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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7일 23시 38분 등록

나의 청춘은 아버지와의 투쟁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그야말로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었다. 사춘기도 소리 없이 지나가 버려 반항이란 것도 할 줄 몰랐고, 학교에서는 열심히 공부하고 품행이 방정했으며, 부모님 잔소리 없이도 할 일을 알아서 척척 챙길 정도로 야무졌다. 하지만 대학 진학을 앞두고 아버지와 나는 더 이상 사이 좋은 부녀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늘을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다. 온 집안 식구들을 자신의 틀 속에 가두려 하는 아버지가 숨이 막혔다. 아버지 밑에서 대학을 다닌다면 통금시간은 분명 저녁 9시 일 것이고, 낭만의 엠티며 미팅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와 접시는 내돌리면 깨진다고 믿는 전형적인 충청도 양반이었다. 거기다 맏딸에 대한 기대는 좋은 남자 만나 시집 가서 집에서 살림하는 것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내가 근교의 교원 대학에 진학해 교사가 되길 바라셨다. 여자 직업으로 교사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당신의 확고부동한 생각이었다.

 

대학 원서 접수 마지막 날, 결국 아버지가 도장을 내밀었다. 교원대학에 가지 않아도 일반 대학에서 교직 이수를 하면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담임 선생님의 설득에 넘어간 것이다. 원서 접수 마감을 몇 시간 남겨두고 엄마와 나는 서울역에 도착했다. 가까스로 접수 창구에 서류를 들이밀고 교문 앞에서 만난 아주머니를 따라 만리동 허름한 집에서 민박을 했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 날, 나는 내 이름을 대학건물에 걸린 현수막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의 고민은 다시 시작되었다. ‘말 만한 딸을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이 서울 땅에서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

 

당시 서울에는 둘째 고모도 살고 계셨고 아버지 친구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며 가장 확실한 방법을 찾고 싶었나 보다. 바로 누군가의 빽을 이용해 나를 기숙사에 밀어 넣는 것이었다. 아무 영문도 모르고 운 좋게 당첨된 것으로 알았던 나는 점호 시간에 사감 선생님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 네가 바로 수위실 김씨 친척이로구나조치원이 고향이라는 수위 아저씨는 청주 출신인 아버지의 고향 후배가 되었고 나는 졸지에 아저씨의 조카가 된 것이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어들 쥐구멍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숙사에 들어오는데 김씨 아저씨가 날 불러 세웠다. 어디 다녀오냐, 아버지가 걱정이 많으시다, 데모하는 것은 아니냐 등등 아저씨의 훈계가 이어졌다. 아버지는 아저씨를 통해 나의 근황을 정기적으로 보고 받는 듯 했다. 나는 운동권 학생도 아니었고 그 방면으로 별로 관심도 없었지만 1992년은 부모님들이 걱정할 정도의 일도 있을 수 있는 시대였다.

 

기가 막혔다. 이럴 수가 있나. 스무 살이 넘는 딸을 이런 식으로 감시하는 아버지가 유치하면서도 괘씸했다. 나는 당장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다.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매우 불쾌하다. 나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 이런 식의 감시는 그만 둬라. 결연한 문체로 써내려 갔고 과감히 편지를 부쳤다. 그리고 얼마 후 집에 내려갔을 때 아버지는 멋쩍은 표정으로 뭐 그런 편지를 보냈냐고 허허 웃으셨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대학을 다니는 내내 나는 아버지와 부딪혔다. 방학이 되면 서울에 있겠다는 나와 청주로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실랑이가 벌어졌고, 어느 해인가는 사진반에서 가는 설악산 출사에 교수님이 동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내주지 않아, 편지를 써놓고 새벽에 몰래 나온 적도 있었다. 대학 졸업반일 때는 어학연수를 가겠다는 나와 서울로 대학까지 보내주었으면 되었지 외국까지는 안 된다는 아버지가 오랫동안 싸웠다. 아버지가 원하는 길을 거부했기에 나는 아버지에게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았다.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해 장학금도 탔고, 어학연수 가서는 아버지가 정한 가이드라인에 맞춰 성실하게 생활했다. (연수를 보내주는 대신 아버지는 다음의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외국 남자와의 결혼은 절대 안 된다. 둘째, 아버지 친구 댁에서 생활한다. 셋째, 스물 여섯 전에 결혼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 들면서는 교대 갔으면 금방 취업되었을 것 아니냐는 말이 듣기 싫어 필사적으로 취업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나의 갈등의 클라이막스는 뭐니뭐니해도 결혼이었다.

 

비록 반대는 했지만 아버지는 딸이 명문 여대를 졸업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당신이 이룬 경제적 성취에 나의 결혼을 통한 사회적 성취까지 더하고 싶어 하셨다. SKY를 졸업한 전문직 종사자가 사위 후보들이었지만 나는 정반대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버지는 그와 결혼하면 안 되는 이유를 수없이 대며 헤어지라고 성화셨다. 결혼 반대 이유는 명확했다.

 

첫째, 학벌이 좋지 않다. (아버지는 남자의 학벌이 여자의 그것보다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째, 전라도 사람이다. (전라도 사람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집이 가난하다. (정말 입에 풀칠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다.) 넷째,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나이 마흔도 되지 않아 청상과부가 되신 분이시다.) 다섯째,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다. (남편은 기흉 때문에 군 면제를 받았다.) 여섯째, 직업이 안정적이지 않다. (아버지는 자 사위를 보고 싶어 하셨다.)

 

아버지의 극한 반대에 부딪힌 우리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어 사랑의 불을 활활 태웠다. 반대가 심하면 심할수록 우리의 사랑은 더 뜨거워졌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 아버지와 나는 얼굴도 마주 대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이 상해있었다. 아버지 친구분 말에 의하면 그 당시 아버지는 술을 많이 드셨다고 했다. 울기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애지중지 키운 딸을 탐탁지 않은 남자에게 빼앗기는 마음이 오죽했으랴. 두 눈에 두꺼운 콩깍지를 쓴 나는 그 마음도 모르고 아버지 마음에 대못을 깊게 박았던 것이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는 경찰 친구에게 부탁해 사윗감의 신원 조회를 했다. 집안끼리 아는 사이도 아니고 오다가다 만난 남자에게 딸을 보내는 마음이 얼마나 불안 했을까? 다행히 신원 조회 결과는 깨끗했다. 아버지는 돈만 없지 아주 깨끗하다고 좋아하셨다. 당시 나는 그 사실을 알고 부끄러웠다. 우리 아버지 참 극성이셔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참 고맙다. 정말 어쩌다 만난 사이였는데 결혼 후에 숨겨 놓은 자식이라던가 수천 만원의 빚 같은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면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우다 보니 아버지의 마음을 알겠다. 만약 내 딸이 타지에서 생활하게 된다면 나는 내 아이의 안전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했으리라. 혈연, 지연, 학연을 총동원해 내 아이를 보호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든 회유해 나의 연락책으로 삼았을 것이다. 나는 지은 죄가 있어 내 딸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남자를 데려와 결혼하겠다면 반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 아이를 위해 온갖 방법으로 reference check을 할 것이다.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 고운기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중에서

 

아비 수달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뼈만 남아서라도 제 새끼를 품고 싶은 아비 수달의 마음을 이제야 알겠다. 나는 아버지가 계셔서 참 좋다. 고혈압에 고지혈증에 울화병에 심장병 약을 달고 사시지만 아버지가 오래오래 내 옆에 계셨으면 좋겠다. 나는 아비 수달의 새끼가 되어 그 품에서 오래오래 어리광을 부리며 살고 싶다. 내일 친정에 내려가면 아버지에게 따뜻한 밥상을 한 상 정성껏 차려 드려야겠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돼지고기 고추장 볶음도 한 접시 가득 담고, 얼큰한 김치찌개도 한 냄비 바글바글 끓이고, 무를 송송 썰어 들기름에 들들 볶아 무채나물도 한 접시 먹기 좋게 담아야겠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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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5.07 23:39:23 *.35.19.58
내일 친정에 내려가게 되어 미리 과제 올립니다. 어버이날 다들 효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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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13:00:25 *.166.205.131
어버이날에 딱 맞는 글을 쓰셨네요~
술술술 참 잘 읽혀요~ 수위아저씨 빽으로 기숙사에 들어가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역쉬 재밌어요^^
그럼 효도하는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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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8 22:19:23 *.109.54.76
그래요 누나 시기도 내용도 예화도 모두 딱이에요 누나.
정말로 누나글은 한번에 솨악하고 빨려들어 가듯이 읽혀요.
부모님과 함께 행복한 시간 보내셨길 바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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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8:30:05 *.160.33.89
수달이야기는  삼국유사 중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 중 하나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이야기를 찾아내 짜나가는 수법은  구라의 제 1 법칙이다.   너는 구라쟁이 자질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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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5.09 17:19:00 *.35.19.58
사부님, 감사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심을 전하는 구라쟁이가 되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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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09:25:56 *.75.194.69
ㅎㅎ 재경언니~ 나도 이 수달 이야기 마음 아프게 감동적으로 읽었는데 
언니가 써서 그냥 패스했지~ 이야기꾼이야 언니는 정말 
여행이야기도 곧 들려주세요~~
전 숙제한다고 이번 어버이날은 불효한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 한 가득이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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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5.09 17:33:35 *.35.19.58
친정가서 밥상은 못 차려 드리고 오리한방백숙 사드렸네.
용돈 조금 드렸는데 그것보다 서너배 얻어 왔다.
그래서 자식인가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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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5.09 10:28:13 *.23.188.173
보다 눈물이 날 것 같았아요
우리 아빠랑 많이 닮았네. 세상의 아빠들은 그리 비슷한가보다.
아빠한테 문자보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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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5.09 17:20:37 *.35.19.58
루미야, 나는 이제야 아버지 마음을 알것 같구나.
너도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아버지 마음을 뼛속으로 느끼는 때가 올거다.
아버지께 잘 해드려라.
딸은 아버지에게 항상 시린 가슴인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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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9 13:56:30 *.205.67.118
어버이날에 맞춰서 정말 잘 어울리는 글을 썼네요.
그 수달 얘기 정말 짠했는데
언니 글을 읽다보니 우리 아빠도 그러신데 하는 생각에 죄송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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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5.11 06:53:43 *.219.84.74
어린이날, 어버이날...자기자리에서 제 노릇을 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그지?
우리들은 천성적으로 제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에 집착하고 있는 무슨 증후군 비슷한...?
인생도 그렇다는 생각. 제대로 살아보자. 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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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05.17 06:49:25 *.69.13.86
언니 나도 눈물이 찔끔.. 그래도 내 생각 가장 많이 하고, 아낌없이 퍼주고, 무조건적인 사랑해주는 사람은 부모님밖에 없는듯.. 부럽네요. 언니 아부지.ㅋㅋㅋ.. (물론 우리 아버지가 언니 아버지 같았으면 심하게 삐뚤어졌을텐데.ㅎㅎ 언니는 대단하심!!) 나도 엄마한테 잘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왤케 현실에선 잘 안되는지.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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