞이 캄캄하더라. 결국 자연으로 와서 살아도 너희는 갇혀 사는 신세가 되었네. 오히려 흙 냄새가 코 앞에 나는 땅을 두고 나가지 못하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겠지. 결국 어디서 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새삼 느껴진다. 세상 어디를 가도 만족은 내 마음 속에 있더라는 것을 알았어. 오리오, 너와 내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는 이 시간이 ‘만족’과 ‘소중함’을 알아가는구나. 왜 꼭 고통과 시련 뒤에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게 삶이라는 것도 알아.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철학이 되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되는 것도 알아. 알아 안다고……하지만 살이 묻어나는 아픔을 참아내는 너를 보는 이 순간은 지우개로 지울 수 있는 하얀 도화지에 밑그림 같았으면 좋겠다. 엔지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내내 중얼거렸지만, 나는 놓치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햇볕이 제일 좋은 시간 10시에서 12시 엔지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녀는 만사를 제쳐놓고 나의 상처 부위를 태양에게라도 고쳐달라는 마음인지 햇볕에 상처 부위를 소독하고 있었다. 가렵고 진물이 나던 부위에 시원함을 느꼈다. 따뜻한 햇살과 그녀의 품 속이 따뜻했다. 엔지 몸에서 나는 반찬 냄새와 화장품 냄새는 열심히 살고 있는 그녀의 힘찬 냄새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딘지 쓸쓸하고 슬픔도 느껴지는 냄새였다. 엔지는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어디에 살던 어떻게 살던 지금처럼 함께 있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 서로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는 것이 개들에게는 얼마나 행복인지를 말이다. 아니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남에게 위로할 때 멋지게 하는 말도 자신에게 닥치면 잠시 잊어 버리나 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늘 슬픔이 함께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엔지의 손등을 핥았다. 깊이 빠져 있는 생각에서 나오게 하고 싶었다. 엔지는 이내 웃으며 “알았어, 네가 살아있으니 이런 감촉과 햇볕 아래의 데이트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우리 죽을 때까지 함께 오래오래 살자.” 내가 제일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고 온순한 개가 되고 싶었다. 나는 엔지의 발치에 내 머리를 디밀고 조용히 엎드려서 엔지의 몸 냄새를 빨아들였다. 개들은 언제나 지나간 슬픔을 슬퍼하기보다는 닥쳐오는 기쁨을 기뻐한다. 엔지와 보내는 하루하루는 나에게 닥쳐오는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