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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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해답을 제시한다. 사마천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리고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겪는 고충을 거의 모든 인물이 똑같이 겪었음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 준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대에 맞선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그리고 시대를 비껴간 자들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사기열전, 민음사, 김원중 역, 2007, 해제 中 -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까?'라는 질문에 대답하려니 나의 현재 회사 생활이 떠오른다. 회사는 일만 잘하면 되는 곳이 아니었다. 2006년 서른셋에 어렵사리 재취업에 성공해서 화력발전소에 다니게 되었다. 2년은 별 문제 없이 잘 다녔으나, 정권이 바뀌고 나자 노사간의 대립이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2008년이었다. 조합원들은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막기 위해 강성 노조를 선택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는 않았다. 젊고 패기있는 위원장은 뽑았는데 같이 일할 사람은 없었다. 젊은 사원들로 구성된 우리팀에서 누군가 해야 한다면 내가 하겠다고 했다. 처음엔 단순한 선택이었다. 그러자 바로 일근부서에서 교대근무 현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순환근무를 통해 조직의 활성화를 돕는다는 것이었지만, 그 뒤 3년 동안 그 부서에서 교대근무로 바뀐 사람은 없었다. 공기업선진화라는 명목 하에 구조조정과 인원감축이 진행되었고, 그 뒤 신입사원은 뽑지 않았다. 노조도 그간 상경집회와 중식집회, 야간문화제, 수많은 소식지, 파업으로 맞섰지만, 점점 활력을 잃어 갔다. 조합원들의 참여가 부족한 상황과 노조 내부의 분열로 마땅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직원들은 두려움을 내재화하며 살아남기 위해 눈치 보며 힘겹게 버티고 있다. 최소한 짤리진않겠지 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회사의 일방통행에 조용히 눈감고 따른다.
2010년 초, 조합원들은 협상중심의 노조 집행부를 선택했다. 난 이념이니 조직을 떠나서 의리를 지키기 위해 계속 집행부 활동을 하기로 했다. 솔직히 노조활동이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이 느껴졌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팀원들과 노조와의 연결고리 역할 정도라도 하자 생각하며 바뀐 집행부에서도 남아있기로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주말에 본사 앞에서 집행부 중심의 상경집회가 있었다. 가는 길에 내가 속한 부서의 차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직원들을 초등학생 대하듯이 하기로 유명했다.
"양경수씨, 집회가요? 개인적인 불이익이 있을 수 있는거 알죠?" 그는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대답했다. "네? 지금 가고 있구요. 집행부에서 다같이 가는 거니까 차장님이 이해 좀 해주십시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지금까지 이렇게 직접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부서가 바뀌니 참 별일이네' 라고 생각하며, 집회에 다녀왔다.
다음날 근무 중에 차장님이 내려왔다. 잠깐 얘기좀 하자고 하더니 실험실로 데리고 간다. 그런데 뒤따라 들어갔더니 문을 잠그는게 아닌가? 뭔일 이람?
둘이 의자를 비껴 놓고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지는 이랬다.
"계속 노조 집행부 활동을 할꺼에요? 할꺼면 개인적인 불이익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내일까지 할건지 안 할건지 알려줘요."
이게 무슨 말인가? 개인적인 불이익은 뭘 뜻하는 건가? 이거 완전히 협박 아닌가? 미적거리면 더 복잡해질 것 같아 그 자리에서 난 분명히 얘기했다.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차장님과 생각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인 선택에 대해 강요하지 말아주십시요." 하면서 부드럽게 이해를 구했다.
내 딴에는 부딪히는게 싫어서 부드럽게 말했다. 난 맞서기를 싫어한다. 차라리 피해버린다. 그런데 대화를 마치고,'이러다가 진짜 불이익을 받으면 그때가서 뭐라 따질건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고민에 고민을 했다. 결론은 '가만히 있으면 나만 바보 되겠다!' 였다. 피하고 혼자 뒤집어쓸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한테 까지 이런데 다른 직원들에게는 어떻게 하겠는가? 노조활동을 그만두지 않으면 불이익을 준다는 것은 노동조합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그나마 회사의 수직•하향적 의사소통 방식을 깨고 밑에서 위로 직원들의 의견을 전할 수 있는 통로로서 노조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노조 지부장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문제화하기로 했다. 지부장은 바로 본부장을 직접 찾아가 이 사실을 따졌고, 본부장은 그런 지시를 한적도 없고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 했단다. 그렇다면 차장에게 경고를 주고 나에게 직접 사과하게 하라고 요구했고, 받아들여졌다. 일이 커졌다. 본부장은 처장을 불렀고, 처장은 팀장을 불렀다. 우리 회사는 팀장만 되도 직원들과의 거리감이 상당하다. 기술직군이 승진하기 어려운 구조이기도 하고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팀장이 그런데 본부장은 군대로 치면 별(사단장) 급이다. 차장은 지부장을 찾아가서 그런말을 한적이 없다고 했다 한다. 지부장은 한술 더떠 양경수씨가 그날 대화를 녹음했으니 발뺌 말라고 얘기했단다. 물론 녹음은 거짓말이다. 차장은 그냥 돌아간 후 처장에게 불려갔고 구두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자기들끼리 짜고 치는 건지도 모른다. 차장은 다음날 또 나를 찾아왔다. 다시 그 실험실로 갔다. 나는 일부러 문을 활짝 열어두었다.
"양경수씨, 난 그냥 개인적인 의견을 얘기했을 뿐인데 이런 식으로 공개하면 어떻게 해?"
난 대답했다. "혼자 고민하고 있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주변 사람들과 상의했을 뿐입니다. 지부장이 스스로 문제 삼은 것이지 제가 바란 것이 아닙니다."
난 차장과 맞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슬쩍 지부장에게 책임을 넘겼다.
차장은 몇 번이나 의식적으로 '어쨌든 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사과하라는 지시를 받은게 티가 났다. 난 팀장을 찾아갔다.
팀장은 "양경수씨, 실망했어~ 차장이 개인적인 소견으로 말을 한것 같은데, 그런일 있으면 나한테 먼저 상의했어야지."
내가 대답했다. "노조와 관련된 일이었기 때문에 팀장님과 상의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문제를 만든 것이 아닌데 저한테 뭐라하시면 할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어쨌든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함을 전했다. 팀장은 지난번 조직 개편때 자기가 나를 받아주었다고 생색을 내면서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던지 꼭 자신에게 먼저 얘기를 해달라고 했다. 씁쓸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러겠다고 했다. 그들의 위치는 비유하자면 사다리 중간 쯤에 오른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사다리에 올랐으니 위로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연봉제, 성과평가, 상사평가라는 틀 속에 갖혀 있으니 압박을 받으면 어떤 지시라도 따를 수밖에 없다. 난 사다리 맨 밑에 있으니 떨어질 염려는 없다. 하지만 올라갈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그 일이 있은 후 다음번 근무평가에서 '양'을 받았다. 그것도 나중에 메일이 날아와서 알게 되었다. '양' 받았으니 열심히 하라는 메일이었다. 원래 사규상 '미' 이하의 근무평가를 주려면 사전에 직원에게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하고 평가의 근거를 남기게 되어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고, 본사의 지시였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전 집행부했던 사람들 여러 명의 근무평가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팀장에게 가서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지만 차장에게 책임을 돌렸고, 회사 생활이 그런 것이니 이번엔 그냥 넘어가라고 했다. 근무평가 '미' 이하를 받으면 사내 각종 공모에 참가할 수 없고, 승진시험 자격이 제한되고 두 번 연속 받게 되면 호봉 승급이 누락되어 급여에 영향을 미친다. 몇 일간 열이 받아 침울했다가 비슷한 상황을 먼저 겪은 동기의 위로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뭐 짤린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 뒤 노사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노사간의 단체협상은 해지되었고 대화 창구는 없어졌고 노조는 파괴의 대상이었다. 회사의 일방적인 정책은 보직축소, 인원감축을 지나 '드래프트제도' 라는 윗사람에게 선택되지 못하면 무보직을 주는 상황에 까지 이르렀다. 이 제도는 무보직을 받으면 교육을 보내고 무보직이 세 번 연속 되면 해임까지 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게다가 회사에서 지원하는 어용 노조가 등장해서 인사권을 휘두르는 모습도 있었고 민주노총 탈퇴 투표도 시행됐다. 투표는 부결되었지만 대대적인 사업소 이동이 뒤를 이었고 나까지 다른 사업소로 날린다는 얘기가 떠돌았다. 노조 탈퇴서를 강제로 받았고 직원들은 어쩔 수 없이 따랐다. 다행히 노조에서 언론에 회사 비밀문건을 터뜨리는 바람에 이동 규모가 축소되어 한 사업소 12년 이상 근무자만 대상으로해서 이동이 시행되었다. 결국은 12년 이상 대상자들 중에 노조 탈퇴서를 작성하지 않고 회사에 맞섰던 사람들만 원하지 않는 발령을 받는 모양이 되었다.
이런 회사 생활 속에서 나의 선택은 이렇다. 직원들끼리의 경쟁을 제도화하고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더 굳히는 '드래프트 제도'를 비롯한 정책들은 조직문화를 망치는 일이라 생각한다. 효율성과 공공성을 다 잃는 제도다. 최고위층에 의한 폭력적인 경영혁신은 인원은 줄일 수 있을지언정 현장 문화를 체질적으로 바꿀수 없다고 느낀다. 게다가 노조 탈퇴서를 작성하고 당장에 무보직을 받지 않는다 해도 '드래프트 제도'는 직원의 자발성을 죽이고 줄 세우기 문화를 정착시키는 정책이라 생각한다. 나또한 크게는 경영혁신을 꿈꾼다. 직원들의 성장과 회사의 성장이 하나가 되는 기업문화를 원한다. 하지만 폭력적이고 조급한 혁신은 태풍처럼 지나간 후에 상처만 남길 뿐이다. 폭력과 비합리적인 방식에는 저항할 것이다. 대립각을 세우며 싸우기는 싫지만 최소한 의리를 지키며 살고 싶다. 때문에 어떤 외부 압력에도 조합간부직을 스스로 사임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의지에도 불구하고 연구원 과정을 시작하면서 거의 사임한 듯 조용히 지내고 있긴 하다. 어쨌든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면 내가 희생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 이게 나의 방식이다.
<사기열전>의 수많은 인물들이 선택했던 삶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지략과 술수에 놀라기도 하지만 결국 나의 성향인 단순하고 의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마음이 끌린다. 사마천이 열전 각 편의 마지막에 평론의 말을 남겼듯이 지금의 나에 대해 한마디 한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태사공이 말하길, 의리는 있었으나 큰 뜻을 품지 못하여 이룬 것이 없구나! 그는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잘 몰랐으므로 사다리 밑에서 살다 갔다! 자신의 사다리를 새로 만들면 되었을 것을..." 사마천이 궁형의 치욕을 받고 <사기>를 완성했고, 손빈도 발이 잘린 후에 <병법>을 썼으며, 여불위는 촉에 유배되었을때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썼다 하니 나또한 희망없는 사다리 밑에서라도 뜻을 품어 키워나가면 책으로나마 후대에 이름을 남길 수 있으려나 싶다.
<저 발전소의 굴뚝이 나에게는 올라야할 사다리로 보인다. 사진/양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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