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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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거나 아니면 새로운 철학을 찾아라."
며칠 전에 만난 선배가 내 고민을 들은 후 해준 말이다. 고민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
① 요즘 들어 매일 새벽 두려움과 불안함에 사로 잡힌 채 일어난다.
② 회사에서 일과시간이 시작되면 명치 끝이 콕콕 찌르는 듯한 증상이 나타난다.
③ 하루에도 여러 번 회사를 그만 두고 떠나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 잡힌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라 더 많은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헤어졌지만, 마음 속에 큰 울림이 일어 돌아오는 내내 그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 증상이 시작된 것은 한달 전쯤부터다. 회사에서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개인적으로는 본격적인 연구원 활동이 시작되었다. 만만치 않은 두 가지 활동을 동시에 추진하면서 중압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2시간의 책 읽기와 글쓰기 활동이 끝나는 시간은 정확히 오전 8시 반, 사람들이 하나 둘 출근하고, 사무실은 시끌벅적 해지기 시작한다. 읽던 책과 쓰던 글을 멈추어야 하지만 더 읽고, 더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동시에 파트장이 회의를 소집하고 프로젝트의 진행사항을 체크한다. 그 때부터 명치끝을 콕콕 찌르는 증상이 시작된다.
당장 회사를 그만두고, 북 카페로 출근하여 종일 읽고 쓰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그런 상상을 하고 난 다음이면 회사일과 회사사람 모두가 시시해져 버린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고,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과 얽혀 지내며 살아야 하는지 회의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업무 중에 틈틈이 해보려는 연구원 과제도 잘 되지 않으며,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지도 못하게 된다. 그렇게 지친 하루가 지나가고 나면 두려움과 불안한 감정으로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게 된다.
5년 전 이 회사에 처음 들어올 때만해도 회사가 시키는 일이라면, 북극에 가서 냉장고라도 팔아오겠다는 기백으로 일을 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백과 태도 덕분에 인정을 받았고, <임원 후보감>이라는 칭찬을 받으며 승승장구해 왔다. 그러나 그 동안 내가 인정 받으며 해온 일들이 아무런 방향성 없이 그저 앞뒤 좌우 가리지 않고 열심히 땅만 판 일이었다는 생각이 들자, 지치기 시작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5년이란 시간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느낌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장 그만 둘 용기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런 준비 없이 뛰쳐나온 삶이 얼마나 춥고 배고픈지를 이미 그런 삶을 선택한 선배들을 보며 알고 있었다. 그렇게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하루가 되풀이 되자 명치끝은 더 따끔거렸고, 새벽의 두려움과 불안감은 더 커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곧 탈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변화해야 할 시점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행동신호이다. 그렇다면 나에겐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것일까? 지금 당장 회사를 떠날 수 없는 내게 새로운 철학이 필요하다는 선배의 지적은 옳았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시선>이다.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으로는 지금 내가 처한 환경을 극복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당장 어떤 시선을 취해야 하는가?
우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매일 새벽 찾아오는 두려움과 불안, 되풀이 되는 딜레마를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나아가 이런 고민은 타성에 젖은 과거의 <불만족스러운 평형 상태>를 걷어찬 뒤에 찾아오는 지극히 당연한 <만족스러운 不 평형 상태>라는 생각에 이르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 졌다. 눈을 감고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 나를 내려다 보았다. 스승께서 말씀하신 <현업과 미래의 천직 사이에 놓인 심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가 보였다. 하고 싶은 일이 명료해질 수록 몸담고 있는 회사와 지금 하고 있는 일 모두 무의미하다 느껴졌고, 당장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 속에 있는 나를 건져 올릴 것인가? 나는 그 해결의 실마리를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나오는 한(漢)나라 개국공신 한신(韓信)의 고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한신(韓信)은 한(漢)나라 초기의 뛰어난 군사가로서 한나라 최대의 적이었던 초패왕 항우를 섬멸한 1등 공신이었다. 이렇게 위대한 영웅의 젊은 시절은 굶기를 일삼을 정도로 가난 했는데, 한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회음의 백성 중에서 한신을 업신여기는 한 젊은이가 한신에게 말했다. "네가 비록 키는 커서 칼을 잘도 차고 다니지만 마음 속으로는 겁쟁이일 것이다." 그러고는 사람들 앞에서 한신을 모욕하며 말했다. "네 놈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를 찌르고, 죽음을 두려워 하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라." 이때 한신은 그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구부려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갔다. 이 일로 해서 시장 사람들이 한결같이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한신은 정말 죽기가 두려워 모욕을 무릅쓰고 가랑이 밑을 기어간 것일까? 그자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한 칼에 베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 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멀리에 있는 더 큰 것을 내다 보고, 아직은 자신의 때가 아님을 알았기에 참고 견뎌냈다. 그리고 훗날 역사 속의 영웅으로 거듭난다.
그렇다. 한신의 고사를 통해 나는 더 멀리, 더 큰 것을 내다보는 힘, 다시 말해 지금의 고통을 견뎌 정신적 여백을 창출해 내는 힘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한 시선에서 바라보면 지금의 고통은 당장은 불가능 한 것들을 가능한 것으로 뒤바꾸려는 시도로 인해 찾아오는 불가피 한 성장통이며, 내 세상 하나 가져보기 위해 혁명을 단행하는 당찬 자아가 흘리는 기쁜 피와 땀인 셈이다. 바로 그 피와 땀방울이 내가 나를 담는 그릇을 보다 크게 만든다.
결국 내가 얻은 배움은 새로운 발견이 아닌 이미 알고 있었던 <삶에 임하는 태도>의 재발견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말 그대로 어찌 할 수 없는 것들일 뿐이다. 내가 고개를 돌려야 하는 곳은 <할 수 있음>의 영역이다. 스티븐 코비 식으로 말하자면 <영향력의 원> 안에 나의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는 없다. 행복은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고마워하고 정성을 다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다시 한 번 묻는다. 하루를 살기 위해 매일 먹는 밥,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따뜻한 보금자리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매일 새벽 고단함 속에 눈을 떠 첫 차를 타고 찾아가는 그 공간에 들어가기 위해 안간힘을 쓴 것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당장 내가 이 일을 떠난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몸담고 헌신해온 이 일을 스스로 모욕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해온 일, 함께 해온 사람들을 시시하다 여기는 것은 곧 이 모든 선택을 해온 나 자신, 그리고 소중한 내 삶의 돌아올 수 없는 한 때를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 내가 채택해야 할 새로운 철학은 <일에 대한 좋은 태도>다. 일이 나를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스스로를 기쁘게 함으로써 기쁜 일이 되는 것이다. 복이 와야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야 복이 오는 것이다. 봄이 와야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니깐 봄인 것이다.
매일 새벽 나를 찾아오는 불안과 두려움의 정체는 너무 당겨져서 부러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이런 나의 두려움에 대해 스승께서는 어느 밤 내게 한 편의 시를 들려주셨다.
나는 당신의 손에 쥐어진 활입니다
주님, 내가 썩지 않도록 나를 당기소서
나를 너무 세게 당기지는 마옵소서
나는 부러질까 두렵습니다
나를 힘껏 당기소서, 주님
내가 부러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 니코스 카잔차키스, <오, 아름다운 크레타의 영혼> 중에서
내면 속에 "찡" 하고 어떤 울림이 찾아오지 않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경험을 한 것 같어.
그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쓰고 쓰고 또 쓰다보면 나올 줄 알았는데 쉽지만은 않다.
그치? 삶은 자전거를 타는 것 처럼 늘 흔들리는 거지?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히면 넘어지려고 해도 넘어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삶의 자전거 타는 법을 나는 언제나 배울 수 있을까?
내가 잡은 중심이 캠벨이 말한 굴대가 아니더라도
바퀴살을 잡고 방황하는 삶이더라도,
그 삶 자체를 고마워 하고 기뻐하고 싶구나.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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