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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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유사(三代有事)
세 명의 여자가 살고 있는 우리집은 말 그대로 삼대가 모여 산다.
1대 : 최금희. (일명 최여사. 할머니로 불린다)
부엌과 식탁, 거실과 안방 등등 집안 곳곳을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다. 집안 곳곳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그녀는 가장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소녀의 감성과 배움의 끈을 놓지 않는 인물이다.
2대 : 이루미(하은 엄마, 할머니 딸로 통한다)
자기 방의 컴퓨터, 화장대, 옷장, 행거를 영토로 가지고 있는 그녀는 어지러움 속에 보물을 숨겨놓고 산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지럽지만 그녀는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다 알고 있다. 한창 때이지만 아직 어린애스러운 면을 모두 다 벗어버리지 못한 인물이다.
3대 : 이하은(일명 귀요미, 공주)
거실 한 구석의 뿡뿡이 집을 중심 거점으로 삼아 각종 소꿉놀이와 블록, 퍼즐을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영토는 작아 보이지만 어느 한 곳도 가지 못하는 곳이 없는 인물이다. 모든 물건을 놀이감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자기화의 귀재이다.
하은, 영토확장의 꿈을 꾸다.
처음 이모가 뿡뿡이 집을 선물했을 때 하은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신나했었다. 거실 한가운데다 펼쳐놓고 모든 식구들을 초대했다. 그 이후로 우리집을 방문한 거의 모든 사람은 이 뿡뿡이 집을 들어가지 않은 자가 없다. 며칠을 두고 보던 할머니는 한 쪽 구석에 뿡뿡이집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 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장난감을 밀어넣었다. 어린 사촌들에게 물려받은 각종 소꿉들과 블록들은 이제 뿡뿡이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안에 들어가서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며 할머니는 깔끔해서 좋다 하셨는데 요즘 하은이는 영토확장의 꿈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싱크대며 소꿉들을 밖으로 가지고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뿡뿡이 집 근처에 다시 살림들을 늘어놓고 조금씩 조금씩 거실의 복판을 위협하게 된 것이다.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는 할머니를 뒤로 하고 나는 하은이의 영토확장을 돕는다. 그 좁은 집에서 가지고 노는 것보다는 더 편하다. 점차점차 장난감들이 차지하는 자리가 늘어간다. 하지만 잠시 한 눈을 팔거나 다른 곳에 다녀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집안으로 들어가 있다. 그녀의 영토확장의 꿈은 아직 멀다.
금희, 수호의 훈장을 얻다.
최여사는 하은이가 어린이집에 가고 나면 집안을 청소하고 수묵화 숙제를 하기 위해 자리를 깐다. 조용한 오전 시간을 난을 치시며 보내는 데 최근에는 매화를 그린다며 나뭇가지를 연습하고 있다. 하은이의 나무 블록을 가져다가 벼루 한 쪽을 괴고 하은이의 공주 접시를 가져다가 먹의 농담을 맞추는데 사용한다. 그리고는 하은이가 오기 전에 이 모든 것을 정리한다. 서랍장 아래의 빈 공간에 그날의 숙제와 각종 도구들을 밀어 넣고 붓을 씻어 놓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어느 날 하은이가 집안을 휘저으며 돌아다니다가 서랍장 밑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조용히 끄집어 내어 살피다가 하은이가 말한다.
“하은이꺼다.”
빛의 속도로 할머니가 뛰어 온다.
“그래 그래. 하은이꺼네.”
후다닥 모든 것을 뭉뚱그려 하은이가 미처 닿지 않는 곳에 올리고 하은이는 못내 아쉬운 듯이 손을 뻗어본다. 나는 하은이의 옆에 붙어서 저것은 할머니 꺼라며 하은이의 나무 블록을 돌려주고 공주 접시를 씻어 주겠노라고 약속한다. 성공리에 마무리 되는 순간, 무언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할머니가 발을 부여잡는다. 급하게 모든 것을 올리는 와중에 서진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할머니의 발등을 찍었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하은이도 나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서진이 떨어진 자리는 시퍼런 멍이 들었다. 수묵화 선생님께 보일 숙제는 가까스로 지킬 수 있었지만 최여사의 발등의 멍은 한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최여사는 서진을 숨길 새로운 장소를 물색했다.
루미, 보물을 잃다.
집으로 돌아와보니 난리가 났다. 할머니와 하은이가 연신 깔깔이다. 이유는 바로 며칠전에 사놓은 나의 샤스커트. 그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하은이가 자꾸 욕심을 내었는데 끝내 방에서 가지고 간 것이리라. 살랑살랑 샤스커트에 멜빵을 연결해서 입고 있다. 그걸 입고는 기분이 좋아서 한바탕 돌아가며 패션쇼중이다. 샤스커트에.. 멜빵을 연결하다니..... 저 연약한 원단이 버티는 것이 신기하다. 아이는 즐거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그것을 본 할머니는 말한다.
“봐라 너보다 더 잘 어울리지?”
처음 샀을 때부터 그 치마를 마음에 안 들어 하더니만. 결국 이 두 여자의 공세 아래 나는 항복을 외친다.
“입고 놀으라 그래. 내년 쯤 되면 허리 밴드 줄여서 하은이 입으라 하지 뭐.”
한 번이나 입었을까? 너무 샤방샤방해 사놓고 보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는데 결국 멜빵에 메인채 뿡뿡이집 한 구석에 자리를 틀게 되었다.
하은, 뜻을 이루다.
아침 일찍 일어난 하은이가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날이라며 빵을 사러 가기를 요구한다. 이런 휴일날 7시에 옷을 갈아입고 하은이를 데리고 빵을 사러 가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할머니를 보낼 수도 없다. 내가 가면 차를 끌고 가겠지만 운전을 못하는 할머니가 가면 둘이서 걸어가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어떻게하면 하은이를 구슬릴까를 생각한다. 이런저런 핑계를 댄다. 아직은 아저씨가 나오지 않아서 빵을 사러 갈 수가 없단다. 지금가면 기다려야 한단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은이에게 늘어놓으며 이리저리 미뤄본다. 순간 삑삑삑삑. 하은이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누구세요?”
할아버지다. 아이는 신이 나서 할아버지에게로 뛰어간다. 하은이가 보고 싶어서 새벽 운전을 마다않고 달려오신 것일 테다. 하은이는 할아버지에게 안겨 말한다.
“빵이 사러 가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방만 내려놓으시고 냉큼 아이를 안아들고 동네빵집에 간다. 잠시 후에 집에 들어온 아이의 목소리는 아주 신이 나 있다. 봉지를 열어보니 작은 초코렛 케이크가 자리하고 있다. 이런. 할아버지에게 사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잊어버렸다. 할아버지한테 뭐라고 하자 하은이가 나선다.
“왜 뭐라고 그래? 하은이가 무섭잖아.”
할아버지를 보며 말한다.
“그쥐·~~~?”
내가 나가지 않는 것에 좋다 했건만 이건 나의 완패다. 나와 할머니의 씁쓸한 표정을 뒤로한 채 하은이는 할아버지와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먹는다. 그것도 하은이의 규칙에 따라서. 그러나 이미 초코 우유는 내가 숨겨 놓았음을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다.
삼대가 사는 우리 집은 이렇다. 어느 집이나 다 그렇겠지만 서로 눈치를 보며 자신의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위해서 무던히 애를 쓴다. 그 가운데 자신이 필요하면 언제든 상대방과 연합을 맺을 테고 필요 없으면 동맹이 끊어지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가 함께 하는 동안 끊임없이 발생할 테다. 아니 떨어져 살아도 일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건들을 겪어가며 하나의 가족으로 탄생하는 중이다. 함께 산다고 모두가 가족은 아니다. 떨어져 산다고 가족이 아님이 아니듯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돕기도 하고 또는 자신의 의사를 펼치기도 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져 간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의 가족으로 더욱 굳건해 질 것이다.
누군가가 전성기를 맞으면 한편으로는 돕고 한편으로는 연합을 맺어 너무 커다란 권력을 저지하게 될 것이다. 각자의 특성을 발판 삼아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서로의 개성을 인정하고 발달 단계와 과업을 이해하며 우리 삼대는 공존의 방법을 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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