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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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넘게 중환자실에 계시던 시댁 외할머니가 드디어 입원실로 옮기셨다. 처음 쓰러지셨을 때보다는 많이 안정되셨지만 연세가 아흔이 가까우신지라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는 중이다. 여러 가지 사정상 신랑이 보호자인 탓에, 결국 젊고 메인데 없는 내가 이리저리 움직이게 되었다. 한번 퇴원을 했다가 재입원을 하고, 여러 가지 검사를 하는 중 보호자를 찾는 병원관계자들에게 외손주며느리라고 되풀이 설명을 하는 내가 오히려 쑥스러웠다. 신랑을 기준으로 보면 분명 먼 친척은 아닌데도 우리가 특이한 경우인가 보다.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고 코에 삽입한 투브를 통해 유동식을 공급하고 가래는 섹션으로 뽑아내야 하지만 할머니 정신은 아직 또렷하다. 선잠에서 깨면 내 손을 꼭 붙들고 아기들은 어찌하고 왔냐며 이제 오지 말라고 하신다. 뼈와 가죽만 남은 할머니 손을 잡고 다시 잠드시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보면 저절로 신랑과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많은 이들의 선입견과는 달리 남자들도 분위기와 상황에 매우 민감하다. 특히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남자들은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자신의 속이야기를 얼마나 하느냐로 친밀도를 가늠하는 여자들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내가 외할머니에 대한 신랑의 추억을 들은 것도 우연한 계기였다. 늦은 밤 두런두런 나누던 이야기 끝에 그의 대학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늘 아르바이트를 하며 대학을 다니고 시험 공부도 하던 그가 밖에서 비싼 밥을 사먹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기억나는 700원짜리 학교식당 밥을 하루 세끼 먹는 것은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정말정말 학교 밥이 먹기 싫어지면 외할머니 댁에 갔었다고 한다. 장사를 하시던 할머니도 바쁘셨지만 늘 반가워하며 후다닥 맛있는 집 밥을 차려주셨고, 또 가끔은 공부하는 손자를 불러 영양식도 챙겨주셨다고 한다. 이십여년전 이야기를 회상하는 그의 따스한 표정에서 외할머니에 대한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덩달아 나도 할머니가 가깝게 느껴졌다. 힘들고 외로웠을 그를 반갑게 맞아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날 신랑의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할머니를 대하는 나의 마음이 달라진 듯하다. 시댁 여러 친척 어른들 중 특별한 마음이 들게 된 것이다. 비록 자주 찾아뵙지는 못했지만 손 한 번을 잡아도 정겨웠고 용돈을 드려도 더 마음이 갔다. 처음 우리 집을 장만하고 할머니를 모셨을 때 할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대견하다 살짝 눈물을 보이셨다. 난 그 분을 볼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학생 시절을 떠오르곤 했다.
기꺼이 할머니의 보호자가 되고 하얗게 버짐 핀 손을 거리낌 없이 잡게 한 것은 아마 그날 우리의 이야기 덕분일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던 나는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며 그에게 닿는 길을 찾았다. 때로는 나의 신호가 허공으로 흩어져 버린 적도 있었고 가끔은 제풀에 지쳐 쉰 적도 있지만 가야할 길을 의심하진 않았다. 또한 나를 알고자 그가 보내는 신호를 잡기 위해 늘 안테나를 세웠다. 시간과 함께 한 뼘 한뼘 그와 나의 사이에 길이 뚫렸고 구불구불 맞닿은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과거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과거를 알면 알수록 나는 그의 현재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고 같은 마음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문화유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도 꼭 들어맞는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둘 사이의 마음길이 한번 만들어서 평생가는 고속도로인 줄 알았던 한때를 보낸 후 그 길이 평생 유지보수가 필요한 오솔길임도 배웠다. 무심코 내버려두면 한번의 소낙비에 잡초가 무성해지는 그런 산속의 길이었다. 최대한 빠른 시간에 목적지에 씽하고 데려다주는 고속도로가 아니라, 하늘도 올려다보고 나무 사이도 기웃거리고 꽃향기도 맡으며 손잡고 걷는 구불구불한 길임을 점차 느낀 것이다.
수시로 업데이트가 필요한 네비게이션처럼 부부 관계도 늘 업데이트가 필요하다. 결혼한지 몇 년이 지나고 몇 십년이 지날수록 최신 정보가 더 절실하진 않을까. 그와 나의 변화하는 환경과 상황, 생각과 내면까지. 지속적인 마음의 교류와 공감만이 둘 사이를 늘 건강하고 신선하게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야만 서로에게 닿는 길을 잃지 않고 이 복잡한 세상을 함께 즐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