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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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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0일 10시 28분 등록

길을 나섰다.

아침 6시, 동서울로 가는 첫차를 탔다. 청량리로 가서 기차를 탈까 망설였지만 딱히 교통편이 여의치가 않았다. 전주에서 강원도 땅을 밟는 일이 웬만해선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 이번 여행도 먼 걸음이 될 것이다. 나흘 걸음으로 나선 길이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마음이 몸을 떠나 그곳에 머물기 시작하더니, 요사이 며칠 꿈자리마저 뒤숭숭한 것이 더는 미뤄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싶었다. 차에 오르기 전 커피가 한 모금 마시고 싶었지만, 아직 커피점이 문을 열기도 이른 시간이다. 그렇다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기는 싫었다. 왠지 사람 냄새 나지 않는 틀에 박힌 기계음이 섞여 나오는 그런 맛으로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다.

버스가 터미널을 벗어나면서, 익숙한 풍경들이 하나씩 창문으로 스쳐갔다. 매번 전주를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면 보게 되는 장면들이다. 마치 ‘토요명화’의 시작을 알리는 시그널처럼 그것은 낡은 필름이 돌아가듯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하나씩 하나씩 지나쳐 갔다. 티비 화면의 오른쪽 맨 위에 쓰여진 타이틀이 사라지기 직전까지, 그것은 늘 새로운 설레임을 맛보기 전에 참아내야 할 지루한 광고 같은 것들이었다. 2백년을 노예살이로 익숙해져 온 에굽을 벗어나는 히브리민족의 엑소더스처럼.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겠지만, 지금은 그저 벗어던지고 싶은 답답한 일상들이었다. 날씨가 더 없이 좋았다. 잠시 전주천을 따라 가는 길, 수양버들의 양기가 오를 대로 올라 있었고, 언제 봄이였냐는 듯 5월초 거리의 가로수들은 서둘러 신록의 여름을 맞고 있었다.

설핏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주변에 어수선한 분위기에 잠을 깼다. 왼손에 쥐고 있던 소설책이 허벅지 사이에 파묻혀 있었고, 버스는 천안휴게소에서 으르렁 거리던 숨소리를 멈추고 서 있었다. 딱히 볼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바깥 공기가 쐬고 싶어 차에서 내렸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천안의 명물이라는 호두과자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 생각이 났다. 출장을 다녀오시면 늘 잊지 않고 사다 주시던 빵이었다. 그 덕분에 아버지의 출장을 일일이 알지 못했지만, 팥고물이 가득 들고, 약간의 호두알이 씹히던 호두과자를 맛보는 날이면 삼남매는 아버지가 좀 더 자주 출장을 다녔으면 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제 호두과자는 천안의 명물이 아니다. 전국 고속도로 어디서든 구할 수 있고, 심지어는 사람들 발길 좀 닿는 곳이면 쉽게 맛볼 수 있을 만큼 흔한 과자가 되어 버렸다. 아니 달라진 것은 그 뿐이 아니었다. 미국산 호두와 밀가루에 중국산 팥이 주원료가 되었다. 명색이 천안의 명물일 뿐, 그 어느 것 하나 천안의 맛이 담겨지지 않았다. 이름만 남고, 몸도, 맛도 이미 사라진지 오랜 일이다. 근본을 잃어버린 삶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설사 그 과자가 그대로라고 한들 내게는 더 이상 출장길에 호두과자를 안겨다 주시던 아버지의 손맛을 다시 볼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서울 가까이 접어들면서 버스가 확실히 속도를 내지 못하였다.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징검다리를 낀 연후의 시작,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5월의 봄이라지만 계절을 느끼지 못하는 회색빛 콘크리트 죽음 속에서 숨을 쉬어보려는 물고기들처럼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버스 기사가 티비의 볼륨을 높였다. 사각진 틀에 갇힌 뉴스는 매년 비슷했다. 오늘 하루 날씨가 좋아 나들이객들이 몰릴 거라는 둥, 대통령이 어디 행사에 참여할 거라는 둥, 아이들과 함께 가볼만한 각종 행사들을 번갈아 가며 소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짤막한 말 한마디조차 없다. 그의 이야기는 오늘같이 좋은 날 분위기에 맞지 않는 재미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색동회며.. 새싹회는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희미하다. 세상은 이미 그를 잊었나 보다. 버스가 한강을 건넜다. 이 커다란 강물도 분명 어디쯤에서 푸른 벌판 달려온 냇물이었을 것이다. 이제 곧 동서울 터미널이다. 다시 짐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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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5.11 08:33:08 *.219.84.74
자연은 무심하지만 인간은 유심하여 보는 것 마다 마음을 불어 넣는다.

선배님의 눈과 마음은 무심코 지나치는 수 많은 것들에 눈을 주어 마음을 붙이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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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1.05.11 15:13:43 *.1.108.38
ㅎㅎ 뭐.. 그냥 세상 뭔 맘 먹고 사느냐 따라 그런거겠지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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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1.05.11 08:35:31 *.30.254.21
오늘은, 나도
하루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
길을 나서야겠다.
나중에 질문하지 말것!
혹시 청량리 오면 연락해라...
국밥 한 그릇 사줄 터이니..
아니면 인건이네 가서 순대국밥 한그릇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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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1.05.11 15:12:51 *.1.108.38
실은 전날 밤에 청량리역 쪽으로 가서 하루를 잘까 생각도 했지요..
아무 생각도 없이.. 강원도로 넘어갈 생각만으로.. 그러다 문득
형네 병원 근처 아름다운 밤풍경들을 아직껏 보지 못했구나 싶더군요...
그렇지만, 꾹 참아야 했습니다. 만에 하나 그 풍경에 사로잡히면...
나흘 밤낮을 588번지에서 묵고 말았을지도..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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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0:41:25 *.230.26.16
이 찬란한 신록의 연휴에 먼길을 떠난 이유가 무얼까?
색동회와 새싹회라... 무언가 알듯말듯한 이 담 이야기는 무얼까?
그런데 그 이야기에는 과연 강이 나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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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10:04 *.1.108.38
글쎄..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뭔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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