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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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칠연계곡에 다녀왔다. 얼마전 있었던 지리산 산불탓에 4월말까지 입산금지된 탓에.. 바로 곁에 두고도 내내 궁금해라만 했던 길이었다. 마침 황사도 걷힌 월요일 아침이어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걸음이 한적했다. 매표소 근처 산벚나무가 봄바람 끝자락에 꽃비를 날리고, 드문드문 솔숲 사이로 연분홍 치마자락이 눈을 끌었다. 얼마쯤 올랐을까. 동엽령으로 갈라지는 길목에서 잠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는 것일까 무릎에 바람이 든 것일까.
담배가 한 대 피우고 싶었다. 아무도 없는 곳.. 누구의 눈도 보이질 않고.. 잠시 망설이다 이내 칠연계곡으로 향하는 나무계단을 차고 올랐다. 계단 끝에서 굽어진 산길, 누군가 돌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누굴까.. 아니 한 사람이 아닐테다. 오고 가는 무수한 발걸음에 채이던 돌 하나 하나.. 누군가의 첫 마음을 쫓아서.. 또 오고 가던 이들의 수많은 마음들이 쌓인 것이겠지.. 저마다 소원하나씩을 빌어가며.. 저렇게 쌓인 돌 무덤. 무슨 소원들이었을까. 어떤 이의 그리움도 저렇게 쌓였겠다 싶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슬며시 나도 돌 하나를 얹어두고 간다. 아니 어쩌면 마음 속 그리움을 덜어두고 가는 걸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좁은 오솔길을 굽어 도는 길모퉁이를 만나면, 늘 누군가를 만날 것 같은 상상에 빠져들곤 한다. 좁은 길모퉁이.. 저 산허리를 감아돌면 누가 있을까. 그럴싸한 칠연폭포의 전설 속 선녀들을 만나게 될까. 혹시 목욕하러 내려온 선녀들이라도 만나게 되면 어찌하누.. 나뭇꾼도 아니고서야.. 괜한 걱정을 해보다가 실없는 바람에 웃음을 흘려 보낸다.
잠시 계곡의 물소리가 멀어졌다. 300미터라더니.. 산에서는 거리와 시간이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아직 사람 흔적도 보이지 않는 이런 깊은 골짜기에서야 때도 모르겠고, 이정표가 아니면 어느만치 왔는지 기억하기도 쉽지 않다. 오르는 길 다르고, 내려가는 길이 또 새롭다. 마악 연녹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산허리춤을 감고도는 바람에 몸을 맡긴 이깔나무 숲이 정겹다. 햇볕이 잦아든 낙엽 덤불 위로 진달래 꽃이 지고 있다. 가파른 길 저만치 아래에서 물소리가 다시 이어지더니, 성근 소나무 숲 사이로 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일곱개의 작은 소가 있어 칠연폭포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짤막한 안내문 밖에, 달리 기대했던 칠선녀도.. 나뭇꾼의 도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간간히 땀을 핥고 지나는 바람에 깊은 계곡의 물소리만 묻혀갔다.
배낭을 내리고, 신발을 벗었다. 저 에머럴드 빛 속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끝내 두 발을 담그고야 말았다. 잠시 배낭을 뒤져 책이라도 한 권 꺼내들까 하다가 정신이 바짝 들었다. 헉 하는 숨소리를 두 번 내쉬지 못하고, 도로 발을 꺼내들고야 말았다. 시렸다. 물이야 다시 없이 맑아 보였지만, 좁은 소는 낯선 사내의 얼굴 들이미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계속 물살이 일었다. 적당히 제 몸 감아돌다가 좁은 바위틈으로 빠르게 흘러내리는 폼이 맵시 있다. 자세히 보니.. 그렇게 한 굽이.. 또 한 소를 내리 흐르고, 잠시 돌다가는 이내 정신없이 내리 흘러가버렸다. 바람이 그 길을 따라 쫓아가 본다지만, 금새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계곡 전체가 물 흐르는 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두 손을 모아서 물을 담았다. 입가로 가져갔지만, 여전히 차가운 기운에 물맛을 알지 못하였다. 눈을 들다가 그제서야 소나무 하나가 누운 것을 보았다. 목이 마렸는지, 아니면 칠연계곡 물맛이 궁금했던지 제법 굵은 몸뚱이를 길게 늘여빼고 계곡으로 뻗어 있다. 잎이 아직 시들지 않은 걸 보니, 엊그제 비에 견디질 못한 모양이다. 뿌리만으로는 성이 차질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밤새 칠선녀들이 목욕하던 걸 훔쳐만 보다가, 제가 나무인 줄도 잊고 어찌한번 해보려다가 끝내 저 험한 꼴을 당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무가 눕다니... 남들 눈에야 실성한 소나무 쯤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래 그런 미친 사랑 하나쯤 가지지 못하고 사는 것들이 어찌 알랴 싶으니, 시름시름 말라가는 그의 주검이 다시없이 애잔하게 비쳤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낸다. 항상 진동으로 해놓는 탓에 소리를 낼 이유가 없을텐데.. 무슨 일일까 싶어 이래저래 폴더를 열었다 닿았다 해봤지만 쉽게 영문을 알지 못했다. 두어번 그러다가 이곳이 서비스 이탈지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렇겠구나. 누가 이런 곳에 얼마나 온다고.. 여하튼 그 성가신 울음소리에 젖은 발을 닦고, 양말을 다시 꿰어 찼다.
내려오는 길은 늘 시간이 빨리 흐른다. 터벅 터벅.. 그렇게 발을 내딛다가, 길 한쪽 햇볕이 머금은 자리에서 살짝 흔들리는 연한 하늘빛을 보았다. 현호색이었다. 참 곱다. 가녀린 몸매에 어울리지 않는 긴 뒷태머리를 하고 섰다. 그래도 앞 뒤 균형을 잘 맞추어 서 있는 모습이 아련해보이기도 하고, 두어 송이 엇갈리기도 하고, 나란히 살맞대고 피어 있는 꼴이 정겨워도 보였다. 아직 햇볕이 숲 바닥까지 닿는 때지만, 이 숲도 이제 곧 무성해질테고, 잠시 정다웠던 시절도 지나가고 말터인데.. 시간을 잊은 듯 무릎굽혀 넋을 놓고 있었다.
스쳐가는 얼굴이 있었다. 나와는 초등학교 선후배라는 같다 붙이기에도 별볼일 없는 인연이었지만, 모임에서 인연을 맺은 그녀는 현호색을 좋아했다. 어찌 생각해봐도 참 많이 닮았다. 목소리도 조심조심.. 웃을 때마저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얼마전 아주 오랜만에 하는 통화였지만, 늘 그녀는 상냥했다.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인가 보다. 한 번 맺은 인연 속에 그 사람은 늘 시간을 멈춘 듯, 그 얼굴로 존재했다. 그래서 추억을 되새김질 하는 시간이면 눈을 감게 되는 가보다. 발걸음도 조심조심.. 혹시라도 무심한 발걸음에 다칠새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주위를 한번 휘- 둘러보다가 시계를 봤다. 서둘러야 했다. 저 밑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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