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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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신혼부부가 사랑을 할 때마다 크고 예쁜 유리병에 콩 한 개씩을 넣었다. 결혼 3년이 되자 어느새 유리병이 꽉 차버렸다. 그 후부터는 하나씩 콩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 병은 평생토록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육체적 열정과 관심은 처음에 가장 강하다. 남녀 모두 그렇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조금씩 확인해 가던 시절, 처음으로 건네준 꽃다발을 받아 든 날이었다. 나란히 걸어가던 그의 손안에 살며시 내 손을 밀어 넣던 순간의 터질듯 한 심장의 두근거림, 잠시 후 아무 말 없이 꼭 마주잡아오던 그의 손길에 온 마음에 펴져가던 기쁨... 늦게 퇴근하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텅 빈 좌석버스 안에서 아름다운 한강 야경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사라졌던 그 때, 살포시 내 무릎 위에 내려앉은 그의 뜨거운 손바닥과 그 순간 내 혈관을 따라 흐르던 찌릿한 전율과 피부에 돋았던 소름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들이다. 연애할 때의 뜨거운 열정은 마지막 버스를 놓칠 때까지 우리를 헤어지지 못하게 했고 그는 종종 터벅터벅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헤어지는 매순간이 너무 힘들고 떨어져있는 시간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하던 공부를 접고 졸업과 취업을 서둘렀고 우리는 그해 가을 결혼을 했다.
불같던 열정으로 결혼을 했지만 이듬해 임신을 하고 다음해 아이를 낳자 우리의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아내와 남편으로의 모습보다 직장인으로, 생활인으로 역할이 점차 강해진 위에 엄마와 아빠의 역할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이는 대부분 기쁨이었지만 때때로 짐이요, 구속이었다. 우리 큰 딸은 밤낮이 바뀐 채로 돌을 맞았고 그 후로도 한동안 밤은 달콤한 둘만의 시간이 아니라, 잠과의 사투로 지새운 무서운 시간이었다. 좋은 엄마이고 싶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직업인이고 싶었던 나는 늘 피곤했다. 당연했던 주6일 근무와 되풀이되는 야근, 휴일이면 종종 돌아오는 가족의 의무들... 퇴근 후 나에게 남은 조금의 에너지는 물론 종일 나를 기다린 아이 차지였고 그는 더 이상 나의 열정과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신입사원이었던 그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를 위로해주고자 하는 그의 손길도 종종 짜증의 대상이었다. 어느 덧 우리에게 섹스보다 중요한 것이 수 십 가지가 되었다. 중요한 한 가지가 삐걱대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힘든 현재가 아닌 우리가 함께 보낸 과거와 또 함께 보낼 미래였다.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놓았던 친밀감과 신뢰, 그리고 육아라는 공동 프로젝트에 대한 연대의식과 책임감이 불같던 애정 대신 우리를 묶어주는 가늘지만 강한 끈이었다.
아슬아슬 쳇바퀴를 돌던 우리의 생활은 외적인 돌파구가 필요했고 얼마후 나는 한계를 느낀 조직과 일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 둥지를 틀었다. 일과 삶에서 찾은 활력과 자신감은 나에게 여유를 찾게 해주었고 내 옆에 있는 한결같은 사람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최고 힘들었던 육아초기를 함께 지나 다시 바라본 그는 변함없는 내꺼라서 더 가치있고 매력있는 남자였다. 나는 기꺼이 새로운 탐구에 나섰다.
남자는 그들의 관계가 보다 신체적일 때 무언가 잘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자는 그들이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때 그들의 사이가 더 좋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때 남자는 만지고 싶어하고 여자는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런 남녀의 차이는 종종 부부간의 갈등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동시에 차이가 아닌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녀가 많은 시간을 함께 할 때 여자는 남자를 더 가깝게 느끼고 이런 친밀감은 몸으로 전달되어 신체적 욕구가 된다. 여자의 섹스는 전희가 99%라는 것이 결혼 11년차 나의 지론이다. 결혼한 지 이십년이 넘은 나의 지인은 100%라고 단언한다. 그러니 남편과의 섹스는 단순히 침대에서 시작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관에서, 식탁에서, 싱크대 앞에서, 그리고 소파에서 시작된다. 따뜻하게 주고받는 눈길하나, 오늘도 수고했다고 건네는 말 한마디, 살며시 어깨에 얹어지는 손길 한 번에 그녀의 마음은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시크릿가든>을 보며 현빈에게 열광하고 등장인물들과 함께 두근거리고 아쉬운 한숨을 내쉬는 것은 그 미묘한 설레임의 오고감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그 마음과 손길과 눈길이 늘 일상 속에서 살아 숨 쉬도록 물을 주고 가꾸어야 한다. 결혼 생활이 지속될수록 외적인 면에서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경우는 줄어든다. 매일 보는 배우자에게서 성적 페르몬이 펑펑 풍기진 않는다는 뜻이다. 처음 연애를 시작할 때 손 한 번만 잡아도 두근대던 그 마음을 일상 속으로 끌어올 수 있으려면 다른 것이 필요하다.
사랑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신비함이 필수이다. 호기심은 모든 관계 시작의 기본이고 특히 남녀관계에서 처음의 신비감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앉으나 서나 온통 그대 생각뿐이라는 노래의 가사는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에 빠진 사람의 공통된 감정이다. 그러나 신비함과 호기심, 그로 인한 설레임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랑은 풋사랑이요, 처음 사랑이다. 젊은 날의 드라마틱한 사랑과 결혼에 대한 환상에 집착할수록 진정 깊은 사랑을 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중년의 위기에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서는 것은 이런 집착의 헛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관계에도 성숙이 필요하다. 첫사랑의 이미지, 첫 만남의 이미지를 벗어나 더 깊은 관계로 들어가기 위한 성숙이 필요하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남편 앞에서 맨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는 아내의 이야기는 평생 남편 앞에서 맨발을 보이지 않았다는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안방 화장실 문을 열어 놓고 볼일을 보며 남편과 이야기 한다는 직장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설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던 신혼 초 나의 모습은 이젠 사라졌다. 결혼이 일상이 되면, 그 번잡한 일상에서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사소한 감정과 일과 생각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 호기심과 신비감에서 시작된 열정이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시간을 거스르는 사랑으로 진화한 것을 확인한 순간, 그 사랑은 상대를 매혹시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변화시킨다. 그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되며, 사랑하고 동시에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살아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섹스를 하도록 프로그램화되어있는 본능의 한계를 벗어나 영혼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게 된 순간, 흐르는 시간은 더 이상 사랑의 적이 아니요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하나하나 가면을 벗고 벗겨주며 성숙을 받아들이고 함께 탐구해 나가는 것은 열정이 줄 수 없는 깊은 평안과 믿음을 주며, 그로 인한 든든한 사랑과 지지는 내가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이 사랑의 힘으로 나는 높이 날아올라 더 아름다운 사람,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사랑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이 순간순간 그를 유혹할 수 있는 힘이 되고 그는 기꺼이 나의 유혹에 빠져든다. 서로에 대한 끝없이 새로운 탐구, 사소한 일상의 유혹들, 이것이 우리가 결혼 십년이 넘는 동안 함께 가꿔온 최고로 다정하고 솔직한 몸과 마음의 대화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