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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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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11일 14시 57분 등록

정선가는 길은 멀었다.

정선으로 이어지는 버스는 9시 반에 있었다. 표를 끊고, 화장실 다녀올 시간만큼 남았다. 터미널 화장실은 늘 불쾌함이 먼저 기억되곤 했지만,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서 미뤄두었던 일이 있었다. 지금 아니면 앞으로 얼마나 오래 참아야 할지 몰랐다. 별 수 없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줄을 섰다. 생각보다 깨끗했지만 가뜩이나 비좁은 곳에 역한 소독냄새며, 장기매매 연락처나 사창가의 밤을 추억해내는 낙서들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곳이다. 앞에 섰던 사내가 도로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두리번 두리번 벽에 걸린 콘돔자판기 옆, 두루마리 화장지를 둘둘둘둘 말아간다. 설마하니.. 저 많은 화장지가 필요할까 싶었지만, 사내는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도로 화장실 문을 꽝 닫고 들어가 버렸다. 곧이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요란하게 한참을 쏟아져 나왔다. 사내는 어젯밤 기억을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정선행 버스는 터미널 맨 오른쪽 1번에서 탔다. 사이사이 버스들의 틈을 비집고, 뒤쪽에 대기 중인 행선지를 목에 건 강원여객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누구일까. 내 곁에 앉게 될 사람은. 참한 긴머리를 한 풋풋한 냄새 나는 동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매번 허망한 바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버스에 오를 때마다 되살아 오르곤 했다. 운전기사가 표를 받자마자 찢어버렸다. 반쪽이 난 표만 돌려받고서 마치 복권의 당첨번호를 맞추듯, 좌석번호를 찾았다. 밝은 연두색 잠바를 입은 그녀는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직 육십은 넘지 않은 듯이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실없이 한 번 웃으며, 배낭을 벗어 선반 위에 얹혔다.

장평까지 간다고 했다. 내가 보던 소설책을 흘깃흘깃 쳐다보더니, 금새 봉평이 사는 집이란다. 서울 사는 아들집에 들렀다 가는 길이라며, 이제 세 살 된 손주 녀석 맡아 키우기가 만만치 않은 일이라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들이 길따라 이어졌다. 버스는 중간에 쉬지도 않았다. 봉평장이 지금도 서는지를 물었다. 그리고 아직껏 열목어가 사는지도 궁금했다. 아주머니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메밀꽃이 언제 피는 지를 다시 물었더니, 그때쯤이면 펜션의 일손이 모자라다는 말을 했다. 서울서 다녀가는 사람들이 옥수수를 찾는데, 자기 텃밭에 심은 옥수수도 늘 부족하다고 했다. 명함을 한 장 청했더니, 발아래 낡고 두툼한 핸드백을 한참동안 뒤져 겨우 한 장을 찾아냈다. 리버사이드〇〇. 흔한 이름이었다. 검색어로 리버사이드를 치면 찾기 어렵고, 펜션하고 리버사이드를 쳐야한다며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명함에는 남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굳이 아주머니의 이름을 묻지 않았지만, 궁금했다. 점순이? 분례? 분이.. 아니면 복녀? 어쩌면 분녀일지도 모른다. 나는 들고 있던 소설책을 다시 뒤적거리며, 스쳐가는 얼굴들 속에서 봉평댁의 이름을 찾아보려 했다. 길이 멀긴 먼가보다. 두어 번 고갯방아를 찧던 아주머니의 고개가 왼쪽 어깨에 지긋이 와서 닿는다.

장평에서 십 분을 쉬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도 이내 사라지고 나니, 종이컵 커피 한잔씩을 들고 담배를 피우는 터미널 직원과 운전기사의 대화소리만 남는다. 길이 많이 막히지 않더냐는 인사말에 말도 마라는 운전기사는 금새 담배 두 대를 빨았다. 버스에 오르는 그를 따라 나도 올랐다. 아직도 시간 반은 족히 가야했다. 꽉 찼던 옆 자리가 헐렁해졌다 싶었더니 곧 버스가 굽어진 길을 따라 늙은 노새마냥 느릿한 걸음을 하였다. 내 몸도 안단테에 맞춰진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천천히 흔들렸다. 해발 500미터.. 정선으로 이어지는 42번 국도는 그렇게 비행기재를 넘었다.

정선에 닿은 것은 해가 중천에서 살짝 기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미 때를 놓친 배가 알고 소리를 낸지 오래였다. 배꼽을 누른다고 해도 꺼지지 않는 시계였다. 다시 또 표를 끊고, 화장실을 다녀온 후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았다. 터미널에 딸린 작은 분식점에서는 라면도 팔고, 김밥도 말았다. 현이네 분식... 아마도 아이들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인가보다. 얼마 크지도 않은 가게라서 혼자 운영한다는 주인아주머니는 강릉에서 살다, 남편따라 정선에 몸 붙인지 벌써 이십년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전주에서 왔다고 했더니, 어디쯤인지.. 또 얼마나 먼 길인지를 잘 가늠하지 못하였다. 아마도 이 골짜기가 깊은 탓이려니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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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1 15:22:44 *.230.26.16
구절구절 잼있는데...
그래도 궁금타, 도대체 정선엔 왜 갔는데???emoticon
담주까지 못 기다리는 거 알죠? emot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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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2 08:41:09 *.10.44.47
저도 재미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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